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성력이 짧게 점멸했다. 헬라르가 당황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무슨. 왜, 벌써…….]“라제!”
찰나를 놓치지 않은 아시어스의 고함과 함께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사자가 창틀 위로 돌진하듯 뛰어올랐다. 거대한 짐승이 허공에 수 놓인 여신의 형상을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들었다.
“……!”
그러나 막 검은 사자가 금빛 빛무리를 사납게 물어뜯으려는 순간, 여신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아시어스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성력의 창도, 금빛 장막도 모두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창밖으로 보이는 거라곤 수억 개의 별이 쏟아질 것 같이 매달린 밤하늘뿐이었다.
“이건…….”
아시어스는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리즈벨이 깨어났다. 과거에 갇혀 있다던 그녀의 의식이 돌아왔다.
* * *
리즈벨은 달렸다. 목적지가 분명하여 발은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로제스의 기억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죽은 눈.
로제스의 눈은 어느 순간부터 죽어 있었다. 그가 멀쩡히 숨 쉬고 돌아다니던 때에도 그 눈은 죽음이 예정된 자의 눈이었다. 그리고 진짜로 죽어 버렸다. 멋대로. 그녀에게 단 한 마디조차 없이. 멋대로!
‘그렇게 둘 줄 알고?’
제대로 눈을 보고 말 한마디 섞어 본 적도 없다. 로제스는 손 한 번 뻗어 그녀를 일으켜 준 적도 없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리즈벨은 로제스의 무엇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의 모든 행동, 생각, 결심. 그리고 죽음까지도.
“……나는 납득 못 해.”
속이 거꾸로 뒤집혔다.
리즈벨은 목을 치고 올라오는 울음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을 간신히 삼켜 냈다.
꿈속에서 그녀의 발목을 잡고 날개를 꺾던 형제의 얼굴 중에 로제스의 얼굴이 정말 있었는가?
없었다. 그 사실 하나가 리즈벨을 움직였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도, 탈출도, 여신의 성력도 아니었다.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은 하나였다. 그녀가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유일한 사람. 그 남자를 찾아야 한다.
리즈벨은 로제스의 서쪽 탑을 벗어나 라타에의 사절단이 머무는 왕성 남쪽으로 달렸다. 오래 내달릴 필요도 없었다. 긴 회랑 저 멀리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너.”
리즈벨은 헐떡이는 숨으로 그를 불렀다. 뒷모습을 보이던 남자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리즈벨은 회랑의 기둥을 짚고 가쁜 숨을 내쉬며 다시 그를 불렀다.
“라타에의 마법사.”
남자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가는 은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유리알로 막혀 있지만, 여전히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잿빛 눈이 정확히 그녀를 향했다.
“무슨, 일입니까?”
기이한 떨림이 감도는 목소리였다.
리즈벨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마법사는 어깨너머로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회색 눈이 슥 아래를 향했다. 너저분한 치맛자락을 보고 그 아래로 내려간다. 그가 걸어 둔 마법이 와해하여 다시 상처가 벌어지기 시작한 맨발을 본 남자의 미간에 실금 같은 균열이 갔다.
“당신은 도대체가-.”
“아시어스.”
리즈벨의 목소리가 그의 말허리를 뚝 잘랐다.
아시어스는 하려던 말도 잊고 멍하니 바로 뒤로 다가온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름을 불렀다. 왕녀가. 그의 이름을. 그는 진실로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내 이름은 어디서…….”
“아시어스.”
리즈벨이 다시 그를 불렀다. 그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이 그렇게 기꺼울 수가 없었다. 빌어먹게도. 아시어스는 입매를 비틀어 비소를 머금었다.
“에릴 테사가 알려 줬습니까? 내 이름.”
“그전부터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는데도 모르는 척했단 말인가.”
“이름을 불러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리즈벨이 그의 팔을 꽉 움켜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미약하나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다.
아시어스는 속절없이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마주한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를 볼 때면 늘 건조하게 변하던 푸른 눈에 비친 간절함을 읽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아직 갈무리되지 못한 성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시어스는 조용히 물었다.
“그럼 지금은 불러야 할 이유가 생겼다는 말이네요.”
“응.”
붉은 입술이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그가 날개를 찢어야 할 천사인지, 아니면 역으로 그를 찢어발기러 온 마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여자가 그를 압도했다.
“아시어스. 나를 가질 생각 없니?”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아시어스는 설마 이것이 꿈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나랑 한 번 더 거래하자.”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회색빛 눈이 커졌다. 리즈벨은 그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로제스 발디마르를 살려 내.”
“…….”
“그러면 나를 줄 테니.”
잠시 멍해 있던 잿빛 눈에 순식간에 어떤 감정이 깃들었다. 부싯돌이 탁 부딪치며 불씨가 튀어 오르듯이.
잿더미에서 피어난 작은 불씨는 순식간에 크기를 키웠다.
“그를 살리고, 나를 가져.”
리즈벨의 작은 목소리가 돌풍이 되어 불길을 화마로 뒤바꾸어 놓았다. 거침없이 다가온 남자의 두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푸른 눈과 잿빛 눈이 아주 가까이에서 맞부딪쳤다.
“그럼 사양 않고.”
투명한 유리알 너머, 남자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제국으로 모시고 가도 되겠습니까, 왕녀님?”
“네 뜻대로.”
“몸도 마음도 전부 제게 주셔야 할 텐데.”
“그것도 네 뜻대로.”
리즈벨이 답할수록 아시어스의 입가에 광기와 희열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들뜬 듯 지껄였다.
“꿈과 무의식까지도.”
“…….”
“하다못해 당신이 내뱉는 숨결 한 가닥까지도 전부 주셔야 한다면?”
리즈벨은 아슬아슬하게 웃었다. 언젠가는 그녀를 죽여 버릴지도 모를 위험한 남자.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이 이 남자를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지금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스치는 거리에서, 리즈벨은 불투명한 가면을 뒤집어쓴 채 속삭였다.
“모든 것은 네 뜻대로. 아시어스.”
하. 아시어스가 숨이 끊어지는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그는 헬라르에게 패하지 않았다. 성녀가 그를 선택했다.
아시어스의 손이 리즈벨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어 맞잡았다. 붉은 마력이 맞잡은 손을 휘감아 묶었다.
리즈벨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와 제 손목 안쪽에 동시에 시뻘건 상처가 새겨지는 것을 보았다. 갈고리 모양의 문양 수십 개가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혔다.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시어스가 속삭였다.
“거래의 위반은…….”
리즈벨은 손목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을 느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곧 죽음으로.”
붉은 피의 인장이 낙인처럼 찍혔다.
두 번째 거래의 성립이었다.
* * *
필시 리즈벨과 로제스 사이에 있는 것은 혈육 간의 깊은 정은 아닐 것이다.
로제스는 저를 진짜 누이라 여겼을지 몰라도 리즈벨은 아니었다. 아닌 채로 평생을 살았다. 그러니까 이제 와 그 석상 같은 표정 아래 숨긴 속내를 알았다고 한들, 갑작스레 남매간의 정이 생겨날 리도 만무했다.
그런데 그러면 지금 그녀를 움직이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가. 왜 어렵게 먹었던 마음을 손바닥 뒤집듯 바꿔 버리고, 평생의 소원을 등지고 스스로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가.
기기긱.
리즈벨의 손에 들린 검의 날 끝이 바닥에 긁히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왕의 검을 질질 끌며 텅 빈 회랑을 걸었다.
‘동정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 주제에 로제스를 동정할 깜냥이나 되던가. 그럼 대체 뭘까.
‘죄책감? 책임감?’
맞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리즈벨은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어떤 단어로 정의할 수가 없었다.
평생 자신을 죽일 적이라 생각했던 이가 실은 같은 피가 흐르는 친오라비였다니. 그녀는 그를 죽일 생각까지 했었는데 상대는 그게 아니었다니.
무엇이 되었든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자리에 없는 게 아닌 것들이 있다. 그저 있는 줄 몰랐을 뿐이다. 그 공기같이 투명하고 무해한, 사람을 살게 하는 애정이 그 자리에 있다는 걸.
‘그걸 몰라줘서…….’
그게 미안해서.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그냥, 그냥 미안해서. 우리를 이렇게 살도록 만든 건 서로가 아니라 아버지였고, 이 저주받은 왕성이었는데.
이런 곳에 그의 무덤조차 만들어주지 못하고 홀로 자유를 찾아 떠나버리면 후련해질까.
아닐 것 같았다. 그녀는 저 성벽을 넘어간다 해도 평생 로제스라는 이름의 죄악감에 목줄이 매여 살게 되리라. 어머니와 형제를 삼킨 이 왕성의 그림자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리즈벨은 끝내 모든 것을 등지지 못했다.
“미쳤어. 너는 후회할 거야.”
리즈벨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막 라타에의 마법사에게 두 번째 거래를 제시하고 다시 로제스의 서쪽 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황금빛 성력이 팔을 따라 손에 쥔 칼자루와 그 밑으로 뻗은 검신을 휘감았다. 루시페의 처소에서 들고 나왔던 왕의 검이었다. 은색이었던 검신이 온통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후회…….”
후회할 거야.
리즈벨은 그 말을 한 번 더 중얼거리려다 뚝 멈추었다.
정말로 후회하게 될까?
“…….”
로제스를 살리고 스스로 다시 새장 안에 갇히기로 한 그 선택이 정말 순간의 충동에 불과했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랬더라면 그녀가 왜 지금껏 경계해 온 남자의 손을 잡았겠는가.
리즈벨은 금빛 검을 내려다보았다. 빛을 잃고 낡은 유물로 전락했던 발디마르의 상징이 번쩍이는 광휘를 내뿜었다.
헬라르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전사에게 여신이 직접 하사했다는 검. 선택받은 자만이 쥘 수 있다는 이 성검의 용도는 명확했다.
단죄.
“네가 발디마르의 마지막 아이가 될 거야.”
뼈에 새겨진 오라비의 다짐이 그녀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너는 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고, 이 왕국의 주인이 될 것이다.”
로제스는 이미 4년 전에 그 결심을 했다. 아니,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그는 끝내 그녀를 계승식의 승자가 될 수 있도록 지켜 주었다. 리즈벨이 그의 희생에 답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는 살 거야.”
위협적으로 검신을 휘감은 성력이 대리석 바닥에 깊숙한 상처를 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