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55
56화
“……그래서 나더러 우리 아버지랑 같은 짓을 하라고?”
“제대로만 소환한다면, 그리고 잘만 다룬다면 사역마는 주인에게 복종해. 하나쯤 부려 보고 싶지 않아?”
“난 검은 마력을 다룰 줄 몰라.”
“내가 도와줄게. 나 악마들 이름 많이 알아. 하나 알려 줄까?”
리즈벨은 약하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티스의 순진무구한 유혹에 넘어가기엔 리즈벨은 이미 보고 겪은 것이 너무 많았다.
루시페가 이고르와 마에바를 소환하고 어떤 꼴이 났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영혼이 갈래갈래 찢겨 이성도, 이지도 잃고 죽었지.
죽어도 그 꼴로는 싫다.
“지상에 존재하는 악마는 전부 마탑주의 허락하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렇지.”
“그런데 내가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해. 네 주인?”
악마의 힘을 손에 넣는다 한들 쥐고 휘두르기도 전에 빼앗길 것이다.
초월자라고까지 불리며 경외받는 대마법사인데 그 꼴을 좌시할 리가.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설마 그 남자가 시킨 건가. 아예 그녀의 의식까지 전부 집어삼켜 버리려고?
경계의 벽이 높이 쌓이는 건 금방이었다.
리즈벨이 티스의 손을 놓자, 티스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하지만 너도 힘이 필요하잖아. 넌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소녀가 고갯짓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저것들을 어떻게 상대할 거야?”
저것들? 리즈벨은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는 여전히 북적북적했다. 그런데…….
“……!”
날카로운 위화감이 살갗을 찔렀다. 리즈벨은 전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과거의 15년, 회귀 후 9년, 도합 24년을 살았다.
그녀의 본능은 위험을 감지하는 데 탁월하게 갈고 닦여 있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에엘의 거리가 한순간 발디마르의 긴 회랑과 겹쳐 보이는 듯했다.
리즈벨은 예리하게 거리 곳곳에 숨은 그림자들을 짚어 냈다.
하나, 둘, 셋, 넷……. 당장 감각에 잡히는 것만 해도 다섯 손가락을 넘어간다.
자박.
뒤에서 누군가가 뒤를 밟는 기척이 느껴졌다. 앞에도. 뒤에도. 그리고 옆에도. 포위되었나?
에엘의 거리를 산책하는 것은 오늘이 세 번째였다. 그러나 이런 일은 처음이다.
“성녀님.”
리즈벨은 귀를 스치는 남자의 목소리에 몸을 긴장시켰다. 시선으로만 흘끗 돌아보니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은빛 기사복, 가슴팍에 덧대어진 주홍빛 천. 황실 기사단장이라던 에릴 테사가 저런 복장을 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이자도 라타에 황실 소속이리라.
기사가 정중하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이단자들이 몸을 숨기고 잠복해있는 곳이라서요.”
“이단자들?”
“차차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기사는 그녀에게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가 뒤편에 정렬한 수하들을 향해 턱짓했다.
“모셔라.”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은빛 갑주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그녀를 에워쌌다.
“손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모시라는 폐하의 명입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곁에 서 있던 티스가 짓궂은 어투로 리즈벨에게 물었다.
“리즈,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은 아닌데…….”
리즈벨은 잠깐 확률을 따져 보았다. 지금도 멀찍이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무리가 있다.
눈앞의 기사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호의에 가까웠으나, 저들이 풍기는 기운은 분명 살기였다.
일단 지금은 기사들을 따라가는 게 좋으려나. 목숨이 간당간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티스는 리즈벨이 결정을 내리는 그 짧은 몇 초도 기다리지 않았다.
소녀는 제 주인을 닮아 머리보다 행동이 우선이었다.
“토끼몰이.”
씩씩하게 소매를 걷어붙인 티스가 앞으로 나섰다. 티스의 발밑으로 검은 마력이 그물처럼 쫙 펼쳐졌다. 순식간에 기사들의 발목이 검은 마력에 붙들렸다.
“사냥!”
기사가 낭패라는 듯 재빨리 뒤로 몸을 물림과 동시에, 붉은 소악마가 즐겁게 소리쳤다.
“리즈벨, 다녀올게!”
“티-.”
리즈벨의 부름은 허망하게 공중으로 흩어졌다.
“스…….”
저 기사들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아직 거리 구석구석에 그녀를 주시하는 시선들이 선명했다.
기사들이 사라지자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그녀를 훑어본다. 문득 라타에로 처음 오던 날, 그녀의 마법사가 했던 말이 귓전을 스쳤다.
“탑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라타에에는 얼굴을 가린 승냥이들이 많아서.”
그 말을 그저 그녀를 속박해 두려는 반협박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리즈벨은 등과 목덜미를 긁는 살기를 느끼며 약간 후회했다. 그 말을 들을 걸 그랬다.
리즈벨이 한 걸음 옮기자 수십 명이 똑같이 한 발을 떼었다.
“…….”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리즈벨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발디마르에서처럼 성력이 새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마법사가 그녀를 종속시킨 이후, 리즈벨이 성력을 끌어다 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여신의 목소리가 그녀의 의식 속에 끼어드는 일도 없었다. 후자는 반길 일이지만 전자는 기껍지 않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리즈벨은 일부러 사람이 쏟아져 나오는 복잡한 골목으로 방향을 꺾었다.
“아가씨, 사과 안 들여가실라우?”
사과를 궤짝으로 쌓아 놓고 파는 상점 주인이 그녀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리즈벨은 고개를 저으며 좁은 골목의 인파 사이로 끼어들었다. 누군가 그녀를 마킹 하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바로 등 뒤에서…….
팔을 잡아챈다.
턱.
“아가씨, 길 좀 묻겠습니다.”
가느다란 몸이 휘청, 하며 돌려 세워졌다. 그 바람에 티스가 후드 속으로 넣어 주었던 머리 타래가 사르륵 흘러내렸다. 언제 어디서든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눈부신 금발이었다.
“역시, 성녀……!”
그녀를 붙잡은 이가 까득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그녀를 움켜쥔 팔에 시뻘건 마법진이 떨어졌다. 동시에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품으로 끌어들였다.
“……!”
리즈벨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기척이 없었는데!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기 위해 벌린 입을 누군가의 커다란 손바닥이 틀어막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리즈벨은 움직일 수 없게 몸이 붙잡히고 입을 막힌 순간,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와 영혼이 연결된 남자의 기운은 근 한 달간 리즈벨의 온몸에 마치 각인처럼 새겨졌으니까.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통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파묻힌 품에서 일정한 심장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리즈벨은 가까스로 소리를 냈다.
“아시…….”
그 순간, 등 뒤에서 마력의 파장이 거세게 진동했다. 비정상적인 수마가 몰려들었다.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아, 마법이구나. 하지만 왜 지금?
의문도 잠시였다. 리즈벨의 시야와 사고가 완전한 암흑으로 내려앉았다.
* * *
리즈벨이 잠든 시간은 수 분에 불과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인적이 드문 골목 어귀의 벽에 머리를 기대고 웅크려 있었다.
“이단자들의 활동 개시라. 어느 종파야? 겨울?”
“겨울은 아닌 것 같던데. 겨울에 비하면 애송이들이야.”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리즈벨이 깨어났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그 은색 깡통 같은 아저씨들은 이단자가 아닌 것 같던데?”
“황제의 깡통들이겠지. 독대하고 온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대놓고 거리에서 납치해 가려 하다니.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건지…….”
“죽일까?”
“죽이면 골치 아프다. 적당히 입 막아서 황성으로 돌려보내.”
아시어스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수도의 땅을 거미줄처럼 뒤덮었던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방해꾼들이 많다. 그 자신조차 모처럼의 산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뒤만 따르던 중이었는데.
황실 기사들까지는 어찌어찌 참았지만, 이단자 중 하나가 리즈벨에게 손을 대는 순간에는 기어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녀에게 손을 댄 자는 당분간 그 팔을 쓰지 못할 것이다.
“나도 함부로 못 하는 여자를 어디서. 누가 감히.”
리즈벨은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느끼면서도 일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에 끌어당겼던 품에 안도했던 것도 잠시, 번뜩 현실감이 돌아온 탓이었다. 자신은 그의 ‘무기’였다.
티스가 늘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저 남자의 소중한 무기라고. 때가 되면 취하고 가차 없이 버려질, 언제 죽임당할지 모르는 소모품. 그러니 구해 줬겠지.
리즈벨이 막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그리고 티스, 리즈벨에게 괜한 말 하지 마. 악마의 이름이라니. 제정신이냐?”
남자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풀풀 흘렀다. 티스가 어리둥절해서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리즈벨이 악마를 소환하면 둘 다 좋은 거 아니야? 리즈벨은 새로운 힘을 얻고, 그 대가로 영혼이 조각날 테니 주인도 그 여잘 지배하기가 한결 쉬워질 테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데. 영혼을 조각낸다는 게……. 그런 거 권하지 마.”
이번에는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오기엔 적절하지 않은 말이다.
리즈벨은 티스에게 가볍게 꿀밤을 때리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시어스가 시킨 게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