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25
25화
다치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어떤 꼴이 났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찾아 붙잡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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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쪽지에 소름이 돋았던 이유는 정말로 마지막일까 봐서였다. 늘 제게 무관심하기만 하던 둘째 오라비를 보는 게 마지막일까 봐.
로제스가 숨을 몰아쉬며 쏘아붙였다.
“네가 내게 물을 게 뭐 있어. 우리 사이에 뭐가 있다고.”
“그러게. 우리 사이에 뭐가 있어서…….”
“그냥 평생 도망 다니면서 살지, 이 멍청한 것아. 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응?”
로제스가 피를 토하듯 속삭였다. 울분이 가득 차 꼭 그의 음성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너 여기서 죽으면 안 돼. 너 여기서 죽으면 내가 무슨 낯으로…….”
로제스는 이번에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리는 게 보였다. 리즈벨은 이제 그녀가 입을 열어야 할 때임을 알았다.
“걱정 마.”
“무슨 생각을…….”
“오라버니가 걱정하는 게 나라면 그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리즈벨의 손끝에서 금빛이 점점 더 빠르고 조급하게 깜빡였다. 그녀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리즈벨 자신조차 감당하기 힘든 힘이, 그것을 임시로 옥죄어 놓은 마법사의 마력까지도 누르고 제멋대로 춤을 추었다.
‘거의 다 왔단다.’
누군가 귓가에 속살거렸다.
‘거의 다 왔어. 이제 네 마음대로 모든 걸 쥐고-.’
그러나 그 목소리는 갑작스레 날아든 감탄사에 뚝 끊겼다.
“오.”
그들이 숨은 기둥 뒤편, 거대한 홀의 입구에서 지칼의 목소리가 울렸다.
“왔나 보구나. 네 사랑하는 누이가.”
로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칼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일그러졌던 얼굴이 즉각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불안정하게 떨리는 호흡까지는 미처 가다듬지 못한 모양이었다. 견고하나 싶던 낯이 일순 찡그려지는 것을 리즈벨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저벅. 저벅.
지칼이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로제스는 어떻게든 속을 가다듬으려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될 리가 없었다. 이미 출혈이 컸다.
리즈벨은 다급히 눈을 돌려 여우를 찾았다.
“티…….”
“리즈벨.”
그러나 로제스의 손에 입이 막혔다. 바로 앞에서 마주한 그의 눈은 얼핏 간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 그때 이곳에서 도망칠 때.”
로제스의 푸른 눈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제야 리즈벨은 로제스의 상태가 그저 팔을 베인 것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갈기갈기 찢겨 나간 검은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팔뚝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독?’
깨닫자마자 희게 질린 리즈벨의 얼굴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오라버니. 팔, 팔이……!”
“내 말 들어. 누이야, 제발.”
로제스의 목소리는 이제 애원하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때 어떻게 했어?”
로제스의 낯이 결국은 흐리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리즈벨은 더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푸른 눈이 로제스가 아닌 다른 이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둘째 오라비의 어깨너머, 지칼의 번뜩이는 눈과.
“찾았다.”
로제스의 등이 지칼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리즈벨의 손에서 금빛이 확 튀었다. 지칼을 등지고 있던 로제스의 몸이 금빛 기운에 휘릭 둘러싸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리즈벨을 붙들고 있던 로제스가 그녀를 기둥 저편으로 내팽개쳐졌다. 그 반동으로 로제스의 몸이 기둥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그를 노리고 있던 수십 개의 독화살이 일제히 활시위를 떠났다.
로제스가 그것들을 피한 것은 순전히 천운이었다. 한 칸 뒤의 기둥 뒤로 간신히 몸을 굴린 로제스가 고개를 쳐들었다.
“리즈…….”
로제스는 목울대를 치고 올라가는 핏물에 고개를 수그렸다. 시야가 아찔하게 돌고 숨이 턱 막혔다. 초점이 맞지 않는 바닥에 제 입가에서 흐른 피가 어지러운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도를 넘은 고통은 이미 감각에서 흐릿하게 멀어졌다.
그러나 그가 맞은 화살촉에 발린 것은 인간을 즉사시키는 맹독은 아니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는 이 순간에서만큼은 아직 죽어서는 안 됐다.
‘아직은 아니다.’
로제스는 이를 악물고 눈을 깜빡였다. 흔들리는 시야로 지칼과 지칼에게 목을 졸린 리즈벨이 보였다.
지칼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우애가 눈물겹게 깊은 건지. 올까 싶었는데 정말로 올 줄이야. 그것도 혼자서.”
“이거 놔. 윽…….”
지칼을 노려보는 리즈벨의 눈매가 빨갛게 물들었다. 흰자위에 실핏줄이 터지고 있었다.
금빛이 감도는 그녀의 손이 지칼의 손을 움켜쥐고 긁었다. 지칼의 살갗이 붉게 익어 가기 시작했다. 일전에 경험한 적 있는 화상이다.
지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었다.
“내가 너를 두 번 놓칠 것 같으니? 손 하나로 둘을 처리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지.”
리즈벨의 몸이 억센 손에 휙 끌려갔다.
지칼은 누이를 질질 끌고 기둥 하나를 건넜다. 그는 자세를 낮춘 채 숨을 몰아쉬는 로제스의 앞에 리즈벨을 팽개쳤다.
“아……!”
리즈벨의 팔이 뒤로 꺾였다. 지칼은 여전히 그녀의 한쪽 손목을 단단히 잡아 쥐고 있었다. 그는 그 상태로 리즈벨의 등 뒤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다정하게 누이를 다독였다.
“죽여.”
리즈벨의 오른손에 시퍼런 단도가 쥐어졌다. 소름 끼칠 만큼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의 귓전에 내려앉았다.
“네 손으로 죽여. 빌어먹게 아름다운 누이야. 먼저 죽고 싶지 않으면.”
리즈벨은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나 전사의 손아귀 힘을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금빛 빛이 위협적으로 튀었다. 그러나 지칼은 정말로 손 하나 정도는 기꺼이 희생할 모양이었다.
지칼이 리즈벨의 귀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속삭였다.
“죽이면 살려 줄게.”
악마의 속삭임이 이러할까.
“오라비를 죽이고 네가 사는 거지. 어떠니?”
리즈벨은 눈앞의 로제스를 보고, 제 손에 들린 단도를 흘끗 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금빛에 휩싸인 제 상체에 시선을 주었다.
“……아하하.”
그리고 허탈한 폭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그녀는 제 귓가에 머리를 들이민 형제를 지척에서 비웃었다.
“거짓말.”
푸른 시선 두 개가 주먹 하나만큼의 틈을 두고 맹렬하게 맞부딪쳤다.
“네가 나를 살려 줘? 내 생애…….”
파직. 금빛이 서로 마찰하며 위협적인 불꽃을 뿜었다. 리즈벨은 눈매를 휘며 똑같이 다정하고 달콤하게 답을 돌려주었다.
“그런 웃긴 농담은 또 처음 들어 본다, 오라버니.”
지칼이 따라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그래? 그렇다면 별 수 없구나.”
다음 순간 지칼이 취한 행동은 리즈벨의 사각 밖에 있었다. 그러나 로제스는 볼 수 있었다. 리즈벨의 어깨너머로 지칼이 거대한 검을 치켜드는 것을.
시퍼렇게 날 선 검날이 들이친 달빛에 휘황찬란하게 번뜩였다. 로제스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대로 둘 다 관통시켜 버릴 셈이다.
여전히 리즈벨은 지칼에게 단단히 포박당한 채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칼이 움켜쥔 리즈벨의 손목 부근에서 검날의 빛을 집어삼킬 만큼 눈부신 황금색 기운이 터졌다.
제아무리 지칼이라도 견디기 어려운 열기에 억센 손아귀의 힘이 순간적으로 느슨해졌다.
‘아.’
흔들리는 시야에서도 그 광경만큼은 어찌나 똑똑히 보이는지. 그 순간에 로제스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지칼의 손에 힘이 풀린 순간, 리즈벨의 몸이 거세게 앞으로 끌려갔다. 리즈벨이 로제스의 품 안에 들어오며 순식간에 남매의 자리가 뒤바뀌었다. 동시에 한 박자 늦은 지칼의 검이 무자비하게 아래로 내리꽂혔다.
리즈벨이 경악에 차 소리를 내질렀다.
“오라버니-!”
매서운 검날 앞에 노출된 것은 오라비 쪽의 등. 세게 떠밀려 기둥 벽에 부딪힌 것은 누이. 꿰뚫린 것은…….
“티, 스……!”
붉은 여우.
캬아악.
틈을 놓치지 않고 로제스와 지칼 사이로 뛰어든 사역마가 날카롭게 울었다. 칼날에 꿰뚫린 여우의 몸통 위로 검붉은 피가 치솟았다.
라타에의 마법사가 리즈벨에게 남기고 간 악마가 사납게 몸을 뒤틀자, 지칼의 칼날이 챙 하며 부러졌다.
“제기랄, 이건 또 뭐야!”
리즈벨은 어지러운 시야에서도 지칼이 욕설을 내뱉으며 한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신호다.
로제스를 향해 다시 한 번 수백 대의 화살이 겨누어졌다. 리즈벨은 사정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죽이는 건 자신이다. 그리고 죽는 건…….
다음 순간, 방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금색 빛이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