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40
40화
리즈벨은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발음하는 그녀의 이름은 시럽을 몇 번이나 덧발라 놓은 것처럼 달콤했다. 목소리와 내용의 간극이 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만 자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시어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 얼굴이 언뜻 서러워 보인 건 달빛이 만들어 낸 착시였을 것이다.
차르륵. 커튼이 다시 쳐졌다. 무섭도록 정교하고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이 커튼에 가려졌다. 얇은 커튼 너머로 은은한 달빛이 비쳤다. 그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나흘 뒤에 라타에로 돌아갈 겁니다.”
“…….”
“그동안 생각해 봐요, 왕녀.”
그 말을 끝으로 푸른빛이 반짝였다. 커튼 너머로 어른어른 비치던 남자의 실루엣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리즈벨은 커튼을 움켜잡고 천천히 젖혔다. 창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말라 버린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가능하다고…….”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아렸다. 리즈벨은 손을 들어 목을 더듬었다. 그리고 벼락처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 * *
“미쳤어, 주인?”
티스베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녀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무슨 그런 말을 해? 시체를 살려낼 수 있다니?”
아시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일 역시 티스의 말에 동조하는지 그의 손목과 팔을 칭칭 휘감아 꽉 조였다.
“알고 있잖아. ‘저건’ 시체야, 주인.”
이미 죽을 때를 한참이나 넘긴 생명. 마법이 거둬지기만 하면 그대로 숨이 끊길 테니 이미 시체나 다름없다. 물론 왕녀에게는 그렇게 곧이곧대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티스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헬라르가 현신해도 저건 못 살려. 알잖아.”
“그래, 알아.”
“알면 가서 물러. 얼른.”
“생각 없어.”
“주인!”
“가치 있는 것을 얻으려면 나도 그만큼의 대가는 치러야지.”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아시어스는 태연자약한 표정을 유지하며 창틀에 올려놓은 유리병을 톡톡 두들겼다.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유리병 안에는 손가락 크기로 줄어든 이고르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부작용 없이 수명을 연장하는 법. 아시어스는 그 방법을 아주 잘 알았다. 당장 아시어스 자신의 숨을 이어 주고 있는 것도 그가 거느린 사역마 세 마리의 마력이었다. 티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빽 외쳤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왕녀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을 거야, 티스. 보기보다 잔인한 여자거든.”
딱히 신사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혈육을 목숨을 저울대에 올려놓다니. 저열하고 비겁한 협박에 가깝다. 리즈벨 발디마르는 아마 그를 끔찍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영혼만 얻으면 그만이야. 굳이 마음까지 받아 내야 할 필요는 없어.”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하는데 왜 이렇게 목구멍이 까끌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시어스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그 여자가 받아들일지는 모르는 일이지. 글쎄, 어느 쪽의 확률이 더 높을까.”
2왕자를 보고 서럽게 울었던 걸 보면 효과가 있을 것 같기도 하면서, 당장 내일이라도 떠날 것처럼 선을 긋는 모습은 재고의 여지도 없을 것처럼 냉랭했다.
사실 그가 보기에 리즈벨이 제 오라비를 택할 확률은 반절도 안 됐다. 하지만 그 작은 확률에도 온 힘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게 그라는 인간이라.
티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관찰했다.
“두렵지 않아? 대가는 네 영혼의 일부야.”
“이미 너절하다. 누구들 덕분에.”
귓바퀴와 귓불에 박힌 세 개의 검은 소환석들이 기묘하게 빛났다. 악마를 세 마리나 소환한 자의 영혼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건 애초에 어불성설이었다.
티스가 다시 한번 꾹꾹 힘주어 대들었다.
“여기서 그 시체를 살리면 주인 너, 더는 네 수명 못 늘려. 아니, 있는 것도 줄어들어. 몰라?”
“티스.”
길쭉한 손이 소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달빛에 남자의 웃음이 하얗게 부서졌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건 죽음이 아니야.”
“…….”
“내기에서 지는 거지.”
인간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말을 속으로 삼킬 줄도 모르는 사역마가 순진하게 되물었다.
“뭐가 달라?”
“많은 것이.”
“어떻게 다른데?”
“인간인 이상 죽음을 피할 수는 없어. 그러니 중요한 건 형태지. 어떻게 죽느냐.”
“…….”
“내기에 져서 그년의 손에 찢겨 죽느냐.”
고귀한 낯에서 흘러나온 상스러운 말에는 바랜 분노가 얼룩져 있었다.
“아니면 내기에서 이겨서 헬라르를 소멸시키고 수명이 다해 죽느냐.”
그가 바라는 제 죽음은 언제나 후자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의 밤을 지나 켜켜이 퇴적된 감정은 하나의 거대한 암벽을 이루었다. 고되게 기어오른 암반 끝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나. 시커멓게 일렁이며 그를 굽어보는 것은 죽음 외엔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시어스 뤼켄은 온 생을 죽음을 향해 걷는 남자였다. 자신이 바라는 죽음의 형태를 위해 억지로 생을 늘려 가며.
그래서 그는 그녀가 필요했다. 헬라르의 딸. 그와 헬라르 사이의 승패를 결정지을 여자. 헬라르의 목을 조를 무기가 되어 줄 여자.
마침내는 그의 손으로 숨을 거둬야 할…….
온 힘으로 생을 향해 걷는 여자.
“마음은 독일 뿐이지.”
아시어스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역시 사랑놀음 같은 건 할 생각 없다고.
* * *
라타에 사절단이 공식적으로 발디마르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열흘이었다. 그 열흘 중 이미 엿새가 지났으니, 리즈벨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남은 나흘뿐이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어, 리즈벨.”
그녀는 애써 마음에 시커멓게 파인 로제스라는 구멍을 외면했다. 새벽에 서쪽 탑을 찾던 발걸음도 끊어 버렸다.
로제스가 숨을 거두는 때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마법사는 그녀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녀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지지부진하게 굴면 결국은 아무것도 못 해, 멍청한 것아.”
나는 살 거야. 결국에는 곱지 못한 본능만이 남았다. 내가 살 거야. 로제스가 아니라, 내가.
하지만 원래 리즈벨은 그런 인간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못 할 게 없는 인간. 할 수만 있다면 살인도 불사할 비겁자.
리즈벨은 의식적으로 로제스로부터 생각을 차단해 버렸다. 그녀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도망칠 계획을 궁리하는 것이었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 두었다. 대륙의 북쪽 끝에 위치한 얼음 섬, 아스테르반. 겔오르 대륙의 최북단이라 겔오르의 눈이라고도 불리는 섬.
오로지 겨울만이 존재하여 헬라르의 축복마저 비껴갔다고 전해지는 그 척박하고 비밀스러운 얼음의 땅.
발디마르뿐 아니라 서부 라타에에서도 멀리 떨어진 아스테르반은 1,000여 년 전부터 대륙과 고립된 섬이었다.
리즈벨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선택지는 그곳뿐이었다.
아스테르반까지 가는 길에 마법의 힘은 일절 빌리지 않을 셈이었다.
대륙의 모든 마법사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마탑주가 저렇게 위험한 남자라는 걸 안 이상 마법은 안전하지 않았다.
못 믿을 것은 그녀의 힘, 헬라르의 성력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몸이 좋지 않으니 돌아가 보는 게 좋겠다.”
“와, 왕녀님?!”
리즈벨은 다음 날 그녀를 찾아온 라타에의 대신관의 면전에 대고 문을 쾅 닫았다.
조금 너무한 처사였나. 마음이 쓰이기는 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신관이라는 자가 그녀의 성력이 띠는 파장을 읽어 내거나 어딘가에 각인해 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니까.
하지만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일 테다. 그러니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최대한 빠르게. 라타에의 사절단이 돌아간 이후에 제국에서 다시 사람을 보내 그녀를 불러들이기 전에.
도주로는 이미 확보했다. 성 문지기를 매수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한 것과는 반대로, 문지기가 너무나 빠르게 그녀의 말에 복종한 덕이 컸다.
“사절단이 돌아가는 날 새벽, 달이 머리 위에 있을 때. 그때 검은 말을 탄 시녀를 성문 밖으로 내보내면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래. 기밀이니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기를 바라.”
혀가 잘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말을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왕녀님!”
리즈벨은 제 발밑에 납작 엎드려 명을 받는 문지기를 보며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였다.
‘이게 권력의 맛이구나.’
굳이 돈으로 입을 막아야 할 필요도, 갖은 협박으로 위협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명령하는 자가 이 왕국에서 가장 큰 힘을 거머쥔 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복종을 맹세했다.
아직 왕좌와 관을 받은 것도 아닌데 왕성 안의 모두가 그녀를 경외한다. 그렇다면 왕이 휘두르는 권력은 대체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걸까.
다른 이의 손안에 있을 때는 소름 끼칠 만큼 두려웠는데, 제 손에 있으니 권력만큼 달콤한 것이 없었다.
‘지칼 오라버니가 왜 그렇게 왕좌에 집착했는지 알 것 같네.’
지칼 발디마르는 열 명의 형제 중 유일하게 왕위에 욕심을 낸 왕자였다.
가장 강한 전사였으며 가장 든든한 외척 세력을 등에 업었으니 그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리라는 건 거의 정해진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는 당장 내일이 급한 게 아니라 왕좌가 급했다.
그 와중에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가렛트 공작가가 그녀에게 가보를 보내 충성의 뜻을 표시했으니, 그 속이 지금 얼마나 뒤집히고 있을까.
리즈벨은 가렛트 공작가에서 보내온 열두 번째 서신을 대충 훑어 내렸다. 정중하기 짝이 없는 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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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대화라니…….”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 년이라며 욕설과 성희롱을 일삼던 가렛트 공작가의 가주와 그 아들놈을 떠올리자 결국엔 웃음이 튀어나왔다.
“만나 주면 무슨 말을 하려고.”
발디마르 귀족계를 휘어잡고 있는 가장 긍지 높은 전사 가문의 장께서 무릎이라도 꿇으시려나.
‘붙잡고 제발 거둬 달라, 애원이라도 하려나?’
하여튼 이 나라는 썩을 대로 썩었다. 어제까지 지지하던 왕자는 나 몰라라 하고 순식간에 어제의 적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니.
신의 따위는 발디마르에서 예쁘장한 휴짓조각이나 다름없었다.
리즈벨은 비슷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숱한 고위 귀족 가문들의 서신을 우르르 테이블 밑으로 쏟아 버렸다. 그러자 가장 밑에 깔려 있던 서신이 드러났다.
황금 인장. 선명하게 찍힌 검 문양.
리즈벨은 천천히 그 인장에 손을 댔다. 왕의 인장이었다. 그녀가 한 해에 겨우 두어 번 받을까 말까 했던, 그러나 받을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에 떨어야 했던.
아버지, 루시페의 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