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56
57화
“하지만 주인, 리즈벨이 필요한 거 아니었어? 지금도 사실 완벽히 지배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잖아.”
“번복은 없어. 분명히 경고했다, 티스베.”
아시어스의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짙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티스가 입을 내밀었다.
“이상해, 주인. 이랬다저랬다.”
“잔말 말고 넌 일단 돌아가.”
“리즈벨한테?”
“그래. 산책하던 중이었잖아. 마저 하고 와.”
아시어스는 뭔가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이내 그가 낮은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쓸데없는 놈이 접근하지 않게 주의를 좀 기울여라, 티스. 내가 직접 나서는 일이 없게.”
“치이.”
“내가 준 임무를 자꾸 똑바로 수행 못 하면 바일과 역할을 바꿀…….”
“알았어. 알았다고!”
탁탁탁.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티스가 리즈벨의 면전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앗, 일어나 있었네! 리즈벨, 우리 다시 산책할까?”
아시어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혼에 각인된 남자의 존재감이 맥동하는 것이 아직 또렷했다.
아시어스는 그녀를 두고 멀리, 오래는 못 가는 남자였다.
리즈벨은 시험 삼아 골목 밖으로 나가 보았다. 종속의 사슬이 흔들리며 상대의 존재감이 딱 그녀가 멀어진 만큼 가까워졌다.
티스가 해사하게 물었다.
“돌아갈래?”
“아니.”
거리로 나오니 종전까지 그녀를 에워싸고 있던 살기는 흔적도 없었다.
에엘의 공기는 언제 그녀를 위협했냐는 양 나른한 평화를 되찾았다. 리즈벨은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더 걷자, 티스.”
기묘한 산책이 다시 시작되었다.
* * *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리즈벨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딱히 무언가를 사지도, 어느 곳에 들어서지도 않고 계속해서 발을 놀렸다. 수도의 중심가를 둘러싼 첸 강에 다다를 때까지.
강 건너는 평민들의 거주지였다. 다리 한가운데 올라서고 나서야 리즈벨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에 신선한 공기를 가득 채웠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헐거워져 있던 목 아래의 매듭이 풀어지며 후드가 뒤로 넘어갔다. 긴 금발이 바람의 결을 따라 높이 흩날렸다.
“아…….”
휘날리는 금발을 한 손에 모아 쥐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동자에 담겼다. 노을에 물든 강가 위에 드리워진 아치형의 돌다리는 역사 속 어느 연인의 이별 장소라 하여 연인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가갈까…….’
아시어스는 잠깐의 고민 끝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다리의 이름 때문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녀의 평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 몇 시간이나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녀의 뒤를 쫓았듯이.
다가가면 경계할 테고, 밀어내겠지. 그게 당연한데도 어쩐지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림 같은 풍경에 까만 얼룩처럼 남고 싶지도 않고…….
아시어스는 강가에 늘어선 버드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리즈벨이 선 곳에서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에게는 그녀가 선명하게 보였다. 종속의 힘이 리즈벨의 모습을 그에게 비추고 있었다.
“이 다리 이름이 왜 연인의 다리야?”
목소리도 아주 잘 들렸다.
“오래전에 이 다리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라타에의 황녀와 패망국의 총사령관이었다던가.”
“거기까지만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알겠다.”
“그렇지. 뻔한 새드엔딩일 수 있었는데, 특이한 점이라면 황녀가 조국을 버리고 그 총사령관을 택했다는 거래. 그들이 이 자리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고 하더라.”
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모로 갔어도 결말은 비극이야. 굳이 말 안 해도 짐작하겠지만.”
“…….”
“어쨌든 그 뒤로 이런 풍습이 생겼다지. 평생을 약속한 연인이 이 다리 위에서, 지금 네가 선 바로 그 자리에서 영원을 약속하는. 그래서 다른 말로는 영원의 다리, 혹은 약혼의 다리라고도 한다더라.”
가만히 경청하던 그녀가 미소지었다.
“낭만적이네.”
낭만적인 건가. 낭만이 뭐지.
아시어스는 한참이나 곱씹어 보았지만, 그 추상적인 단어를 이해하는 데는 실패했다.
리즈벨이 작게 중얼거렸다.
“에엘은 알 수 없는 도시구나. 그래도 이곳은 예쁘다.”
어쨌거나 라타에가 영 최악은 아니라 다행이네요. 아시어스는 무심코 속으로 생각했다.
리즈벨은 꼭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정확하게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발견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아시어스는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리즈벨.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푸른 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깊어졌다. 그제야 아시어스는 퍼뜩 깨달았다.
‘너무 오래…….’
너무 오래 빠져들 듯이 보고 있었구나.
정신이 팔린 사이에 종속이 느슨해져 있었다. 티스베조차도 그가 티를 내지 않으면 기척을 읽어 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은신하고 있는데, 그녀가 단번에 그를 찾아낼 만큼.
귓전에 불길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저 여자는 그가 잠시라도 느슨해지면 그 틈을 타 충분히 우위를 뒤집어 버릴 힘을 가졌다. 뭉근하게 풀어졌던 마음이 얼어붙었다.
오늘 이미 과하게 그녀의 편의를 봐주었다. 더 가면 곤란해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평화라는 건 있을 수가 없는 건데.
아시어스의 발치에 회색빛 안개가 모여들었다. 그것은 먹구름처럼 그림자 속에서 뭉게뭉게 모여들더니 커다란 형상을 이루었다.
“바일.”
“예, 주인.”
호명과 함께 안개 속에서 덩치 큰 성인 남자가 걸어 나왔다.
아시어스는 입술 안쪽을 세게 물어뜯으며 리즈벨을 등졌다.
“마탑으로 데려와. 당장.”
* * *
“리즈벨.”
리즈벨은 한참이나 다리 아래를 빤히 응시하다 고개를 들었다.
짙은 회색 머리칼을 가진 키 큰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윽, 바일이잖아?”
티스베가 인상을 찡그리며 리즈벨의 뒤로 쏙 숨었다. 리즈벨은 여상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바일. 돌아왔구나.”
“예.”
사내의 구슬 같은 검은 눈이 리즈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악마의 이름은 바일라도르.
늘 아시어스의 발치, 혹은 손에 휘감겨 있는 회색 안개였다.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싫어!”
바일의 정중한 말에 대답한 것은 티스였다. 티스가 리즈벨의 등 뒤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곤 앙칼지게 외쳤다.
“더 놀다 갈 거야. 주인한테 그렇게 전해!”
“해가 진다, 티스.”
“아깐 가랬으면서 왜 또 돌아오래? 뭐 때문에 음흉하게 뒤나 밟…… 이익.”
바일이 커다란 손으로 작달막한 소녀의 목덜미를 달랑 잡아챘다. 덩치에 맞지 않게 동작이 민첩했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티스가 있는 힘껏 버둥거렸다.
“놔!”
“대체 언제쯤 고분고분해질 셈이냐? 리즈벨 앞에서 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으면 잔말 말고 따라와.”
바일은 무뚝뚝하고 말수 적은 악마였다. 그런 그가 지금처럼 말을 길게 늘일 때는 티스가 생떼를 쓸 때뿐이었다.
“내 리본. 내 리본!”
“가시죠.”
리즈벨은 리본을 빼앗긴 티스가 몸통 한중간에 뚫린 구멍을 가리기 위해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다 풋 웃었다.
“그래.”
잠깐의 산책이 끝났다. 검은 이동진이 그들 셋의 몸을 집어삼켰다. 눈 한 번 깜빡하기도 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그들은 거리의 한중간에서도 가장 허름하고 작은 집 앞에 다다라 있었다.
문의 경첩이 곧 떨어질 것처럼 불안하게 달칵거렸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공간을 훌쩍훌쩍 넘어 다니는 데에는 근 한 달 동안 꽤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리즈벨!”
기어코 바일의 손에서 탈출한 티스가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에게 달려들 때까지만 해도 소녀의 모습이었는데, 정작 리즈벨이 안게 된 것은 붉은 털의 여우였다.
“자꾸 버릇을 받아 주시면 안 됩니다, 리즈벨.”
“그래도 귀엽잖아.”
“자꾸 무르게 대하시니 점점 더 버릇없어지는 겁니다.”
크르릉. 조그만 여우가 바일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바일이 본체만체하며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문 안쪽은 집의 외관만큼이나 허름했다.
그러나 내부로 발을 들이는 순간, 밀폐된 공간에서는 불어올 리가 없는 뜨겁고 건조한 모래바람이 리즈벨을 덮쳤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광막한 황무지가 떠날 때와 다름없는 풍경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리즈벨은 작열하는 뙤약볕과 뺨을 때리는 모래 알갱이를 피해 후드를 뒤집어썼다.
덥고 삭막한 땅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거대한 탑 하나가 전부였다.
구름을 뚫고 까마득하게 치솟은 검고 무기질적인 구조물.
마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