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38
38화
선물을 직접 들고 찾아오는 귀족들도 있었다.
“가문의 장인이 직접 짠 실크입니다.”
“…….”
“그럼 5왕녀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사…….”
베버론 남작가의 영식이 비굴하게 손을 싹싹 비볐다. 눈은 툭 튀어나오고 허리가 길어 꼭 사마귀처럼 보였다.
리즈벨은 도무지 침착한 표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크게 웃고 싶은 것 같기도 했고,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완벽한 반전이 아닌가. 지금 이 상황은. 늘 리즈벨을 벌레 보듯 한 것은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었는데, 이제 역겨운 눈을 하고 그들을 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내 눈앞에서 꺼져.
그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지만 리즈벨은 훌륭하게 참아 냈다. 대신 베버론 영식이 내민 실크 두루마리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부피가 큰 것에 비해 값어치는 떨어지는 상품이었다. 이런 건 짐만 된다.
그녀가 가차 없이 스카프를 밀어내자 남작 영식이 울상을 지었다.
“왕녀님, 그러지 마시고 다른 것도 한번 보시지요!”
볼 것도 없었다. 리즈벨에게 필요한 것은 정해져 있었다. 작고 가볍지만 값어치가 상당한 것.
보석이 달리 장신구들을 특히 눈여겨보았다. 개중에서도 알이 크고 무거운 데다 주렁주렁 늘어지는 것들은 제했다. 들고 도망치는 데 방해가 되니까.
그녀가 이 모든 웃기지도 않은 촌극을 묵인하는 목적은 아주 명확했다. 야반도주에 필요한 자금 마련이다.
향후 십 년은 돈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한 값어치의 물건 몇 가지를 골라낸 후, 리즈벨은 탑 아래로 끝없이 늘어선 귀족들의 행렬을 전부 해산시켰다.
“진상품들도 전부…….”
돌려보내, 라고 내뱉으려다 리즈벨은 말을 멈추었다. 저들 돌아가는 길에 고스란히 도로 들려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가져갈 수가 없을 뿐, 평민들은 쳐다도 볼 수 없을 만큼 귀한 것들이라는 점은 분명했으니까.
어차피 제게 진상된 것. 그러나 어차피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들이라면 그녀보다 더 이것들이 간절한 이들에게 보내는 편이 옳다.
리즈벨은 허리를 푹 꺾은 시녀에게 명령했다.
“감정사를 불러와. 지금 당장.”
그녀가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최초의 명령이었다.
* * *
불려온 감정사가 창고 두 칸을 가득 채운 선물들의 가치를 현금으로 매기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리즈벨은 망설임 없이 그에게 진상품들을 전부 넘겼다.
“발디마르에서 가장 신분 미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 빈민가. 매음굴. 노예들의 하수로.”
“예, 예?”
리즈벨은 한 번도 왕성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왕성을 오가는 귀족들의 대화를 주워들으며 발디마르가 천민들에게 그리 자비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전사의 긍지를 더럽히는 족속들에게는 그 누구보다 잔악하게 구는 것들이 발디마르의 왕족이고 귀족이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건 몸으로 겪은 그녀였다. 리즈벨은 건조하게 명령했다.
“반은 현금으로 바꿔서 노예들과 창부들에게 줘. 빚 갚아 목줄 풀 수 있게.”
“왕녀님…….”
“그리고 나머지는 네 능력껏 배분해서 뿌려. 지출 내역은 상세하게 뽑아서 내게 가져오고.”
가장 강하고 귀한 자들의 가보가 가장 미천한 이들에게 뿌려진 것을 안다면 당신들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
리즈벨은 못내 궁금했다. 그토록 괄시하던 왕녀의 발밑에 엎드리는 것만큼이나 치욕적일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리즈벨의 입가에 냉소적인 호선이 걸렸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티스가 앙증맞게 고개를 기울였다.
“넌 좀 이상하다, 여자.”
“뭐가?”
“넌 귀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나 봐. 인간은 대부분 권력을 좋아하던데.”
“글쎄. 권력욕이 아예 없는 인간은 드물겠지.”
리즈벨은 보들보들한 빨간 머리 꽁지를 쓰다듬었다.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속내가 쉽게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저런 같잖은 충성으로 만들어진 권력 따위는 필요 없어.”
귀족들이 제 앞에 줄줄이 무릎을 꿇고 가보를 바쳐 대는 꼴을 관람하는 건 꽤 통쾌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리즈벨은 그들의 아양이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달콤한 말로 포장해 봤자, 결국은 상황에 따라 쉽게 주군을 바꾸는 얄팍한 충성심에 불과했다.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모래성 같은 왕좌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게다가 그 이전에. 리즈벨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다.
“나는 이 나라가 싫어.”
“흐음.”
“단 한 번도 내 고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내가 내 아버지를 진정 아버지라 여긴 적 없듯이. 그러니 나는 이 나라의 무엇에도 미련이 없어.”
그 말을 하는 리즈벨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기이한 환희와 뒤섞인 진심이 흘러나왔다.
“발디마르를 휘두르는 권력. 좋지.”
“…….”
“나는 딱 한 번 그 권력을 휘두를 거야.”
그래서 나갈 거야. 이 왕성을.
“떠날 거야.”
이 타락한 왕국을.
그토록 꿈꿔 왔던 자유가 마침내 코앞이었다.
* * *
리즈벨의 계획은 여전히 유효했다. 계승식의 승자가 결정되면 이 나라를 떠난다.
승자가 자신이라는 점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도망친다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언제 떠나느냐, 그것 하나뿐이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떠나고 싶었다. 열 살로 회귀한 이래 내내 이날을 얼마나 바랐나. 마침내 살아남아서 당당히 이 왕성을 박차고 나가는 날을.
그날은 리즈벨이 마침내 모든 굴레와 억압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그녀 자신으로 새로이 태어나는 날일 것이다.
혹여 누가 소리를 들을까, 창문 밑에서, 문밖에서, 커튼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을까 울지도 못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지새웠던 수많은 밤과 새벽 내내 끊임없이 자유를 꿈꿨다. 그 바랜 소망 하나를 끊임없이 덧그렸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나갈 거야.’
어린 날에는 제 등 뒤에 날개가 돋아나는 꿈도 꿨다. 물론 그 꿈의 끝에서는 늘 금발에 푸른 눈의 형제들이 그 새하얀 날개를 찢어발겼지만. 끔찍한 추락감을 느끼며 잠에서 깨곤 했지만…….
그래도 리즈벨은 그 꿈이 악몽이라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오라버니.”
리즈벨은 침대 맡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 동이 황량한 방을 물들였다. 여름이라고는 밑을 수 없을 만큼 공기가 스산했다. 죽음의 향이 밴 탓일 것이다.
오늘 리즈벨은 로제스의 방에서 밤을 지새웠다.
“정상이 아니야.”
리즈벨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몸을 작게 웅크리고 먹먹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오라버니.”
다 떠나서 리즈벨은 왕의 재목이 아니었다.
왕좌는, 왕의 관은 로제스에게 더 잘 어울렸다. 자신만 없었다면 로제스가 왕좌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날카로운 가시덩굴이 되어 그녀를 할퀴었다. 우습게도 그 가시의 이름은 죄책감이었다.
자신이 로제스를 저렇게 만들었다. 가시넝쿨은 곧 쇠사슬이 되어 그녀의 온몸을 무겁게 휘감고 늘어졌다.
도망칠 길도, 도망친 이후의 삶도 분명 황홀할 것이다. 당장 한 발 움직이기만 하면 이곳과 영원히 작별할 수 있다. 그런데 도무지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리즈벨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고지가 코앞인데.”
기적처럼 올라온 정상인데.
밟고 있는 것이 로제스의 시체라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꿈속에서 자신의 날개를 꺾던 아홉 명의 형제 중에 로제스의 얼굴이 있었는가?
그가 쥐어짜 내듯 내뱉던 목소리가 귓전에 선명히 메아리쳤다.
“너 여기서 죽으면 안 돼.”
리즈벨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왜 안 돼?”
“너 여기서 죽으면 내가 무슨 낯으로…….”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리즈벨은 기어이 자신이 미쳐 버렸다고 생각했다.
“일어나.”
결국에는 애써 외면했던 마음이 튀어나왔다. 얼굴을 파묻은 무릎의 옷자락이 둥글게 젖어 들어갔다.
“일어나…….”
일어나서 딱 하나만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 너랑 아무 관련 없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인간도 못 되는 우리 아버지의 피뿐이다. 그때 널 구한 건 실수였다.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리즈벨은 잠긴 목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
이성이 말한다. 로제스는 끝내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섭리였다. 그러니 리즈벨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이대로 로제스의 숨이 기어이 육신을 떠날 때까지만이라도 곁을 지키는 것.
딱 그때까지만.
눈물방울이 아롱져 떨어졌다. 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아직도 오라버니가 죽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나 봐…….”
듣는 이 없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