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52
53화
“이제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죠.”
살짝 거칠어진 것 같은 목소리가 화답했다. 눈을 뜨자 꼭 며칠 전 밤처럼 열 걸음 끝에 떨어져 선 남자가 보였다.
악마처럼 매혹적인, 그녀의 남은 생을 지배할 남자. 리즈벨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는 그 시간조차 기다릴 수 없이 조급한 모양이었다.
큰 보폭으로 빠르게 가까워진 남자가 리즈벨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뒷목을 휘어잡고 다른 팔로는 허리를 감아 제게 바싹 밀착했다.
그의 두 팔이 올가미처럼 리즈벨을 조여 안았다. 격렬하게 들끓는 회색빛 눈과 담담한 푸른 눈이 지척에서 맞부딪쳤다.
아시어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것.”
“……그래. 네 것.”
리즈벨이 순순히 인정하자 그가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성마르게 종용했다.
“이름.”
“뭐?”
“이름 불러 봐요. 내 이름.”
“……아시어스.”
남자의 얼굴에 그제야 희미한 만족감이 어렸다. 마침내 종속을 위한 허락이 떨어졌다. 아시어스가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내가 이겼지. 내가 먼저 찾았고…….”
그에게서는 희미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리즈벨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파르르 떨리는 목울대. 난잡하게 풀린 셔츠의 목 단추. 그리고 옷깃에 묻어 있는 핏자국.
‘로제스의 피인가?’
그것에 조금 의아함을 가진 찰나, 긴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붙들고 들어 올렸다. 남자가 희열에 찬 음성으로 속삭였다.
“내가 먼저 가졌어.”
마른 입술이 그녀를 덮쳤다.
가벼이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무자비하게 빨렸다. 리즈벨이 입술을 열어 주자마자 더운 혀가 난폭하게 안쪽으로 침범했다. 습하고 질척한 것이 입 안을 휘젓는 감각에 아릿한 자극이 정수리부터 다리 사이를 일직선으로 관통했다.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이 너무 뜨거워 몸을 비틀 때마다 더욱 세게 끌어안겼다.
숨이 막혔다. 호흡이 달렸으나 남자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들이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거칠고 난잡한 입맞춤이었다.
“아…… 읏.”
내뱉는 신음조차 그에게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리즈벨은 단단한 두 팔에 갇힌 채 꼼짝없이 그에게 먹혔다. 제 거친 호흡 소리와 두 살덩이가 농밀하게 마찰하는 소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소리를 전부 집어삼켰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고 아랫배가 지글지글 끓었다.
맞닿은 입술과 뒤섞인 혀에서는 비릿한 혈향이 돌았다. 이것이 단순한 애정에서 기인한 접촉이 아니라는 것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뒤섞이는 타액을 삼킬 때마다 무언가가 끊임없이 그녀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반항하며 도망치는 성력의 덜미를 잡아 내리꽂고,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혈관처럼 뿌리를 내리는 마력. 종속의 마법. 영혼끼리의 결속.
철컥-.
그리고 마침내, 리즈벨은 제 안에 어떤 육중한 걸쇠가 걸리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호흡이 끊겼다. 그녀는 막힌 입술로 신음을 토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고 숨 막히는 족쇄였다.
종전까지 몸 안팎을 자유로이 휘돌던 금빛 성력이 순식간에 탁, 하고 꺼졌다. 아주 어둡고 음울한 마력이 그녀의 존재를 휘감고 무겁게 늘어졌다. 손목에 새겨졌던 붉은 인장이 거래의 성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입술이 떨어졌다.
리즈벨은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붉은 입술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잔뜩 젖어 번들거렸다.
“이젠.”
그녀를 삼킨 남자가 열에 들뜬 짐승처럼 그녀의 젖은 입술을 핥았다.
“이젠 도망 못 가.”
마침내 제 손안에 들어온 제물을 향해 남자가 이를 드러냈다. 목덜미를 휘감은 손가락이 목을 더듬어 혈관을 찾아 길게 훑어 내렸다.
“……모든 것은.”
리즈벨은 거친 입맞춤으로 터진 입술을 열었다. 후회와 미련이라곤 한 점 없는 후련한 목소리가 엉망으로 유린당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네 뜻대로. 아시어스.”
리즈벨은 지척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회색빛 눈동자가 언뜻 붉은빛으로 빛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너는, 나를 가진 이 순간에도 울 것 같은 얼굴인지.
그녀는 끝내 묻지 못하고 다시금 몰려오는 열기에 저를 놓았다. 그날 그들 사이의 두 번째 거래는 아주 훌륭하게 끝맺어졌다.
* * *
이상한 꿈을 꾸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꿈이었다. 로제스는 아주 어린 아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순간 자라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또 눈앞이 뒤바뀌면 스무 살 적의 자신이, 스물세 살 적의 자신이.
그리고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
“…….”
그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담아 놓은 꿈이었다.
로제스는 그것이 주마등인 줄로만 알았다. 죽음이 이만큼이나 목전에 있구나. 그는 무의식중에도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사실에 새삼스레 서러울 필요도, 미련을 둘 필요도 없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므로.
“……?”
그러나 로제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꿈이 막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던 참이었다.
계승식이 선포되고 난 직후의 사흘간, 지칼의 세력과 끊임없이 맞부딪치던 크고 작은 접전.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던 그 광경 어딘가에서, 로제스는 그곳에 있으면 안 되는 색채를 보았다.
밝은 금빛.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깜빡였으나 여전히 햇살을 닮은 금빛이 저 멀리서 어른거렸다.
발디마르의 왕족들은 전부 금발에 청안을 가졌다. 그러나 일찍이 죽은 쌍둥이 왕녀들을 제외하곤 완벽히 같은 색채를 가진 형제들은 거의 없었다. 다들 조금씩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의 채도가 달랐다.
지칼은 짙은 벌꿀빛 금발. 로제스는 그보다는 붉은 기가 덜 돌는 베이지에 가까운 금발. 아이작은 순금색에 가까운 금발.
아이작보다 더 일찍 죽은 형제와 누이들의 색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였다. 저 레몬 속살처럼 눈이 시리게 밝은 금빛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로제스는 멍청한 기분이 되어 누이를 불렀다.
“리즈벨?”
챙- 채앵-.
그가 딛고 선 곳은 접전지의 중앙이었다.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어차피 꿈 아닌가. 칼자루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탁 풀렸다.
“네가 왜 여기…….”
로제스는 적에게 등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도 잊고 누이를 향해 한 걸음 옮겼다.
이것, 과거를 되짚는 꿈이 아니었던가?
그 순간, 눈앞의 광경이 또다시 뒤바뀌었다. 이번에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온통 새카만 공간이었다. 과거를 벗어난 것이다.
“리즈벨.”
로제스는 갈라진 목을 열었다.
“누이야.”
‘-만…….’
어디선가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제스는 뒤를 돌았고, 그제야 어둠을 밝히는 금빛을 발견했다.
리즈벨은 어딘가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었다. 가는 어깨가 떨리는 게 보였다.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말이 튀어 나갔다.
“너 왜 울어.”
사실 리즈벨은 울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가 제대로 울 줄도 모르는 아이라는 걸 로제스는 알고 있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웃는 것밖에 없는 아이였다. 그가 그렇게 당부했으니까.
“왜…….”
그가 망연히 바라보는 사이, 희미한 미소를 내건 리즈벨이 가느다랗게 속삭였다.
‘이제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그들 사이의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로제스가 먼발치로 떨어져 리즈벨을 지켜보던 딱 그만큼의 거리였다.
‘오늘부터는 내일을 보고 살아.’
그 말에 잠시 아연했다.
로제스는 결국에 걸음을 떼었다.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던 남매 사이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걸음은 금세 달음박질이 되었다.
“무슨 일 있었어?”
서둘러 아이 앞에 앉아 재촉하는데도 리즈벨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로제스는 조급한 마음에 어깨라도 붙들어 보려, 눈물이라도 어떻게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
“왜 울어. 왜…….”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리즈벨에게 닿지 못했다.
‘살면서 기회가 온다면, 그때 다시 보자. 오라버니.’
그 말을 끝으로 암경이 부서져 내렸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천장의 나뭇결이었다. 로제스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밝은 금빛.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찬연하게 빛이 나는 머리카락. 눈을 깜빡이기라도 하면 그 예쁘고 소중한 색채가 더 빠르게 산화하기라도 할까 봐.
“와…… 왕자님……!”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감지 않은 눈에 흐릿한 무언가가 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천장을 노려보고 있어도 그 밝은 금빛은 서서히 흩어져 갔다.
그가 주워들었던 누이의 색색 화관이 끝내는 말라 부스러졌듯이.
로제스는 누이가 제 곁을 떠났음을 알았다.
시야를 흐리게 가리던 무언가가 관자놀이로 툭 떨어져 내리기 직전에, 그는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왕자님…….”
그건 정말로 너였구나.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러 주지도 못하고, 고생했다 한 번 안아 주지도 못한 그의 동생은 떠났다.
떠났다…….
“이젠 당신께서 이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리켈리테의 단장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형용하기 어려운, 로제스가 평생 무표정 밑으로 눌러야만 했던 감정들이 수면 위로 범람했다.
툭. 눈물이 베갯잇으로 떨어졌다.
침실 앞에 놓인 검과 왕관이 복도의 창가로 들이치는 아침 햇살에 정갈하게 빛났다. 핏자국이라곤 하나 없이 성스럽기까지 한 상징물들이 고요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장 15년 동안 지속되던 발디마르의 계승식은 막을 내렸다.
대륙 역사에 가장 괴이한 왕위 쟁탈전으로 남을 그 계승식의 승자는 로제스 발디마르. 천출의 2왕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