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58
59화
* * *
마탑은 대체로 활기에 차 있는 공간이었다. 물론 좋게 말했을 때 활기고, 나쁘게 말하면 핀트가 어긋난 광기에 가까웠다.
마탑은 대륙 곳곳에서 모인 온갖 정신 나간 자들의 집합소였다. 마탑의 하층부부터 중간까지는 날마다 대혼돈 파티가 일어났다.
폭발음이 하루에도 댓 번씩 탑을 뒤흔드는 것은 예사고, 실험실 하나가 통째로 터져 나가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괴상하게 개조된 마법 물품들은 발치에 치이고도 남을 만큼 넘쳐났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소수점 스무 자리는 가볍게 넘어가는 복잡한 마법 수식들을 중얼중얼 외며 새벽마다 마탑을 배회하는 마법사들의 수를 세자면 손가락 발가락을 다 써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러나 리즈벨의 침실은 늘 고요하고 조용했다. 아시어스가 방음 마법과 접근 금지 마법을 몇 겹에 걸쳐 걸어 둔 덕이었다.
리즈벨은 보통 그녀의 방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평화로운 공기, 나른한 여유였다.
그러나 아시어스의 붉은 여우는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리-즈-벨!”
“티스베. 리즈벨의 방 문을 그렇게 벌컥벌컥 열어 대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하나! 노크를 하라고!”
그리고 티스베 뒤로 열에 여덟은 바일이 따라붙었다.
안개 형태로 있는 것을 좋아하는 아시어스의 세 번째 악마는 늘 말괄량이 여우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하기 바빴다.
“미안합니다, 리즈벨. 아침부터…….”
“나랑 아래층에 놀러 가자!”
티스가 리즈벨의 품에 쏙 파고들며 바일을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주인이 보면 화를 낼…….”
“바쁘잖아, 아시어스는! 바쁘다고 한번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는걸.”
소녀가 리즈벨의 허리를 꼭 껴안으며 달라붙었다.
“나랑 놀자아. 응?”
리즈벨은 티스를 잘 거절하지 못했다.
티스는 그녀에게 살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지난번 그녀를 꼬드기려던 건 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검은 눈에 넘실거리는 건 일단은 조건 없는 애정이라서. 리즈벨은 그런 것에 약했다.
“놀아 주세요!”
“……그럴까?”
게다가 이 붉은 머리의 소녀는 지나치게 애교가 많고 깜찍했다. 결국 리즈벨은 티스의 손을 잡고 방문을 나섰다.
바일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시어스가 돌아온 만큼 오늘은 티스도 마탑 밖으로 나서진 않을 모양이었다. 티스는 검은 마력을 스멀스멀 얽으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아말로한테 갈까, 피오르한테 갈까…….”
아말로와 피오르는 마탑에서 아시어스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마법사들이었다.
불쑥불쑥 찾아드는 아시어스의 악마들을 보고도 두려워하기는커녕 농담을 걸며 친근하게 맞아 주기까지 했다.
“성녀님, 오늘은 마탑주께서 기분이 어때 보이시던가요?”
그리고 그들은 아시어스의 굉장한 추종자들이었다. 리즈벨은 안경까지 찾아 쓰고 손에는 수첩과 펜을 든 채 눈을 빛내는 마법사를 보며 애매하게 웃었다.
“나도 얼굴을 보지는 못했어. 목소리만 들었거든.”
“목소리는 어떠셨습니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컨디션은요? 아, 목소리만 들으셨다니 그럼 투영 마법을 쓰신 채 이야기만 나누신 거로군요!”
“그렇지…….”
마탑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그렇듯, 아말로는 굉장한 수다쟁이였다.
온종일 하는 일이라는 게 실험실에 처박혀서 온갖 종류의 쓸데없는 마법 수식들을 연구하거나 마법진들을 발명하는 일이다 보니, 마탑의 마법사들은 자연히 하루에 한마디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가끔 이렇게 누구 하나를 붙잡으면 그간 쌓인 말을 줄줄 쏟아 내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마탑에 나타난 아름다운 성녀님은 단번에 마법사들의 표적이 되었다.
“성녀님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마탑주께서는 아래층에 얼굴을 보이는 일이 드무셔서. 그래서, 어때 보이시던가요?”
그들은 리즈벨이 성녀라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아시어스 뤼켄. 그들의 주인.
리즈벨은 무려 마탑에서 아시어스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인간인 것이다.
“약간 지친 기색이 있긴 했지만, 평소랑 똑같았어.”
그리고 리즈벨은 그들에게 ‘오늘의 아시어스’를 말해 주며 엉뚱하게도 그들의 환심을 샀다.
“처음에는 안개 너머에 있는 것처럼 웅웅거리면서 말하더니, 곧바로 눈앞에 있는 게 느껴졌어. 그게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는데.”
“허억. 존재감까지 숨기는 완벽한 은신 마법이로군요.”
아말로가 감동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우리 마탑주!”
50살은 먹어 보이는 중년 마법사가 젊은 마탑주를 찬양하는 광경은 리즈벨에겐 조금 생소했다.
그녀는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건가 보다.”
“세상에, 성녀님!”
그렇게 말한 게 실수였다. 아말로가 갈색 눈을 번쩍 빛내며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성녀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그것은 말입니다, 육신의 존재감 자체를 수천수만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안개처럼 공기 중에 녹여 내는 고등 마법으로…….”
주제는 지난번과 똑같았다. 아시어스 뤼켄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가.
“존재감을 쪼개었다가 한순간에 다시 이어 붙인다니, 허억. 대체 어느 경지에 가 계신 것인지…….”
리즈벨은 마탑에 온 뒤로 아시어스가 온 대륙 마법사들의 경외를 받는 대마법사라는 것을 체감했다.
그는 그야말로 타고난 천재였다. 아시어스처럼 눈짓 한 번으로,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으로 마력을 운용하는 마법사는 세상천지 그 하나뿐일 거라 했다.
어느 골목길에서 튀어나올 그런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마법진 하나를 완벽히 그려 내는 데도 최소 30초, 길게는 몇 분에 달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 마탑주께서는 길어야 3초거든요. 가끔 인간인가 의심스럽다니까요.”
“그렇구나.”
“그것뿐입니까. 마력의 3색을 동시에 완벽하게 운용할 수 있는 것도 마탑주 한 분뿐이신걸요.”
마력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붉은색, 푸른색, 녹색. 보통의 마법사들은 그 세 가지 중 하나, 많아야 두 개에 특화되어 있다고 했다.
아말로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게다가 악마의 힘까지……. 하나 소환하는 데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악마를 셋씩이나 부리시고…….”
아시어스는 마력의 3색에 더해 검은 마력이라 불리는 악마의 힘까지 완벽하게 다루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바로 그 점이 그를 대륙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마법사로 만들고, 마탑의 주인 자격을 부여했다.
“저 같은 건 500년을 수련해도 마탑주의 발끝에도 못 미칠 겁니다. 성녀님, 그건 그냥 대단한 게 아니라 천부적인 재능이라고요. 악마의 재능!”
“응, 그런가 봐.”
리즈벨은 조용히 마법사들이란 다 아시어스 같나 보다 했던 생각을 철회했다. 그리고 아시어스가 마탑주로서 가지는 위상을 조금 상향 조정했다.
그사이 아말로의 아시어스 찬양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생긴 것도 좀, 인간이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마계에도 저렇게 생긴 악마는 없을 거예요.”
“맞아, 주인이 좀 잘생겼지.”
티스가 활짝 웃으며 거들었다. 주근깨가 콕콕 박힌 붉은 머리의 이 소녀 악마는 알고 보니 굉장히 얼굴을 밝혔다.
“악마도 홀려 낸 얼굴이잖아. 그래서 내가 친히 소환되어 줬…… 읍읍.”
“티스베.”
바일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티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을 좀 가려 해라. 제발.”
“으브븝!”
늘 있는 일이라 아말로는 그들을 본체만체했다. 대신 리즈벨을 붙들고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하여튼 성녀님, 마탑주를 뵙게 되시거든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억하셨다가 제게 알려 주셔야 합니다. 안색은 어떠신지, 오늘 뭘 드셨는지, 또 얼마나 굉장한 마법을 쓰셨는지까지 다요!”
리즈벨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시어스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 반응할지 궁금해졌다.
* * *
어쨌든 본의 아니게 마탑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리즈벨은 그녀가 있는 곳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라타에 마탑은 엄밀히 말하면 라타에에 있지는 않았다. 마탑이 세워진 곳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겔오르 대륙 동쪽 끝의 황무지였다.
100년 전 마탑이 라타에와 협약을 맺을 때, 당대의 마탑주가 마탑으로 통하는 ‘문’을 라타에 수도 에엘에 만들어 놓았다.
그 문을 통해 마탑의 마력이 에엘로 흘러나가는 것이다. 그 문은 마법사이거나, 마법사와 동행하거나, 마탑주의 허락을 받아야만 열렸다.
다시 말해 리즈벨이 혼자 마탑 밖으로 나간다 해도 에엘로 나갈 수는 없다.
“그래서 굳이 나를 가둬 놓지 않는 건가…….”
마탑은 평화로웠다. 악마들은 대체로 다정하고 상냥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녀가 누구이고 어떤 힘을 가졌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철도 비명도 살의도 없다. 아주 따듯하고 완벽한 유리 새장이었다. 발디마르에 비하면 너무나 안락한 곳이다.
리즈벨은 붉은 꽃잎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언제 산산이 부서질지 모르는 이 허상 같은 안온함과 오늘 온종일 얼굴도 보여 주지 않는 그녀의 마법사와……. 자신이 언제까지 이렇게 멀쩡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리즈벨은 문 앞에 조용히 서 있던 바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헬라르를 죽일 무기랬지, 바일.”
“……예.”
“내 쓰임이 다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