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51
51화
* * *
가장 강력한 왕권을 위해서는 공포가 필요하다. 무력에 대한 공포.
리즈벨은 루시페의 30년 섭정 중 대부분을 끔찍하다고 여겼으나 단 하나,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심을 훌륭하게 자극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점만은 인정했다.
퍼억-.
“커흑.”
본성 꼭대기 탑의 외벽으로 내리꽂힌 루시페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루시페와 그에게 붙은 지네 악마를 움직일 수 없도록 외벽에 박아 버린 리즈벨은 무너진 첨탑 끝자락을 딛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본성의 성벽 바로 아래, 새파랗게 질린 얼굴들이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본성 꼭대기로 향하기 전 리켈리테를 시켜 불러 모은 발디마르의 귀족들이었다. 드문드문 경악한 라타에 사절들의 얼굴도 보였다. 입 모양만으로도 그들의 경악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났다. 리즈벨은 허공으로 발을 내디뎠다.
금빛 성력이 그녀의 몸을 가볍게 받쳤다. 부드러운 낙하감과 함께, 리즈벨은 루시페가 매달린 외벽 앞에 다다랐다.
이것은 두 번째 무대였다. 이번에는 그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무대다.
현 왕 루시페를 완벽히 능가하는 무력. 타인에 의해서 인정받은 성녀라는 이름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하나만으로 온전히 조성하는 공포감. 리즈벨은 그것을 제대로 이용해 볼 셈이었다.
“쿨럭.”
루시페의 입가를 타고 피 섞인 침이 흘렀다. 리즈벨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말이 맞아요.”
그녀의 발이 허공을 걸었다. 딸과 아버지 사이의 거리가 반걸음으로 좁혀졌다. 더운 숨결과 시체의 악취, 피비린내, 찌든 땀 냄새가 후각을 찔러왔다.
리즈벨은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루시페의 턱을 손끝으로 치켜 올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내가 보고 자란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 그래서 죽은 어머니와 가여운 오라버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도 이런 것밖에는 없네.”
리즈벨은 손에 쥔 금빛 검의 방향을 조준했다. 검 끝이 정확히 목표물을 겨누었다. 위험을 감지했는지 거대한 지네가 꼬리를 퍼덕였다. 검은 마력이 바닥을 얽어매고 뒤틀 때마다. 반파된 탑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부연 먼지구름과 함께 파편이 튀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성력에 덜미를 잡혔다.
“가만히 있어.”
리즈벨은 검을 휘둘러 지네의 꼬리를 베었다.
“키에에에엑-!”
마에바가 날카롭게 울었다. 악마의 검은 피가 그녀의 볼에 튀었다. 천사의 외양과 어울리지 않는 얼룩이었다.
“단죄. 그리고 정화.”
“커헉.”
“그것이 헬라르의 권능이라지요, 아버지.”
루시페의 얼굴에 선명한 절망감이 떠올랐다. 그는 딸의 눈과 표정 그 어디에서도 자비를 발견하지 못했다.
리즈벨의 무대에 막이 오르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발디마르의 기득권층이 발아래에 전부 모인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냈다.
“얄팍한 충성심으로 잔꾀를 부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봐 둬야 할 거야.”
담담한 음성이 성력의 흐름을 타고 온 왕성으로 퍼져 나갔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던 이들의 고막에 그녀의 목소리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로제스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리즈벨의 가는 손이 묵직한 단죄의 검을 들어 올렸다. 차게 가라앉은 눈이 루시페와 검을 번갈아 보며 각을 재었다.
“그 눈들에 똑똑히 새겨 넣어야 할 거야.”
리즈벨은 마지막 말을 뇌까리며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오라비가 갖게 될 왕좌와 영화를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라는 공포의 굴레를 끊어 내기 위해서.
리즈벨은 그 순간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파르르 떨리던 입매가 이윽고 후련한 호선을 그렸다.
그래. 그녀의 선택은 옳았다.
그녀와 그녀의 오라비를 이 지옥 같은 구렁텅이에 처넣던 것들을 그녀의 손으로 부서뜨리고, 그들이 겪었던 것보다 더한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평생을 도망치며 누리게 될 자유보다 훨씬 값진 것이라고.
비록 그 대가가 새로운 지옥이라 해도…….
리즈벨은 조용히, 오직 루시페에게만 닿을 목소리로 고했다.
“안녕. 내 평생을 지배한 악마.”
그 말과 함께 날카로운 검이 루시페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다. 날붙이가 산 자의 뼈를 부수고 심장을 관통하는 감각이 검자루를 타고 생생히 전해졌다.
“컥…….”
“하.”
황금빛 검이 루시페와 마에바를 동시에 꿰뚫던 순간, 리즈벨은 그 어느 때보다 기쁘게 웃었다.
“아하하…….”
그녀가 이 왕성을 떠나야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희열이 끓어올랐다. 단 한 순간이라도 느껴 보고 싶었던 해방감이. 발디마르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자유의 공기가.
“아하, 하…….”
넘치도록 충분하게 그녀를 가득 채웠다.
리즈벨은 19년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진실로 소리 내 웃었다.
“느꼈어. 느껴 봤어.”
가느다란 손에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검이 포크처럼 쉽게 비틀렸다. 소름 끼치는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던 마에바가 퍽, 하고 터졌다.
검은 마력이 루시페의 몸과 성벽을 온통 뒤덮었다가…….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성력에 잡아먹혔다. 검을 쥔 리즈벨의 손에 힘이 풀렸다. 끝없는 창공을 부유하는 듯했다. 창백한 뺨에 한줄기 눈물이 젖은 자욱을 내며 미끄러졌다.
“이제 됐어…….”
어슴푸레한 새벽하늘 아래 가장 성스러운 기운이 타락한 왕국의 꼭대기를 물들였다. 악에 내려지는 심판의 칼날이었으며, 타락한 것들을 향한 정화의 불길이었다.
* * *
“괜찮아?”
아시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티스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몇 마디를 더 건넸으나 그는 그 말에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시체를 산 자로 되돌리는 일은 역시 인간 된 자로서 할 짓은 아니었다. 아시어스는 이미 알고 있던 그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나는 몰라 이제…….”
티스베가 마침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다시 붉은 털의 여우로 변한 악마가 아시어스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검은 마력이 그의 등 위에 펼쳐졌다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아시어스는 느릿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침대가를 세게 짚은 손등이 시퍼런 핏줄이 선 채 파르르 떨렸다. 수그린 시야에 보이는 바닥이 한 차례 아찔하게 일그러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옛적에 각오했던 일이라지만, 산 채로 수명이 깎이는 일이란 생각보다 더…….
“기분 참, 더럽네…….”
아시어스는 고개를 털어 남은 정신력을 그러모았다. 티스의 마력이 잠시 방황하나 싶더니 곧 혈관을 찾아 온몸의 근육과 세포로 흘러들었다.
“후.”
그는 짧은 호흡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그가 몇 십 년에 달하는 수명을 통째로 깎아 살려낸 숨이 바로 눈앞에서 호흡하고 있었다.
아시어스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 부근을 짚으며 수그렸던 허리를 도로 폈다. 이마에서는 찬 식은땀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섯 시간도 역시 무리였나.”
아시어스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침대에 등을 기대었다.
사실 그가 로제스 발디마르의 숨을 되돌려 놓는 데에는 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왕녀에게 다섯 시간이라는 시간을 건 것은 순전히 후폭풍 때문이었다.
시체를 되살리는 마법은 없다. 설령 헬라르가 지상에 현신한대도 이미 육체를 떠난 영혼을 돌려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였다. 이성과 지성의 영역을 넘어 초월적인 힘이라 일컬어지는 마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 그것이 가능하다면, 순전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했을 때만이.
아시어스는 힘겹게 그의 세 번째 악마를 불렀다.
“바일.”
회색빛 안개가 그의 손을 타고 빙빙 돌며 그의 몸을 휘감았다. 악마의 검은 마력이 다시금 아시어스의 심장과 뼈와 근육에 흡수되었다.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여전히 손끝 하나, 발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시어스는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이제야 조금 새벽녘에 접어들었는지 하늘이 약간 밝은 푸른빛으로 변해 있었다.
아시어스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건성으로 닦아 내며 생각했다. 억지로 늘리고 덧붙여 온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년이나 되려나.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그가 생을 과도하게 늘려 온 이유는 전부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였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순간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으므로.
그때였다. 창밖에서 번쩍하고 헬라르의 성력이 폭발했다.
[뭐지? 뭐야?]티스가 창가로 쪼르르 다가갔다.
활짝, 창문을 열자마자 성력이 폭풍처럼 방으로 들어찼다. 왕녀가 기어이 원을 이룬 모양이었다.
“끝났나 보네.”
씁쓸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앞으로 몇 시간. 정말 몇 시간 후면 그는 그가 100여 년이 넘도록 바라 왔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가 찾아 헤매던 것을, 헬라르의 성녀를 손에 넣고 나면……. 그러면…….
아시어스는 방 안쪽까지 밀려 들어온 반짝이는 금빛 성력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아주 독한 술을 몇 병이나 속에 털어 넣은 것처럼 의식이 제멋대로 뻗어 나갔다.
저렇게나 성력이 온 왕성을 가득 채울 정도로 폭발하는데도 그가 가장 혐오하는 여신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 말은, 이번에는 왕녀가 자신을 지배하려는 절대자의 존재를 허용치 않았다는 말이리라.
“정말로 이상한…….”
이상한 제물이었다.
‘분명 내기의 대가에 불과한 제물이었는데.’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자꾸만 손가락 사이를 허상처럼 빠져나가서. 그래서 자꾸 눈이 가는 것일 테다. 그냥, 흥미로워서.
[너는 내 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문득 떠오르는 그 말을 아시어스는 애써 마음 한편으로 치워 버렸다.
“힘에 부쳐서 그래.”
간신히 내뱉은 말은 변명에 불과했다.
아시어스는 계속해서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내었다. 이건 다 자신이 한계의 한계까지 몰려 있어 그런 것뿐이다. 회복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금방일 것이다.
“……바보.”
티스베는 눈을 감고 불규칙한 숨을 내뱉는 주인 곁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으니.”
서서히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밤이 끝나고 약속의 태양이 뜨기까지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새벽이었다.
* * *
차기 발디마르의 지배자가 더는 ‘차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발디마르의 귀족들 사이에 퍼지는 데는 일각이면 충분했다.
왕과 왕이 불러낸 악마의 시체가 왕성의 꼭대기 탑 외벽에 전시품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들의 심장을 꿰뚫은 황금빛 검이 새 왕의 탄생을 증명했다.
리즈벨은 루시페의 시신 아래 몸을 숙이고 앉아 있었다. 아직도 심장이 쿵쿵, 당장이라도 멎을 듯이 세차게 맥동했다.
“……정신 차려.”
리즈벨은 혼절하기 직전인 몸을 간신히 가누며 남은 기력을 박박 긁어모았다. 그녀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동이 틀 때까지는 이제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리켈리테를 동원해 이 새벽에 발디마르의 귀족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수고의 끝은 봐야 했다.
리즈벨은 제멋대로 폭주하려는 성력을 겨우 내리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페의 가슴께를 관통한 황금 검을 뽑아내자 피분수가 일었다.
털썩. 검에 꽂혀 있던 몸이 힘없이 미끄러져 돌바닥에 나뒹굴었다. 리즈벨은 시체를 등지고 성벽 위로 올라섰다.
“헉…….”
가장 선두에 서 있던 귀족이 그녀와 눈을 마주치곤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리즈벨은 지친 티를 미소 속에 숨겨 넣고 그들을 죽 훑어보았다. 몇몇은 얼굴을 이미 알았다. 그녀에게 비굴하게 매달리며 알현을 청하던 이들이었다.
“가렛트. 베카인. 로델로스. 알킨.”
무심한 목소리로 읊은 가문의 장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리즈벨은 그녀에게 그네들의 충성심의 표식과도 같은 가보를 턱턱 바쳐 댔던 귀족들의 성을 전부 읊었다.
“이엔. 제르엘. 카나이스…….”
손쉽게 가문의 자존심을 내놓을 세력이라면 왕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앞으로의 발디마르에 충성할 세력들을 골라내는 것은 로제스가 할 일이다. 그러니 리즈벨이 마지막으로 할 일은 왕권에 조금이라도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귀족 세력을 색출해 내는 것이었다.
“와, 왕녀님!”
리켈리테의 기사들이 이름이 불린 이들을 한 명씩 끌어냈다.
리즈벨은 외워 두었던 귀족들의 성들을 전부 읊은 뒤, 곁에 서 있던 리켈리테의 단장을 향해 고갯짓했다.
“지하 감옥에 가둬. 최종 처분은 너희 주인이 할 거야.”
“저희 주인께서…… 말씀입니까?”
“그래. 너희 주인이.”
“왕자님께서…… 하지만…….”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가 리즈벨을 바라보았다. 리즈벨은 대답 대신 성벽에서 내려섰다.
“왕녀님……?”
리켈리테의 단장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는 무시했다. 리즈벨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루시페의 시체가 매달린 탑의 외벽 아래를 걸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바닥에 굴러다니는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피 묻은 금빛 왕관이었다.
“로제스에게는 아무 말 하지 마.”
고요히 떨어진 목소리에 기사가 흠칫했다.
“모를 수야 없겠지만…….”
리즈벨은 잠시 말을 멈추고 왕관에 묻은 핏자국을 소매로 닦아 냈다.
“내가 전부 알았다는 말은 하지 마. 바보같이 죄책감 느끼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일 벌여 놓고 두려워 도망갔다 해.”
“어디로…… 가십니까?”
조심스럽게 관을 문지르던 손이 멈추었다. 기사가 다시 힘주어 물었다.
“떠나십니까? 왕녀님.”
약간의 절박함마저 어린 목소리였다. 왕관을 든 리즈벨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응.”
이윽고 떨어진 대답은 설움 한 점 없이 개운하기까지 했다. 기사는 스치듯 본 왕녀의 옆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감도는 것을 보았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야.”
“…….”
“그러니 입단속 잘 해.”
사박. 옷자락이 흔들렸다.
리즈벨은 기사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리즈벨은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곧 동이 틀 시간이다.
하늘은 이미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자잘한 상처로 뒤덮인 맨발이 부서지고 무너진 성의 파편 위를 디뎠다.
성 아래로 통하는 다리를 지나, 긴 회랑을 건너 바로 몇 시간 전 떠나왔던 서쪽 탑으로 돌아간다.
리즈벨의 양손에는 여전히 금빛으로 빛나는 검과 왕관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연신 하늘을 쳐다보며 걸음을 서둘렀다.
‘해가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었다. 이것만 끝나면 정말로 긴 새벽이 끝난다. 서쪽 탑에 만들어 둔 그녀의 성역은 여전히 굳건했다.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리즈벨은 잰걸음으로 서쪽 탑 안으로 들어섰다. 빠르게 계단을 올라 탑 중간층으로 들어서자마자, 리즈벨이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문이 활짝 열린 침실이 그녀를 맞았다.
“아…….”
리즈벨은 확연히 달라진 내부의 공기에 작은 탄성을 질렀다. 음울하게 내려앉아 있던 방에 은은한 훈기가 돌고 있었다.
리즈벨은 문 앞에서 감히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침대를 바라보았다. 침대의 캐노피는 걷혀 있었다. 로제스의 몸 위에 떠 있던 푸른 마법진은 간데없었다.
“…….”
다가가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녀의 성역에 산 자의 호흡이 불고 있었다.
리즈벨은 한동안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그들 남매의 거리는 언제나 딱 그 정도였다. 그 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 거리가 슬펐다.
“오라버니는 바보야.”
리즈벨은 작게 중얼거렸다.
“한 번도 진심으로 오라버니라고 불러 주지도 않은 누이가 뭐가 예쁘다고.”
그녀는 천천히 문 앞에 주저앉았다.
문에 머리를 기대고서 가만히 침대에 누운 로제스를 응시했다. 조금은 피로했고, 조금은 기뻤고, 또 조금은 슬펐다. 복합적인 감정이 큰 폭 없이 출렁이다 이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완벽한 평온. 이걸 얼마나 바랐나. 저도 모르는 새 앙다물고 있었던 입매가 편안하게 허물어졌다.
“좋은 왕이 될 거야.”
돌아오는 답도 없는데, 리즈벨은 마치 그와 대화라도 하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 나라는 다시 태어날 거야. 오라버니처럼. ……아, 물론 바꿔야 할 게 한두 가지는 아니겠지만. 오라버니는 잘하겠지.”
그리고 조금의 침묵.
“…….”
리즈벨은 잠시 말을 골랐다. 실은 로제스에게 꼭 닿았으면 하는 말이 있었다. 답지도 않게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무의식과 핏줄에 새겨진 정은 있을지 몰라도 남매간의 두터운 우애가 존재할 리는 없었다. 그런 게 쌓일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자신이 모든 걸 다 내던지게 했으니 로제스는 그녀에게 평생의 빚을 진 셈이다.
리즈벨은 그에게 명령할 권리가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입가에 얕은 호선이 걸렸다. 평소 짓는 것처럼 과할 정도로 환한 웃음은 아니었으나, 그것이야말로 리즈벨이 처음 지어 본 가장 진실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내일을 보고 살아.”
주어진 것이라곤 오늘뿐인 삶을 25년이나 살았으니, 앞으로 남은 삶은 내일을, 모레를. 빛으로 가득 찬 미래를 그리면서 살기를.
“……행복했으면 좋겠다.”
리즈벨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점점 밝아 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약속의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이었다.
리즈벨은 지금껏 양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문 앞에 내려놓았다. 황금 검과 금빛 왕관. 발디마르의 주인을 상징하는 상징물들이 침실 앞에 가지런히 놓였다.
리즈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게 서서 그녀의 생과 맞바꾸어 살아난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 줘서 고마워.”
작별 인사는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살면서 기회가 온다면, 그때 다시 보자. 오라버니.”
그때는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그때는 한 번이라도 서로 고생했다 이야기하며 안아 주자. 우리에게 다시 기회가 온다면.
* * *
서쪽 탑을 나온 뒤, 리즈벨은 곧장 성벽으로 올라갔다. 마법사와 몇 번이나 대면했던 장소였다.
본성만큼 왕성과 수도의 전경이 내려다보이지는 않았으나 도시 전체가 눈에 들어오기에는 충분했다.
리즈벨은 성벽 위를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늦지 않았다. 이제 막 태양이 지평선 위로 고개를 내밀려는 찰나였다.
“…….”
리즈벨은 가만히 멈춰 서서 후끈한 아침 공기를 맞았다. 푸른 눈이 왕성을 둘러싼 도시 너머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담았다. 그녀가 갈구했던 세상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미련이 남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 왕성 밖의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 또한 거짓이다.
‘그래도 괜찮아.’
그녀 손으로 내린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아니, 아마도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리라. 리즈벨은 눈부신 여명을 바라보며 후련하게 웃었다.
“그래도…….”
하지만 그럼에도 쉬이 눈을 뗄 수 없는 건. 저 세계를 갈망했던 유년이 가엾고 또 약간은 허망하기도 해서. 게다가…….
“역시…… 너무 예쁘다.”
리즈벨은 눈을 감았다. 눈을 찌르던 태양 빛이 눈꺼풀에 가려졌다. 그녀는 그대로 여명으로부터 뒤돌아섰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약속 지켰더라.”
손목에 새겨졌던 붉은 인장이 뜨거울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