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60
61화
“그럼 빼앗기게 둘 줄 알았나요?”
느릿느릿, 아시어스가 중얼거렸다.
“알잖아요. 나는 당신을 못 놔줘.”
“내가 네 ‘무기’라서?”
“알면서 뭘 묻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답인데 가슴이 쿵 떨어졌다. 아시어스가 잠기운 어린 음성으로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아까 무슨 꿈을 꿨냐고 했죠……. 어릴 적 꿈을 꿨어요. 혼자가 되던 날의 꿈.”
리즈벨은 가까스로 멀쩡한 목소리를 냈다.
“혼자인 게 무서워?”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때 많이 아파서.”
나직하고 공허한 웃음.
“그래서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꿈에 나와요. 잊지도 못하게.”
“…….”
“놔주질 않네…….”
남자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리즈벨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복수하려는 거야?”
아시어스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제 리즈벨의 말을 반쯤은 듣고 있지 않았다. 악몽에 시달리다 겨우 해방된 사고가 점점 몽롱해졌다.
‘머리카락…….’
아시어스는 시트 위에 길게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을 만질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만지면 화를 내겠지. 쫓아낼지도 몰라. 게다가 한번 만지기 시작하면 멈출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흐트러진 금발 사이로 곧게 뻗은 하얀 목선이 보였다. 어느새 뻗어진 손끝이 살결을 스치려는 찰나, 그는 아쉽게 주먹을 쥐었다.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을 것 같아서.
때마침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 덕분에 생각의 줄기를 끊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아시어스는 손을 거두고 대신 눈가를 문질렀다.
“……예쁘다.”
뜬금없이 들려온 말에 리즈벨은 그 몰래 한숨을 쉬었다. 지난 한 달간 저 말을 대체 몇 번이나 들었더라. 이쯤 되면 말버릇이 아닐까 싶었다. 잔뜩 도취된 눈을 하고서…….
리즈벨은 그녀가 지금 그를 마주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시어스가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할 때 그의 눈에 거짓은 한 톨도 없었다. 그런 눈에는 여전히 면역이 없다.
얼마나 숨을 참고 있었을까, 뒤편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리즈벨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시어스는 그녀 쪽을 향하게 모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깊은 수마에 빠지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이따금 반듯한 눈썹이 움찔거리며 떨리는 게 보였다. 그러다 또 무슨 꿈을 꾸는지, 미간이 찡그려졌다.
리즈벨은 완전히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창백한 뺨. 마른 입술.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 그녀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얕은 호흡을 더 잘 듣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을 때, 그들 사이의 거리는 손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가까워졌다.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물러나고 싶지 않다. 리즈벨의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남자의 입술을 스쳤다. 지난번 손대지 못했던 입술을 결국은 만졌다.
이윽고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말도 그의 말버릇과 다르지 않았다.
“……예쁘네.”
짓씹고 물어뜯었는지 표면이 거칠었지만, 입술 모양은 참 예뻤다.
리즈벨은 한참 그의 입술과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너의 눈빛. 너의 행동. 그것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어디인가?
알고 싶어. 리즈벨은 작게 중얼거렸다.
“너를 알고 싶어.”
너를…….
구석구석 전부 다 알고 싶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건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속내인지,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내가 네 손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깜빡깜빡. 이상하게도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수면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부드러운 수마였다.
눈이 스르륵 감겼다. 이윽고 리즈벨의 고개가 남자의 품으로 툭 떨구어졌다.
꿈 없는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아시어스의 품에 갇히듯이 끌어안겨 있었다.
그다음 날부터 남자는 늘 새벽녘이 되면 리즈벨의 침실을 찾아왔다. 길이 잘 든 짐승처럼 그녀 곁에서 안정을 찾곤 했다.
보통은 얌전히 머리카락이나 얇은 옷자락 정도를 건드려 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또 가끔은 기분이 좋은지 툭툭 말장난하며 그녀를 놀렸다가, 바로 다음 날에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져서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고 있기만 했다.
리즈벨은 그런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암묵적인 허락이었다.
* * *
아시어스는 늘 밤에만 왔다. 낮에 얼굴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환한 햇빛 아래서 마주한 것은 나흘이 더 지난 후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였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어. 리즈벨은 살이 좀 쪄야 해.”
리즈벨은 한창 티스에게 붙잡혀 있는 중이었다. 주근깨가 사랑스럽게 콕콕 박힌 붉은 머리의 소녀는 리즈벨을 상당히 좋아했고, 좋아하는 만큼 그녀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충분한데, 이미…….”
“아냐, 아직 한참 남았어.”
티스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테이블에 빽빽이 놓여 있던 접시들이 휘릭 바뀌었다.
리즈벨은 눈앞에 나타난 온갖 종류의 디저트류를 보며 애매하게 웃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아 보였다.
그녀는 단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음…….”
하지만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소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리즈벨은 티스를 보며 자신이 어린아이에게 상당히 약하다는 것을 새로이 깨달은 차였다.
“그럼 얼그레이 케이크 먹을게.”
리즈벨은 테이블을 가득 채운 디저트 중 그나마 덜 달아 보이는 케이크 접시를 끌어당겼다.
“그거 내가 좋아하는 거야!”
티스의 잔뜩 흥분한 재잘거림과 동시에 한 입 밀어 넣는 순간, 그녀는 제 선택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케이크는 혀가 녹아버릴 정도로 달짝지근했다.
리즈벨이 티스의 빛나는 눈빛을 피하며 억지로 케이크 한 접시를 다 비워 갈 즈음, 아시어스가 나타났다.
“단 걸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요.”
그는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리즈벨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응…….”
리즈벨은 혀를 마비시키는 크림을 한가득 문 채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시어스가 그녀 곁에 찰싹 붙은 티스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티스.”
“싫은데에.”
“너 대체 누구 사역마냐?”
아시어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티스가 혀를 쏙 내밀며 대꾸했다.
“리즈벨이랑 놀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잖아. 이건 주인이 이해해 줘야 해.”
티 한 점 없이 발랄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말로 테이블 위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아니, 얼어붙은 것은 아시어스 혼자였다. 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사역마가 경쾌하게 떠들었다.
“하루하루가 아주 중요하다고!”
“……바일.”
아시어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그의 세 번째 사역마를 소환했다. 즉시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모여들더니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바닥을 디뎠다.
아시어스가 굳이 ‘데려가’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바일은 다짜고짜 티스베를 덜렁 들어 올리고는 어딘가로 휙 사라져 버렸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리즈벨은 혀에 남은 단맛에 적응하려 애쓰며 말했다.
“티스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내가 너를 좀 알고 싶어서. 몇 가지 좀 물어보려고 해.”
리즈벨은 찻잔을 홀짝이며 입에 남은 단맛을 몰아냈다. 그녀는 요 며칠간 생각을 거의 다 정리한 참이었다.
“네 계획은 언제쯤 실행할 셈이야? 아니.”
리즈벨은 잠시 고민하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내뱉었다.
“너는 나를 언제 죽일 거야?”
아시어스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녀의 말이 허무맹랑하다고 여긴다기보다는, 그저 그녀가 그녀 입으로 그 화제를 꺼낸 것에 어이없어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내 손에 죽고 싶어요?”
“죽고 싶은 사람은 웬만해서는 잘 없지. 나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그럼 왜 그런 걸 묻습니까? 죽어 줄 것도 아니면서.”
“말했잖아. 궁금했다고.”
“정말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정도는.”
그거야 그렇지만. 리즈벨은 여기서 그만둘까, 하다가 생각을 고쳤다.
“너는 로제스를 살렸고, 나는 너에게 나를 줬지.”
“……그런데요.”
“나를 얻은 너는 이제 나를 죽여 내 힘을 얻어야지. 그게 마땅한 일인데.”
“그런데?”
아시어스는 점점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했다.
“그런데 너는 한 달이나 나를 살려 뒀고.”
리즈벨은 찻잔을 내려놓고 아시어스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밤만 되면 나를 찾으면서 정작 손은 대지 않고. 예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고.”
“…….”
“늘 ‘오늘도 돌아왔다’라고 말을 하고.”
“…….”
“그리고 내게 꽃을 가져다주지.”
아시어스는 허를 찔린 표정으로 리즈벨을 보고 있었다. 리즈벨은 기억을 되짚으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너는 발디마르에서도 그랬어. 처음에는 네가 단순히 내 몸을 원하는 줄 알았…….”
“아니, 잠깐만.”
결국 아시어스가 거침없이 말을 잇는 그녀를 저지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러실까.”
“네 눈은 늘 그렇게 말하잖아.”
“내 눈이 뭐가 어때서요?”
리즈벨은 타다 남은 잿더미 같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끝에 조용히 속삭였다.
“너는 사람을 헷갈리게 해.”
지난 한 달 내내, 리즈벨은 늘 극도로 긴장해 그의 기색을 살폈지만 잿빛 눈에 살의가 번뜩였던 적은 없었다.
상대를 죽이고 싶어 하는 눈과 상대를 취하고 싶어 하는 눈은 다르다. 같다고 생각했지만, 엄연히 다른 거였다. 살의와 사랑이 다르듯이 그건 정말로 극과 극에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아시어스는 모른 척을 했다. 리즈벨은 가만히 그를 보았다. 저 남자는 하루하루 다른 눈을 한다.
발디마르에 있을 때부터 그랬다. 어느 날은 녹아 버릴 것처럼 달콤하게 그녀를 보다가, 또 어느 날은 당장 목을 졸라 버리고 싶다는 눈을 하고. 어제는 냉랭했다가, 오늘은 상냥하고.
그 간극이 너무 커서 리즈벨은 도저히 저 남자가 자신을 어쩔 셈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과 뭘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알 듯 하면서 모르겠다.
푸른 눈이 아시어스를 얽매었다. 리즈벨의 고민은 짧았다.
“그럼 이렇게 말하면 어때?”
아시어스가 뭐에 약한지 리즈벨은 잘 알았다. 그녀는 천천히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아시어스는 그녀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깜빡이는 모습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다.
그녀의 푸른 눈에 차가운 호기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순간,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아시어스. 나랑 자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