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30
30화
“죽이면 살려 줄게.”
“오라비를 죽이고 네가 사는 거지. 어떠니?”
자신을 회유하던 지칼의 목소리. 심장을 노리고 쇄도하던 피 묻은 날붙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제 어깨를 붙잡아 세게 끌어당긴 손. 서슬 퍼런 칼날에 꿰뚫리던 여우. 뒤돌아본 홀 안쪽에서 로제스를 향해 겨누어지던 수십 대의 검은 독화살.
“…….”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더라?
“여우야.”
“티스라고 불러 줘, 여자.”
소녀가 가슴을 쭉 펴고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티스라고 불러 주면 더 좋고.”
“나 지금 살아 있니?”
리즈벨은 티스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물었다.
“살아 있는 거, 맞지?”
“내 눈엔 죽은 것 같진 않아 보이는데?”
“…….”
“멀쩡히 숨도 잘 쉬고, 앞도 잘 보이는 것 같고. 이렇게 따듯하기까지 한걸.”
소녀의 작은 손이 리즈벨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루만진다기보다는 만지작거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기는 했으나, 온기가 전해져 오는 데는 충분했다.
‘안 죽었구나.’
리즈벨은 몸을 반쯤 덮고 있던 이불을 홱 밀어냈다. 티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로제스.’
그녀가 나나크 홀로 통하는 회랑에서 로제스를 마주쳤을 때, 그는 이미 독에 당한 상태였다.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환부는 이미 시커멓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그 밤에 리즈벨은 결국 물어보지 못했다.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지껄였는지. 왜 이제 와서, 왜 진짜 오라버니처럼 구는 건지.
무시하면 그만일 일이다. 로제스가 죽었다면 리즈벨은 축배를 들어야 마땅했다. 다른 모든 형제자매도 혈육이 죽어 나갈 때마다 안도의 축제를 벌였었다.
그런데 자꾸만, 자신이 모질게 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이 이상한 끌림은 대체 뭐란 말인가.
하얀 맨발이 바닥을 디뎠다.
리즈벨은 침대를 벗어나는 순간까지 망설였다. 로제스는 형제이기 전에 적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결국 그녀는 홀린 듯 떨어지는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어? 여자, 어디 가?”
티스가 부르는 소리는 무시했다. 마음이 점차 조급해졌다.
‘안 죽었겠지. 안 죽었을 거야.’
로제스가 어떤 인간인데.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다.
리즈벨은 차분하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본 티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어, 그 문 못 넘어갈 텐데. 주인이 아무도 못 들어오고 못 나가게 마법 걸어 놨을-.”
그러나 티스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리즈벨의 손이 문고리에 닿자마자 문에 걸려 있던 마법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린 탓이었다.
“우와아…… 역시 대단하네…….”
티스가 입을 쩍 벌리고 감탄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리즈벨은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눈앞을 가득 채운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헉, 왕녀님?!”
“뭐…….”
좁은 복도 양옆에 수십 명의 기사가 정렬해 있었다. 반은 발디마르의 기사복을 입은 왕실 기사단이었고, 나머지 반은 낯선 복장을 한 병사들이었다.
“왕녀님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이곳은 발디마르의 왕성입니다. 왕성 기사단이 모시는 것이 마땅…….”
“나르나크 공작 각하께서 라타에 황제 폐하의 존함으로 이 왕성에 비상령을 내리신 것을 모르십니까? 이틀 전 새벽을 기점으로 발디마르의 모든 군사적, 정치적 통솔권은 라타에 측으로 넘어갔습니다.”
“하나 왕국 기사단에는 왕족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왕족 보호? 의무?
리즈벨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혹시 이 자리에 자신 외에 다른 왕족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없었다.
리즈벨의 고운 얼굴에 금이 갔다.
그럼 이건 무슨 상황이야?
* * *
리즈벨은 그저 오라비의 생사 하나만 확인하면 그뿐인데, 그녀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왕녀님은 절대 못 보내 드립니다!”
“이것 참.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 앞에서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있는 건 발디마르의 기사단장과 라타에 사절단의 기사인 것 같았다.
리즈벨은 기가 막혀 발디마르 측의 기사단장을 노려보았다. 복장을 보아하니 로제스가 이끄는 리켈리테 기사단은 아니었다. 가슴에 매달린 황금 인장. 저것은 왕 루시페의 직속 기사단, 벨리크의 인장이다.
목청 높여 소리치던 벨리크의 단장이 별안간 리즈벨 앞에 무릎을 꿇었다.
“5왕녀님! 왕녀님께 선택을 맡기겠습니다!”
“뭘 맡긴다고?”
리즈벨은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라타에 측에 왕녀님을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다 아는 단어의 조합인데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래?’
벨리크의 수장인 저 남자는 왕자와 왕녀들이 죽어 나갈 때마다 직접 그 시신을 본성 꼭대기로 끌고 올라가던 자였다.
루시페의 눈과 귀, 오른팔의 역할을 했던 남자. 리즈벨이 고꾸라지기를 끈질기게 감시하던 인간이다.
“무사히 눈을 뜨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왕녀님의 안위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겼다면 죽음으로 치죄하려 하였습니다.”
빈말이라도 그녀에게 이렇게 아부할 리가 없는 작자였다. 바로 곁에서 그녀를 모신 시녀들조차 짐승 보듯 했는데, 발디마르의 긍지에 젖은 기사들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저희는 왕녀님의 편입니다. 염려 마시고 함께 가시지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 편…….”
그녀의 편이라니. 이건 지칼이 그녀를 살려 주겠다 회유한 것만큼이나 웃기지도 않은 발언이었다.
입에 발린 말을 아무리 내뱉어도 그 속에 숨긴 경멸을 모를 리 없다. 그 멸시를 받고 산 세월이 10년에 가까운데.
늘 그녀를 경멸하던 이의 입에서 나오는 친절함은 전혀 달콤하지도, 유혹적이지도 않았다. 이 성에 그녀의 편은 아무도 없다.
“아.”
그러다 불현듯 이 상황을 설명할 퍽 타당한 가설이 떠올랐다.
“아버지께서 직접 나를 처리하겠다 하시던?”
“예?”
단장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리즈벨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라타에의 사절단이 도착했으니 계승 전쟁은 휴전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제국에게 계승 전쟁에 대한 사안을 들키면 일이 골치 아파지니, 라타에가 손을 쓰기 전에 미리 자신을 빼돌리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순순히 따라가리라 생각한 건가.’
하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니 그럴 만도 했다. 왕성 사람들은 아직 그녀가 미친년인 줄 안다. 미친 왕녀 하나 끌고 가는 건 일도 아니라 여겼겠지.
“…….”
나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푸른 눈에 칼날보다 싸늘한 분기가 서렸다. 리즈벨은 며칠간 눌러 놓았던 광인의 가면을 다시 뒤집어썼다. 멀쩡히 말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미친 연기를 하는 쪽이 그녀에게는 더 쉬웠다.
치맛자락을 톡톡 두드려 편 리즈벨이 기사단장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개다, 개.”
“예?”
“아버지의 개.”
곧 부러질 것처럼 가냘픈 손이 기사단장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너는 큰 개. 저 애들은 새끼 개.”
이 개새끼들. 누굴 정말 미친년으로 알고, 그따위 되지도 않는 사탕발림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해?
그녀가 겁도 없이 단장의 턱밑을 간질이자, 사내의 안색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평생 당해본 일 없는 멸시일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무척 찾으시나 봐.”
“예, 아, 예에. 무척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왕녀님이 꼭 필요하다고, 전하라고 하셨는데…….”
입막음해야 하니 필요하겠지, 뭐. 리즈벨은 비뚜름하게 생각하다 이어진 말에 뻣뻣하게 굳었다.
“이 발디마르에 둘 남으신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십니까. 마땅히 저희를 따르심이 옳습니다.”
“둘?”
심장이 선득하게 내려앉았다.
“내일 저녁에 있을 환영식 준비도 하셔야 하고, 그러니 왕녀님, 어서 따르셔야…….”
리즈벨의 귀에는 더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차마 자신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하나가 누구인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죽은 것은 어느 쪽인가. 지칼인가, 로제스인가.
“…….”
감정이 격해지자 리즈벨의 손끝에서 다시금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리즈벨은 제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가시죠, 왕녀님.”
벨리크의 단장이 곁에 선 수하에게 턱짓했다. 커다란 보폭으로 다가온 사내가 리즈벨의 오른팔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라타에의 기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 입을 열기 직전, 리즈벨이 조용히 일갈했다.
“놔.”
어찌나 험악한지 붙들린 팔에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기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를 우악스럽게 당겼다.
“놓으라고 했어.”
“왕녀님, 이러시면 더 곤란해지십니다.”
“안 놓는구나.”
리즈벨이 비쭉 입꼬리를 올렸다. 손이 나간 것은 머리가 계산한 일은 아니었다.
짜악-.
매서운 소리와 함께 사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리즈벨의 손바닥도 벌겋게 부어올랐으나, 금색 빛이 스며들자 거짓말처럼 원 상태를 회복했다.
“누가 그러는데…….”
쥐 죽은 듯 고요해진 복도에 담담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말 안 듣는 개에게는 매가 약이라고 하더라.”
옅은 금빛 빛무리가 리즈벨의 몸을 휘감았다. 낫의 형상으로 모여든 금빛 기운이 휘둘러졌다. 허공으로 핏방울이 솟구쳤다.
리즈벨을 제압하고 있던 기사의 손등에 깊은 상흔이 새겨졌다. 그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윽……!”
리즈벨은 벌레를 털어 내듯 그의 손을 어깨에서 털어 냈다. 그녀의 앞을 막고 있던 벨리크의 기사들이 그제야 움찔했다.
“몰랐는데 나, 화가 나면 과격해지는 편인 것 같아.”
리즈벨은 자신이 나나크 홀에서 수십 명의 목숨을 갈취해 갔다는 걸 기억했다. 명백히 그녀의 의지로 한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지는 몰랐다.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그녀가 알아야 하는 건 딱 하나였다.
로제스가 멀쩡한가. 아니면 벌써 죽어 버렸는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는 입매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러니까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