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37
37화
리즈벨은 차마 눈물을 떨어뜨리지도 못했다. 울음을 터뜨리기에는 아직 그녀에게 내려진 사실의 무게가 온전히 와 닿지 않았다.
성력이라고? 여신 헬라르의 힘? 100년 만에 태어난 성녀? 그럼 그 ‘목소리’가 여신이었단 말인가. 그녀의 몸을 멋대로 조종하려던 실체 없는 누군가가, 헬라르였다고?
리즈벨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너는…… 내 힘을 달가워하지 않았잖아.”
“여전히 달갑지 않습니다.”
아시어스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전부 빼앗았겠죠. 당신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필요하다면 팔다리를 하나씩 잡아 뜯어 놔서라도 내 곁에 뒀겠지. 그럴 수만 있었다면.”
“성력을 원했어?”
“네.”
“왜?”
“내 복수에 필요하니까.”
그래서 그렇게 말했구나. 오래, 간절하게 찾았기 때문에……. 그래서 가져야 한다고…….
리즈벨은 입술을 깨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넌 이상해.”
“압니다. 정상인은 아니죠.”
“우리 사이의 거래는 그날 끝났잖아. 넌 나를 살리러 온 사람도 아니면서, 날 쥐고 휘두를 생각밖에 안 하면서 왜 나를 도와줘?”
여전히 리즈벨의 손은 아시어스의 손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리즈벨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나는 대가 없는 호의는 믿지 않아.”
남자는 있는 힘껏 날을 세우는 그녀가 마냥 귀여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양 뺨을 감싸고 콧등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달콤한 쪽 소리와 함께 노곤한 음성이 이어졌다.
“아가씨가 무언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건 내가 베푼 호의가 아닙니다. 원래부터 당신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것이지.”
“너는 무시할 수 있었어.”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왜?”
“당신이 죽이고 싶을 만큼 예뻐서라고 해 둘까요. 가만히 두고 보자니 내 아가씨를 무섭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기도 했고.”
“…….”
“총체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것들 투성이라.”
리즈벨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여 버릴 것 같은 눈을 한 주제에 대체 왜, 끊임없이 그녀가 거부하지 못할 것들만 골라 내미나. 꼭 그녀의 환심이라도 사려는 것처럼.
어쩌면 이 남자는 그녀가 스스로 제 불구덩이 속으로 기어들어 오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모순덩어리.”
“그 모순덩어리에 조금이라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면, 곁을 좀 내줘요.”
종국에는 그녀를 삼켜 버리려고……. 남자가 살살 그녀를 얼렀다.
“라타에 사절단의 임무가 끝나면 돌아가 봐야 합니다. 애석하게도 황제의 이름에 묶여 있어서. 귀환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사절단의 임무를 끝내고 돌아갈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요. 그 정도도 바라면 안 됩니까?”
“……정말 그게 다야?”
역설적이게도 그 의구심 짙은 말을 뱉은 순간, 리즈벨은 자신이 그 불구덩이 속으로 스스로 한 발짝 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정말 그것만으로도 흡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요.”
하지만 다음에는?
리즈벨은 꼼짝없이 그의 품에 안겨 쏟아지는 다정한 손길을 받았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온몸의 근육이 그의 손안에서 부드럽게 이완했다. 파들파들 떠는 그녀의 등허리를 차분하게 쓸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간 고생했어요.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웅크려 지내느라.”
기어이 응어리진 설움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우으윽. 울음도 되지 못한 괴로운 신음에 가까웠다. 상대의 가슴팍을 더듬은 그녀의 손이 셔츠 자락을 간신히 움켜쥐었다. 계속해서 진흙을 덧발라 굳혔던 벽이 끄트머리부터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끔찍하도록 헌신적인 낯짝을 한 남자는 오래도록 그녀를 안아 주었다. 이 이상을 가면 정말 거부할 수가 없겠구나.
실로 달콤하면서도 무서운 깨달음이었다.
* * *
사실 리즈벨은 그날의 일을 완전히 믿지는 못했다.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너무 현실감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헬라르의 성녀.
발디마르 자체가 헬라르를 모시던 전사들이 건국한 왕국이었기 때문에 발디마르의 왕족들은 곧 헬라르의 사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헬라르의 성녀가 탄생했다는 것은 무게가 달랐다. 여신의 권능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인간은 그 대의 성녀, 딱 한 명뿐이었다. 성력을 다루는 유일한 인간. 그게 자신이라고?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마탑주가 무언가를 잘못 알았겠지.’
그 말을 진짜라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리즈벨 자신조차도.
“틀림없으십니다.”
그러나 이틀 뒤, 발디마르에 도착한 라타에의 대신관은 그녀의 의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야…….”
리즈벨은 제 손을 부여잡은 늙은 신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이제야 나타나 주셨군요. 기다렸습니다, 성녀님.”
“…….”
“헬라르께서 이 대륙을 버리지는 않으신 모양입니다.”
늙은 신관은 기어이 소맷자락에 눈물을 찍어 냈다.
“이미 각성을 시작하셨다기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마탑주께서 성녀님을 보호하셨다지요. 정말 헬라르께서 도우셨습니다.”
정말 여신이 도운 일인가. 리즈벨은 그날 밤 제 몸의 통제권을 전부 앗아 가던 목소리를 떠올리고는 인상을 구겼다.
“헬라르께서 따로 전하신 말씀은 없으십니까?”
“헬라르의 말씀?”
“예. 성녀님은 헬라르의 뜻을 직접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아닙니까.”
대신관은 그새 눈물을 닦아 내고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리즈벨은 그 말에 동조라도 하듯 제 주위를 살랑거리는 황금빛을 잠시 응시했다.
‘뜻을 직접 받는다, 라.’
“대신관.”
그때, 약간 불편한 기색이 어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내내 곁에서 그녀와 신관의 만남을 관망하고 있던 아시어스였다.
대신관이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랬지요, 참.”
“뭘…….”
“마탑주께 전해 들었습니다. 아직 권능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어 마탑주의 도움을 받으셨다고요. 그럼 아직 헬라르의 뜻을 받으시는 건 무리시겠군요.”
“도움?”
리즈벨은 아시어스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온 얼굴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시어스가 손을 뻗어 리즈벨의 머리칼 끝을 만지작거렸다.
“사제는 거짓을 말하지 않지요. 어때요, 이제는 좀 믿음이 갑니까?”
“마탑주!”
대신관이 기겁하여 그를 불렀다. 그가 금빛 머리칼 끝에 입을 맞춘 것을 목격한 탓이었다.
“너 이제 꽤 멋대로 구는구나.”
“보상을 주는 셈 쳐요. 거짓말 아니었잖아.”
그러나 정작 리즈벨도, 아시어스도 딱히 그의 반응을 개의치 않았다.
* * *
신탁의 아이. 헬라르의 성녀. 100년 만에 나타난 대륙을 구원할 성녀. 그 대단한 여자가 바로 가진 것 없던 하찮은 5왕녀더라. 그에 더해 사실은 그 왕녀, 미친 게 아니었다더라.
그 사실이 가져온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이게 다 뭐야?”
단언컨대 리즈벨이 살아온 과거의 15년과 회귀한 이후의 9년을 통틀어 가장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리즈벨은 작은 침실 안을 끝도 모르고 꽉꽉 채우는 수많은 선물 상자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귀족들이 진상한 물건들입니다.”
“진상…….”
리즈벨은 가장 가까이 있던 발치의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포장지를 부욱 찢자 자줏빛 공단으로 세공된 정교한 케이스가 튀어나왔다.
“아하하.”
리즈벨은 상자를 열어 보지 않고도 알았다. 발디마르의 귀족 중에 이 자줏빛을 쓰는 가문은 딱 하나밖에 없다.
가렛트 공작가. 왕비의 가문. 지칼이 손에 쥔 외척 세력. 그녀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소리 내 웃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손가락 사이사이로 은빛 목걸이 줄이 차르륵 늘어졌다. 세상이 그녀 쪽으로 돌아선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리즈벨은 엄지손가락 한마디만 한 보석을 손안에 움켜쥐었다. 가문의 가보를 바친다는 것은 충성의 맹세다.
기사가 주군에게 검을 바치듯, 귀족은 그들이 지지하는 왕족에게 그들의 가보를 바친다.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발디마르의 왕가와 귀족들에게 중요한 것은 리즈벨이 헬라르의 힘을 이은 성녀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멸시했던 5왕녀가 12년을 이어 온 계승 전쟁의 최종 승자라는 점이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왕족이며, 차기 왕좌의 주인으로 내정된 왕녀.
즉 다 죽어 가는 왕 루시페의 뒤를 이을 발디마르의 지배자라는 사실.
마탑주라는 강자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무섭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왕녀를 단숨에 차기 왕관의 주인으로 격상시켜 버리니…….
리즈벨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가렛트 공작가가 보내온 것은 가보뿐만이 아니었다. 상자에서 온갖 진귀한 장신구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시녀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주절거렸다.
“그것은…… 가렛트 공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발디마르 남쪽 광산에서만 발견된다는 태양의 광채가 아닌가요? 채굴하기가 워낙 까다로워 가치가 높은…….”
묻지도 않은 것들을 떠들어 대는 시녀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려 버리고, 리즈벨은 그 보석을 티스에게 보여 주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떠니? 값어치를 할 것 같아?”
“흐음.”
티스가 눈을 반짝이며 보석을 훑었다. 그러나 이내 흥미가 식은 듯 바람 빠지는 콧방귀와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예쁘긴 한데, 이런 건 우리 집에 널렸어. 평범한 수준이야, 여자.”
일국의 공작가의 가보를 두고 ‘평범한 수준’ 운운하는 소녀의 얼굴에는 심드렁한 기색이 가득했다.
“뭐, 성 한 채 값 나올까 말까 한 수준?”
“그 정도면 됐어.”
리즈벨은 가렛트 공작가의 목걸이를 아무렇게나 도로 상자에 집어넣었다. 이건 성 한 채 값.
그녀는 그 상자를 침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 다른 상자를 열어 티스에게 내밀었다.
“그럼 이건?”
“이건 더 형편없다. 너 보는 눈이 없네.”
그렇게 몇 개의 상자가 더 열리고, 던져지고를 반복했다. 대놓고 각 귀족 가문들이 내놓은 가보들의 현금 가치를 감정하고 있는데도 누구도 그녀를 경멸스럽게 보지 않았다.
생경한 기분이었다. 주위를 살피며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니. 타인이 뻔히 보는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해도 그녀를 해하려 드는 이가 없다.
자신에게 들이닥친 수백 개의 진상품보다 그 사실 하나가 더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