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57
58화
* * *
마탑은 그 주인만큼이나 제멋대로 생긴 건축물이었다. 마력의 원천이자 마법사들의 성지라는 위명을 가진 탑을 두고 하기엔 조금 불순한 생각이었으나, 사실이 그랬다.
우선 마탑에는 층이 없었다.
“원래는 층이 있었습니다. 1층부터 10층까지 있었죠.”
리즈벨은 그녀가 마탑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바일이 해 주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공간이 부족해졌고……. 옆으로 늘리는 데엔 한계가 있어 위로 쌓아 올리기 시작한 겁니다.”
아시어스는 건축 쪽에 있어 섬세한 인간은 절대 못 되었다. 그는 공간이 모자랄 때마다 층과 층, 방과 방 사이에 공간을 아무렇게나 끼워 넣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니 마탑 내부는 층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해져 버렸다. 한마디로 수천 개의 방이 무질서하게 탑 내부에 구겨 넣어진 꼴이었다.
분명히 이 방에서는 제대로 바닥을 딛고 있었는데, 결계를 열고 옆방으로 가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들어온 문으로 나가면 전혀 다른 복도에 뚝 떨어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 수천 개의 방은 마탑에 기거하는 마법사들의 집이자 연구실이자 창고로 쓰였다.
그중에서도 마탑주, 아시어스의 방은 탑의 최상층에 있었다. 리즈벨의 발치에 푸르스름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휘익-.
세 번째로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그녀는 널따란 침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구색은 적당히 갖추었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무채색의 방이었다.
품에 안고 있었던 티스는 출입을 거부당했는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리즈벨은 익숙하게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
“……안녕.”
화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상대는 여전히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어?”
생기 없는 방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마법사는 오늘은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을 셈인 모양이었다. 하여튼 종잡을 수가 없는 남자.
“뭐야. 얼굴을 보이기도 싫으면 나를 왜 여기로 데려왔어?”
“안 되나요?”
어딘가로 숨어버린 주제에 대답은 빨랐다. 되묻는 목소리가 평소와 별다를 것 없이 매끄러웠다.
“……네가 나에 한해 안 될 게 어디 있니.”
어쨌든 그가 이 방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종속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탓이었다. 그와 가까이 있을 때는 종속력이 강해진다. 심할 땐 그녀가 하는 생각조차 낱낱이 읽히기도 했다.
남자는 그녀를 강제할 수 있었다. 이 방 안을 나가지 못하게 할 수도 있고, 그가 원하면 언제든 그녀가 제 발로 저를 찾아오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가 정말로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의 생각, 감정, 행동. 그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종속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그걸 알고 있었고, 충분히 각오도 했었다. 그러나 리즈벨이 감수하리라 생각했던 대부분의 짓을 마법사는 하지 않았다.
“중심가에 나갔다면서요.”
어차피 오늘 종일 그녀 뒤를 따라다녔으면서도 모른 척 묻는다. 살짝 모가 난 말투는 어떻게 들으면 길거리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못내 감탄하던 그녀를 놀리려는 것도 같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멋대로 탑을 떠난 데 대한 심술이 섞인 것도 같았다.
리즈벨은 그가 있으리라 생각되는 허공을 응시하다 천천히 대답했다.
“응. 에엘은 아름다운 도시인 것 같아.”
“뭐가 가장 아름답던가요?”
“모든 것이…….”
남자는 이상하리만큼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하나만 골라 보라면?”
“……첸 강 끝자락에 작은 돌다리가 있었어.”
“‘연인의 다리’ 말이군요.”
“그렇게 부른다더라. 그 다리 위에서, 석양이 강에 잠겨 있는 풍경을 보다 왔어.”
그가 그녀에게 손을 대는 것은 끽해야 포옹, 머리카락 끝에 하는 입맞춤, 손등에 내려앉는 입맞춤. 혹은 몰래 뒤를 따라오며 그녀의 산책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치워 내는 것.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아시어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거리에 가을꽃이 만발해 있더라. 티스가 코스모스라고 알려 줬어.”
“예뻤겠네요. 꼭 당신처럼.”
“그래. 꼭 너처럼.”
대화는 가벼웠다. 습관처럼 대꾸해 준 뒤에, 리즈벨은 잠시 틈을 두고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너 오늘 나를 왜 구했…….”
그러나 그 물음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유야 뻔하다. 아시어스가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물음인 것이다.
하지만 굳이 말로 해야 그가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리즈벨은 속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 왜 내 뒤를 따라왔어? 왜 나를 구했어? 왜 티스를 혼냈어?
그 생각들이 고스란히 읽히는 느낌이 났다. 다 들었을 텐데도 남자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하긴, 답을 들어도 달라지는 건 없으려나. 리즈벨은 씁쓸함을 숨기며 짐짓 표정을 밝혔다.
“그래, 이 화제는 그만두자. 어서 와, 아시어스.”
“…….”
“오늘은 돌아오는 답이 없네.”
아시어스는 그녀가 ‘어서 와’라고 말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는 엄연히 그의 탑이고, 그녀는 인질에 불과한데도. 본인은 티를 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남을 관찰하는 데 도가 튼 그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멀찍이서, 혹은 아주 가까이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존재감이 바로 지척으로 다가왔다.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
리즈벨은 얕게 숨을 들이쉬며 몸을 굳혔다. 여전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앞에 있었다. 그녀의 바로 앞에.
“다녀왔어요.”
메아리처럼 허공으로 흩어지던 목소리에 확연한 무게감이 실렸다. 그는 그녀의 귓전에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접촉한 곳은 한 곳도 없는데도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리즈벨의 금빛 머리카락 타래가 허공으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누군가의 손이 그 끝을 쥐고 있는 느낌이 선명했다.
머리칼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소리가 달콤하다.
리즈벨은 멈추었던 숨을 다시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상대가 제게서 완전히 물러나기 전에 손을 뻗었다.
가장 먼저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가운 뺨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뭔가가 느껴진다는 게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아시어스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이 움찔거렸다.
리즈벨은 아래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장님이 손끝으로 상대를 더듬어 생김새를 파악하듯, 보이지 않는 남자의 얼굴을 만져 윤곽을 그려 냈다.
관자놀이. 식은 뺨과 두드러지지 않은 광대. 곧게 뻗은 콧대. 그녀의 손가락이 막 코끝에서 인중을 스치고 윗입술로 내려가려던 찰나, 손목이 잡혔다.
“그만.”
끝 음이 살짝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리즈벨은 태연하게 웃었다.
“왜?”
“손을 어디까지 내리시려고?”
“글쎄…….”
리즈벨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었다. 조금 앞으로 뻗자 곧바로 어깨가 만져졌다.
키 차이로 짐작건대 그는 그녀에게 허리를 숙이고 눈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리즈벨은 그의 어깨선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네가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으니 어쩔 수 없는걸.”
“…….”
“싫으면 나타나던가.”
아시어스는 할 말을 잃었는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그녀가 어깨를 지나 가슴팍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결국 급하게 만류했다.
“알겠어요, 그만. 안 할 테니까…….”
“아냐. 이것도 나쁘진 않으니 그냥 그대로 있어도 돼.”
리즈벨은 손가락에 걸리는 작고 둥근 단추를 매만졌다. 조금 손을 올리자 목깃이 스쳤고, 이윽고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가 손끝에 닿았다.
그녀는 다시금 조심스럽게 그의 이목구비를 탐색한 뒤에, 잿빛 눈이 있으리라 생각되는 허공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아시어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미세한 진동을 손끝으로 느끼며 리즈벨은 속삭였다.
“나는 보고 싶지만 네 얼굴은 보이기 싫다는 거잖아. 오늘 온종일 말이지.”
때때로 남자는 지극히 단순했다. 단지 그녀가 제 모습을 보지 못하기만 하면 그의 속내를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걸 보면.
리즈벨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가끔은 그러고 싶을 때가 있어. 이해해. 존중하고.”
“…….”
“캐물을 셈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
잠시의 침묵 끝에,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오늘도 아니네요.”
“무엇이?”
“그런 게 있답니다, 위험한 아가씨.”
스륵.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던 힘이 풀리나 싶더니 손목이 살짝 아래로 꺾어졌다.
“돌아왔어요, 오늘도. 당신 곁으로.”
아시어스가 리즈벨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차고 마른 입술은 손등에 닿자마자 열기를 품었다. 그 상태로 지그시 손등을 내리누른다. 마치 열상을 내듯이. 꾹.
다음 날 아침 리즈벨이 그녀의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창가에는 못 보던 것이 놓여 있었다.
붉은 코스모스가 가득 꽂힌 화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