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24
24화
아시어스가 이죽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지나치는 관의 뚜껑에 가늘고 휘어진 필체로 이름이 쓰여 있었다.
알레이아 발디마르.
루이즈 발디마르.
프란츠 발디마르.
베로니카 발디마르.
아시어스 턱이 단단히 다물렸다. 그가 미리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라타에의 사절단과 함께 예정된 일자에 발디마르에 도착했다면, 그가 가장 먼저 보았을 것은 5왕자의 관이 아니라 리즈벨 발디마르의 관이었을 것이다.
거침없이 가까워져 오는 장신의 남자를 피해 루시페가 몸을 버둥거렸다.
“라타에와 척질 생각은 없다. 사절단 도착 예정일은 아직 남은 것으로 아는데. 이 이상의 간섭은 월권이야. 왕가의 일은 왕가에서 해결한다.”
노화가 상당히 진행된 데다 팔다리가 굳고 혼자서 운신할 수조차 없는 왕은 꿈틀대는 번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주제를 모르는 열등한 것.
“일단은 하나 묻지요. 계승 전쟁에서 최후의 하나가 남으면, 그 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습니까?”
그렇다고 말해라. 어차피 악마에게 매인 이상 곱게는 못 죽을 몸, 최소한 가엾게라도 여겨 주마.
루시페가 광포한 웃음을 터뜨렸다.
“왕위를 물려줘? 설마. 내가 이 자리를 어떻게 얻었는데.”
“…….”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하나는 나를 구원할 아이일 뿐이야. 귀한 신탁의 아이. 가장 강한 발디마르의 전사.”
악마의 마력에 잠식된 빛바랜 눈이 과거를 추억하듯 아련한 빛을 띠었다. 왕이 흡족하게 지껄였다.
“아주 좋은 생각이었지, 계승 전쟁이라는 것은. 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뱀, 이고르의 갈라진 혀가 루시페의 손등을 길게 핥았다. 루시페의 얼굴에 악귀의 미소가 떠올랐다.
“신탁의 아이가 가려질 때까지 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아주 오랜만에, 눈앞이 하얘질 만큼 끓어오르는 분노가 일었다.
아시어스의 모습이 휙 사라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루시페의 코앞에 나타났다.
“……!”
루시페의 숨을 10년이 넘게 연장해 주고 있던 뱀 형상의 악마, 이고르가 겁에 질려 바닥으로 후다닥 기어 내려갔다.
그러나 재빠르게 움직인 회색 연기가 뱀의 몸통 한중간을 휘감아 구석으로 메다꽂았다. 무언가가 쨍그랑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뱀이 급박하게 쉭쉭거리고, 회색 안개가 찢어지는 파공음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집요하게 이고르를 뒤쫓은 바일이 비늘 돋은 대가리를 콱 조이자, 뱀이 고통스러운 소리로 울었다.
아시어스는 그 모든 소음을 뒤로하고 루시페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한때 전쟁귀라 불리며 이웃 왕국들을 벌벌 떨게 했던 폭군은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허공에 매달렸다.
“커, 커억. 이고…….”
“간만입니다. 저로서도 이런 경우를 목격하는 건 흔치 않아서.”
“이고르. 이고르……!”
“그런데 어쩐다, 썩 흥미가 돋지는 않는데.”
흥미는커녕 역겨움이 치밀었다. 루시페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시어스는 본래 물리적 공격이나 육탄전을 벌이는 것을 꺼리는 성정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편에 가깝다. 딱딱한 일자를 유지하던 그의 입매가 비딱하게 치켜 올라감과 동시에, 주먹이 루시페의 오른뺨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콰앙-. 루시페의 몸이 허공을 날아 가장 가까이에 있던 1왕녀의 관에 부딪힌 뒤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거기에서 끝내지 않고 그는 곧장 따라붙어 다른 쪽 뺨을 한 대 더 갈겼다. 부러진 이가 허공을 날고 피가 흩뿌려졌다. 일부는 활짝 웃고 있는 남자의 뺨에도 튀었다.
오랜만에 직접 몸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손맛이 좋네.’
아시어스는 루시페의 하관에 피가 질질 흐르고 나서야 아쉽게 주먹을 털었다. 시간이 넉넉지 않은 게 흠이다.
“보자,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단번에 즉사, 혹은 천천히 고통스럽게.”
최후의 선고가 떨어졌다.
“고르시면 됩니다. 발디마르의 왕이시여.”
왕의 푸른 눈에 공포가 깃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 *
리즈벨은 달렸다. 처음부터 달린 건 아니었다. 분명히 다급하긴 했어도 조용히, 발걸음에 주의하면서 복도를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달리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저 복도와 계단에 이상하게 들어찬 고요가 불길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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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쪽지의 내용이 자꾸만 떠올랐다.
사실 그것이 로제스의 필체인지 아닌지 리즈벨은 확신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로제스의 글씨를 본 적이 없으니까. 필체뿐만이 아니다. 리즈벨이 로제스에 대해 아는 것을 다 합쳐도 다섯 손가락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쪽 탑 아래에는 서쪽 탑으로 통하는 긴 회랑이 있었다. 회랑의 중간에 있는 거대한 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작은 규모의 왕실 행사가 열리는 연회장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발디마르 왕성에서 본성의 발리에드 홀 다음으로 큰 나나크 홀. 그러나 18년 전, 그곳에서 왕비와 왕의 애첩들이 동시에 목이 잘린 이후로는 사용되지 않는 홀이다.
리즈벨은 그곳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크릉…….”
리즈벨의 품에 단단히 안긴 여우, 티스가 불편한지 자꾸만 울어 댔다. 그러다가 기어코 풀쩍 그녀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말 안 듣는 건 네 주인이랑 똑 닮았구나.”
리즈벨은 한숨을 쉬며 붉은 여우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티스는 약이라도 올리듯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손을 빠져나갔다. 그러면서도 눈치를 보며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걸 보니 어딘가로 내빼려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리즈벨은 결국 티스를 붙잡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발을 재촉했다.
‘이상하다.’
리즈벨은 자신의 직감을 믿는 편이었다. 본능에 몸을 맡긴 채 살던 세월이 무려 과거에 15년, 돌아온 뒤로 다시 9년이다. 계승 전쟁에서 벼려질 대로 벼려진 감이 자꾸만 그녀에게 외쳤다.
‘앞으로 가.’
‘멈추면 후회할 거야.’
직감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그녀의 머릿속에 대고 속살거리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리즈벨은 자신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음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얼마 안 남았어.’
이렇게 홀로 왕성을 활보하다 지칼의 세력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그 쪽지와 연고를 보낸 게 로제스가 아니라면? 애초부터 지칼의 함정이었다면?
혹시나, 인간도 못 되는 그녀의 아버지이기라도 하면? 그러면 어쩌려고?
“……죽기밖에 더하겠어.”
리즈벨의 입가에 피식 조소가 떠올랐다. 그래, 무서울 것이 뭐 있나. 그녀는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인간이었다.
리즈벨이 내딛는 걸음마다 금빛 빛무리가 휘돌다 공기 중에 녹아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어쩌면 정말로 함정이더라도 또다시 운 좋아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정체 모를 기운이 사라지지 않고 맴도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이미 한 번 그녀를 구명한 힘. 두 번은 없으랴.
“뭐가 됐든 끝을 보기로 했으니까…….”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리즈벨이 막 나나크 홀로 통하는 거대한 문을 눈에 담는 순간이었다.
콰앙-.
거대한 문 두 짝이 부서지듯 열렸다.
“……!”
열린 문 안쪽에서 살갗을 긁는 살기가 무자비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 문틈으로 밀색 금발이 흩날렸다.
리즈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날카롭게 곤두선 눈매. 단단한 무표정. 검은 훈련복. 바닥을 구르며 착지하는 날렵한 몸. 로제스였다.
허공에 비산한 핏방울이 돌바닥을 얼룩덜룩하게 물들였다. 로제스가 왼손으로 움켜쥔 오른팔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리즈벨의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다쳤다. 로제스가.
어딜 봐도 멀쩡한 꼴이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그가 방금 간발의 차로 빠져나온 홀 안쪽을 직시하는 얼굴에 전혀 표정의 변화랄 것이 없어, 리즈벨은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다친 거 맞…….’
그러나 그녀의 생각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로제스가 고개를 돌렸다.
엇비슷하게 닮은 두 쌍의 푸른 눈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
리즈벨을 눈에 담자마자 돌조각 같던 로제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네가 여기는 또 왜……!”
휘익.
활짝 열린 문 안쪽에서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쇄도했다.
티잉-.
시커먼 촉이 꽂힌 화살이 리즈벨의 지척에 있는 돌기둥을 맞히고 튕겨 나갔다.
“……!”
아슬아슬하게 뒤로 물러난 리즈벨은 로제스의 손아귀를 피하지 못했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기둥 뒤편으로 끌려간 그녀의 등이 기둥에 세게 부딪혔다.
“너 대체 왜 이래?”
제 몸으로 누이를 가리다시피 한 로제스가 험악하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어조는 금세 누그러졌다.
“제발, 누이야. 너 멍청하지 않은 것 내가 아는데. 너 요새 대체 왜…….”
로제스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가면은 진작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리즈벨은 로제스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보았다.
그의 숨소리가 무척이나 불안정했다. 그녀를 붙드느라 양손을 다 쓰는 바람에 오른팔의 찢어진 옷긴 속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환부가 입을 쩍 벌리고 검붉은 핏덩어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아니구나.”
“뭐?”
“오라버니가 쪽지 보낸 것, 아니지?”
로제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리즈벨은 속으로 탄식했다.
‘정말 보기 좋게 걸려들었구나.’
그녀의 감은 죽을 자리로 그녀를 안내한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툭, 툭. 로제스의 팔에서 배어 나온 검붉은 피가 리즈벨의 흰 옷자락을 물들였다. 리즈벨은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 올렸다.
“아직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리즈벨.”
“물어볼 게 남았는데, 멋대로 죽어 버리면 안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