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36
36화
지칼은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멍청하게 실실 웃는 막내 누이를 쏘아보았다. 무려 9년을 보아 온 얼굴은 그 긴 시간 내내 늘 멍청하고 속없었다.
“오라버니가 나를 살려 줘? 내 생애 그렇게 웃긴 말은 또 처음 들어 본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리를 울리는 것은 계승 전쟁의 마지막 밤, 그에게 날카롭게 꽂히던 목소리였다.
그리고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던 금빛 돌풍.
리즈벨의 몸에서 솟구친 정체 모를 힘은 거대한 낫이 되어 그의 팔뚝을 깊게 베었다. 뒤이은 돌풍으로 뒤틀려 부러지기까지 한 팔은 완전히 회복된 뒤에도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힘들 것이라 했다.
“하.”
감당키 힘든 분노가 치밀었다. 지칼은 누이의 어깨를 부서질 듯 움켜잡았다.
“그렇게 사람을 홀릴 것처럼 웃으면 이번에도 속아 넘어갈 것 같아?”
“오라버니 이상해.”
리즈벨이 고운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비틀었다.
“놔. 아파. 아버지께 이를 거야.”
“내 팔 한 짝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죗값은 치러야지. 안 그래?”
지칼의 옆에 있던 가렛트 공작가의 사병이 작게 그를 만류했다.
“왕자님, 아직 사절단이……!”
“닥쳐. 왕가의 일이기 이전에 형제끼리의 문제다. 제아무리 라타에라 해도 가족사에는 끼어들 수 없어.”
지칼이 사납게 일갈했다.
“환영식이 끝나면 다시 쥐새끼처럼 숨어들겠지. 어차피 라타에에 계승식을 들킨 와중에 내가 거리낄 게 있다고 생각했니?”
지칼의 그 말에 주위에서 작은 숙덕임이 일었다.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주위에 흩어져 이쪽을 주시하던 발디마르의 귀족들 몇이 움직였다.
리즈벨은 마른침을 삼키며 짧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와 지칼 주위로 둥그런 원이 생겼다. 나르나크 공작과 라타에 사절단의 눈을 가리려는 셈이 분명했다.
리즈벨은 자신을 둘러싼 귀족들의 눈에 어린 기대감을 보았다.
‘아.’
짧은 탄식이 터졌다.
그건 진실로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최후의 왕족을 가리는 마지막 관문을 향한 기대 어린 시선들.
‘저 미친 왕녀가 마침내 명을 다하겠구나.’
그것을 기대하는 얼굴들이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해도 오히려 열광할 인간들…….
지칼이 살심이 가득 담긴 눈을 빛내며 사악하게 속삭였다.
“없어져야 마땅한 왕국의 수치.”
그리고 주위가 동조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리즈벨은 정확히 제 목덜미의 동맥에 와 닿는 칼날의 섬뜩함을 느끼며 허탈하게 탄식했다.
대체 누가 광인이고 누가 제정신인가.
이 홀에 자리한 사람 중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간이 있기는 한가? 이 왕국이, 전사의 긍지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살인을 즐기고 혈전에 열렬히 환호하는 이 발디마르에서. 너희는 나를 광인이라 욕할 자격이 있나.
리즈벨의 몸에서 흘러나온 금빛 빛 무리가 발치에 모여들었다가 서서히 바닥을 타고 주변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 안에서 들끓는 풍랑만큼이나 거칠게 포효하는 기운이었다.
지칼의 단도가 그녀의 혈관을 막 끊어 내기 직전, 황금빛 한 자락이 휙 위로 솟구쳤다. 날카로운 단도를 휘감고 공중으로 튕겨 올라갔다.
“……!”
지칼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욕설을 씹어뱉는 그의 어깨너머로 리즈벨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잿빛 눈 한 쌍을 마주했다.
리즈벨은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자조적으로 입술을 말아 올렸다. 지칼에게 잡힌 손목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이런 자리에서 무슨 세상이 돌아선다고.’
이 세상에 온전한 그녀의 편은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로제스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조차 이 자리에 없다.
하지만 있었다고 해도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즈벨은 완벽히 혼자였다. 홀로 서는 것에 단련된 몸은 그럴수록 더 곧아졌다. 기죽은 티를 내지 않고. 두려움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활짝 웃는 얼굴로. 그러면. 그러면…….
“당신, 미친 게 아니군요.”
어쩌면, 끝이 끝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니까.
막 들고 일어나려던 황금빛 빛무리가 멈칫했다. 살의가 끓어 넘치는 홀 안에 크지도 않은 목소리가 위협적인 무게와 함께 내려앉았다.
“백 년 만에 태어난 헬라르의 성녀께서.”
사람을 미혹하는 설화 속 요물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면 꼭 저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우월한 외양의 남자가 부드럽게 일갈했다.
“어찌하여 이런 취급을 받고 계시는지.”
그 순간 마탑주의 입에서 떨어진 말을 단번에 이해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리즈벨 본인조차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와 그녀 사이는 열 걸음도 넘게 떨어져 있었다. 리즈벨은 정확히 제게 꽂혀 있는 회색 시선을 받아 내며 제게 던져진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백 년 만에 태어난, 뭐……?’
지칼이 날카롭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마탑주.”
“어려운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1왕자.”
작은 빈정거림과 함께 마법사의 걸음이 떨어졌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아시어스의 손이 리즈벨과 지칼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지칼의 손목을 잡고 감자 으스러뜨리듯 가볍게 뒤틀었다.
“윽……!”
“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라 했습니다. 뭐…… 딱히 이런 식으로 밝히려던 건 아니었는데.”
반듯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편이 훨씬 극적이긴 하군요.”
리즈벨은 지칼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손목에는 어느새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커다란 손이 있었다.
리즈벨은 눈을 깜빡였다.
“마법사, 너 지금 뭐…….”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시어스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리 없는 경악이 장내를 뒤덮었다.
라타에의 마탑주가, 대륙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마법사가 왕녀의 앞에 스스로 몸을 낮추었다. 그것은 완벽한 힘의 상하 관계를 드러내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숨 막히게 고요해진 공간에 홀로 담담한 목소리가 마침내 쐐기를 박았다.
“라타에 마탑의 주인 된 자, 헬라르의 성녀를 뵙습니다.”
곳곳에서 숨을 급히 들이쉬는 소리가 터졌다. 그러나 홀 내의 그 누구도 리즈벨만큼 경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게…… 지금…….”
리즈벨은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홀 안을 둘러보았다. 그녀와 그녀의 발치에 무릎 꿇은 마법사를 향한 수십 쌍의 눈동자들에 전부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몰이해였다.
나르나크 공작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그 신탁이…….”
리즈벨은 멍하니 발치에 무릎을 꿇은 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마탑주씩이나 되어서 저를 우러르게 되었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남자의 눈가에 흡족함이 떠올라 있었다.
에릴 테사가 했던 말이 귓전을 스쳤다.
“명분, 있으십니다. 힘도 갖고 계십니다.”
남자가 꼭 그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내가 뭐라고 했어요.”
“너…….”
“전부 당신 것이라고 했지.”
매혹적이라 그녀 스스로 인정까지 했던 남자가 리즈벨의 손을 제 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지분거리는 입술이 그리는 호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애정이 어린 손 키스에 살갗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 화끈거렸다. 꼭 그들 주위를 둘러싼 이들의 열기와 광분과, 충격처럼.
* * *
쾅.
아시어스의 등이 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쥐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홀 뒤편의 어두운 복도였다. 미처 저지할 새도 없이 그는 리즈벨의 손에 멱살 잡혔다.
“이런 농담, 재미없어.”
리즈벨의 목소리는 섬뜩하리만치 낮고 음산했다. 그러나 평정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눈동자는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를 어떻게 만들 셈이야?”
뿌리 깊은 불신이 어린 말이었다. 아시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비틀었다.
“농담 같습니까? 당신 힘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반짝. 금색 빛의 줄기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마법사의 푸른빛과 붉은빛이 기묘하게 얽힌 마력은 그 황금빛에 금세 잡아먹혔다.
“마탑주의 마력을 이렇게 쉽게 잡아 드시면서.”
그녀의 손끝, 팔, 몸 전체에서 금색 빛이 타래처럼 너울거렸다. 그 광경을 똑똑히 보면서도 리즈벨은 마법사의 말을 믿지 못했다.
“이게 성력이라고?”
“라타에에서 신관이 도착할 겁니다. 내 말은 안 믿어도 신관의 말은 믿겠죠. 신관이 힘을 조절하는 법을 알려 줄 겁니다. 내 힘으로 눌러 놓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라서요.”
바짝 붙은 왕녀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시어스는 제 멱살을 쥔 손 위에 손을 올렸다.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던 작은 손에 탁 힘이 풀렸다.
리즈벨의 몸이 비틀거렸다. 아시어스는 한 줌 허리를 휘감고 그녀의 몸을 지탱했다. 눈을 맞추고, 잔뜩 겁먹고 움츠린 소녀를 조곤조곤 달래었다.
“가장 강한 발디마르의 아이. 그 신탁이 가리키는 건 처음부터 당신 하나예요, 왕녀.”
“처음부터 나였다고?”
리즈벨의 눈에 순식간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마법사, 그럼 나는…….”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왜…….”
로제스는 왜? 지칼은 왜? 이미 죽은 일곱 명의 형제들은 왜, 왜 아버지의 필요에 맞는 단 한 명의 자식이 되기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발버둥 쳐야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