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39
39화
* * *
한참을 로제스의 침실에서 보내고 그녀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창밖에는 그녀가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와 있었다.
“또 울었어요?”
창밖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마법사가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리즈벨은 무심코 제 뺨을 더듬었다.
“티가 나?”
“눈가가 붉어요.”
“어두운데 잘도 알아보네.”
마법사는 대답 대신 손짓했다.
리즈벨이 느리게 창가로 걸음을 옮기자 남자의 손이 리즈벨의 눈가를 훑고 지나갔다. 그의 손끝을 따라 찬 기운이 머무르다 서서히 사라졌다.
그 시원함이 나쁘지 않아서, 리즈벨은 눈을 내리깔고 그 손길을 받았다. 화끈거림과 쓰라림이 금세 가신다.
잠시 침묵하던 남자가 나직이 감탄했다.
“언제 봐도 예쁘네요.”
“그래, 너도 잘생겼어.”
리즈벨은 그 순수한 칭찬에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어떤 눈으로 저를 보고 있을지 알 것 같아 굳이 눈을 뜨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평소 같았다면 굳이 묻지 않았을 것을 입 밖에 냈다.
“어디 다녀왔어?”
리즈벨의 눈꼬리 끝을 가볍게 문지르던 아시어스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공작이 놔주질 않아서…….”
“그랬구나.”
“기다렸어요?”
그런가?
리즈벨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답은 퍽 명확했다.
“그건 아닌데.”
아시어스의 얼굴에 휙 실망감이 스쳤다. 그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럴 거면 그런 건 뭐 하러 묻습니까.”
찬 기운이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리즈벨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 서늘함을 다시 끌어왔다.
“실은, 곁을 내 달라기에 종일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줄 알았거든.”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기에 그녀는 제가 뭘 한 줄을 몰랐다. 황금빛 너울이 떨어지려는 아시어스의 손을 한 바퀴 휘감고 다시 끌어당겼다.
“그래서 의아했을 뿐이야.”
다시 눈가에 찬 손끝이 닿자 리즈벨의 입매가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
평온한 그녀와는 반대로, 아시어스는 어쩔 줄 모르는 기분에 휩싸였다. 줄곧 거부당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가, 이 여자가 한번 무른 모습을 보일라치면 가슴부터 요동쳤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머저리 같아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의 감은 눈매를 섬세하게 덧그렸다. 그림처럼 내리깔린 긴 속눈썹이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떠날 거라고 했다면서요?”
그 말에 고운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윽고 제 모습을 드러낸 푸른 눈동자에 책망하는 빛이 가득했다.
“엿들었어?”
“당신이 티스에게 입단속을 시키지 않았기에.”
창문에 팔을 얹은 채 손등에 턱을 괸 남자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어조는 뻔뻔하기까지 했다.
리즈벨은 어이가 없어 헛숨을 쉬었다. 그리고 창문 옆으로 손을 뻗었다.
차륵. 커튼이 쳐졌다.
“아, 이런.”
아시어스는 커튼으로 막힌 창문을 보며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너무하시네. 옆에 있어도 된다고 하실 때는 언제고.”
“그래서 창문은 안 닫았잖아.”
그녀의 말 대로기는 했다. 활짝 열린 채 커튼으로만 가려진 창문으로는 서로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잘 들렸다. 그러나 아시어스는 미련 남은 어조로 작게 항변했다.
“커튼을 쳤잖아요. 얼굴이 안 보이는데.”
“멋대로 남의 이야기를 캐물은 벌이야.”
돌아오는 답은 냉랭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리즈벨은 창가에서 멀어지지는 않았다.
‘침대로 들어가 버릴 줄 알았는데…….’
방 안에 들일 생각은 없어도 멀리 쫓아 버릴 셈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시어스는 그 사실에 만족하는 자신이 약간 한심스러워졌다.
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휘둘리면 안 되는데. 아시어스는 커튼으로 향하는 손을 주먹 쥐었다 폈다 하며 스스로를 세뇌하는 데 열중했다.
그에게는 오늘 이 늦은 시간까지 그녀를 기다린 이유가 있었다. 얼굴이나 보고 설레려고 온 게 아니다. 끊임없는 세뇌가 효과가 있었던지, 요동치던 감정이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고 머리가 차가워졌다.
커튼을 사이에 두고 단절된 바람에 리즈벨은 아시어스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잠시의 침묵 후, 손끝으로 빈 창틀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가 마련해 준 무대는 어떻던가요?”
리즈벨은 잠시 생각하다 느리게 대답했다.
“이상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는 거의 없었다. 꼭 낮에 그의 여우를 대했을 때처럼, 어느샌가 빙벽이 자취를 감추고 속내가 쉬이 흘러나왔다.
“이상하고, 점점 더 확신이 들어.”
“떠나야겠다는 확신?”
“응.”
“왜?”
경계가 흐려졌다는 걸 인식했음에도 말이 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싫으니까.”
“그게 다입니까? 이유가 너무 간단한데.”
“맞아. 하지만 나는 살면서 그 간단한 것 하나를 못 했어, 마법사. 싫으니까 안 하는 거. 싫으니까 떠나는 거. 싫으니까 벗어나는 거.”
“…….”
“그게 뭐라고. 뭐 그리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라고……. 그런데 나한테는 그게 허락이 안 되었어.”
어쩌면 어딘가에 풀어놓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사실은 이미 한계치에 다다라 있었던 건지도.
당장 성문을 박차고 뛰어나가지 않은 게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인내였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결심을 굳힐 수가 없는 단 하나의 이유가 남아 있어서……. 이상하게 자꾸만 둘째 오라버니가 마음에 걸린다고,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고. 리즈벨이 막 그렇게 속삭이려던 찰나였다.
“당신이 떠날 수 있을까?”
마법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귀에 꽂혔다.
목적어가 없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즉각적으로 생략된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이 내게서 떠날 수 있을까.
순식간에 리즈벨의 평온에 금이 갔다. 찬물 속에 머리를 거꾸로 처박은 듯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나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야?’
아시어스가 담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면 나를 못 떠나게 할 수 있을까…….”
‘실수했구나.’
리즈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남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아니, 그 티스베라는 이름의 여우에게도……. 뭘 바라고 입을 놀린 거야. 설마 당치도 않은 위로라도 바란 건가?
혼란에 휩싸인 리즈벨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남자의 음성이 커튼 사이로 부드럽게, 그러나 거침없이 짓쳐 들었다.
“아가씨. 나를 길들여 볼 생각 없어요?”
“뭐?”
섬뜩하리만큼 다정하고 빈틈없이 우아한 어조였다.
순간 그들의 시간이 첫 만남으로 되감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솜털이 쭈뼛 곤두서는 긴장감이 전신을 팽팽하게 내달렸다.
리즈벨은 지금 자신이 저 남자를 마주 보고 있지 않은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얼굴을 하는지 보이지 않으니 온 감각이 그의 목소리에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창문 밖의 남자가 콧노래에 얹어 말을 이었다.
“나를 길들이는 법은 간단해요, 왕녀.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고, 바라는 게 있으면 명령을 하고, 잘한 일에는 칭찬과 보상을 주는 거지.”
“그게 무슨.”
“어차피 평생 당신 뒤를 따라다닐 짐승이라면, 일찍 길들여 곁에 두는 게 낫지 않겠어요?”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다.
리즈벨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목소리를 내었다.
“그 짐승이 되레 나를 집어삼켜 버리면 어떡하라고?”
“그거야 당신 능력이지요.”
“기르던 짐승이 주인을 잡아먹는다. 그 이야기는 주인이 그만큼 약해 빠졌다는 얘기겠죠. 아니면 제대로 길들이지 못했거나. 하지만 당신은 나를 꽤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은데?”
궤변이었다. 장난기라곤 한 톨도 없는 궤변.
“나는 당신에게 아주 많은 걸 해 줄 수 있어.”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에 마력이라도 깃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오감을 사로잡아 현혹할 리가.
“예를 들면, 당신 오라비를 살려내는 것도.”
“뭐라고?”
리즈벨은 자신이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찰나의 일이었다.
“너……!”
리즈벨은 조금 전에 제 손으로 쳐 둔 커튼을 도로 홱 열어젖혔다.
배가 덜 부른 달 아래, 그녀 쪽을 등진 채로 창가에 기대선 남자가 느리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못 하는 거 아니었어?”
“불가능하다고 한 적 없는데.”
“너는 정말……!”
리즈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유연하게 풀어졌던 공기가 순식간에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푸른 눈과 회색빛 눈이 첨예하게 맞부딪쳤다.
리즈벨의 감정의 파동을 따라 황금빛 타래가 위협적으로 솟구치며 창틀이 서걱 베여 나갔다. 날카로운 파편 조각 하나가 남자의 왼쪽 뺨을 스치고 공기 중으로 튕겨 나갔다.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뺨에서 가는 피가 배어 나왔다. 빛과 어둠을 양분해 두른 그가 손을 들어 뺨을 닦았다. 저를 보며 속없이 웃던 표정은 간데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서느런 낯을 한 채로, 그가 말했다.
“당신에게 이런 선택지도 있다는 걸 알려 줄 뿐입니다. 선택은 당신 몫이죠.”
“……하.”
“선택의 대가는 당신이 더 잘 알겠지.”
대가는 명확했다.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원했다. 그녀의 힘을. 자유를. 그리고 아마도, 목숨까지도.
“너를…….”
리즈벨은 결국 허탈하게 자조하며 그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차분했던 속이 순식간에 도로 뒤엉켰다.
“너를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완전히 끝난 줄 알았는데 계속 주위를 맴돈다. 바라지도 않았는데 로제스의 목숨을 붙들어 주고, 그녀를 위한 가장 완벽한 무대를 마련해 주고, 필요할 때 품을 내주고.
그리고 그녀의 귀에 유혹적으로 속삭인다. 끌리지 않을 수 없는 선택지를. 마치 그녀의 속을 낱낱이 읽어 낸 것처럼.
대체 정체가 뭐야. 악마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의 탈을 쓰고 그녀를 뒤흔들러 온 죽음의 사신인가?
“……너는 그렇게 이 힘이 갖고 싶니?”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남자가 가라앉은 어조로 답했다.
“나는 당신을 원해요. 리즈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