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62
63화
그래서인가. 가슴이 울렁거렸다. 한동안 입술과 혀끝에서 머물던 감각이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뒤섞였다.
가볍게 쓸고, 다독이고. 버겁지 않게 타액이 섞였다. 기분 좋은 자극이었다. 어깨에 들어간 긴장이 느슨하게 풀리고 아랫배가 뭉근하게 조여들기 시작했다. 푸른 눈이 느릿하게 깜빡이다, 얇은 눈꺼풀에 덮였다.
‘……기분 좋아.’
하지만 조금 더 깊고 거칠었으면 좋겠다. 상대가 어떻게 키스할 줄 아는 남자인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리즈벨은 팔을 뻗어 아시어스의 목을 휘감았다. 그를 제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기고, 제 안을 느리게 유영하는 움직임에 화답했다.
그것이 남자의 어느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았다.
아시어스가 멈칫하더니 입술을 떼었다. 강렬한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리즈벨은 생기 없기 짝이 없는 그 회색빛 눈에서 붉은빛이 탁 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 지금 제 눈에도 비슷한 빛이 돌고 있지 않을까. 선명한 육체적 갈망. 부정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아시어스가 낮게 탄식했다.
“이거 위험한데…….”
리즈벨은 타액에 반질반질하게 젖은 남자의 입술을 만졌다. 유혹적인 목소리가 남자의 귀를 간질였다.
“그래서 싫어?”
그만할래? 그녀가 눈짓으로 묻자 아시어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대답을 말로 하지 않았다. 다시 남자가 입술을 붙여 왔을 때, 종전까지의 다정함은 간데없었다.
숨과 타액이 섞이는 외설적인 소리가 드레스 룸 안을 가득 채웠다. 부지불식간에 허리가 세게 끌어안기고 몸이 허공에 붕 뜨는가 싶더니 어딘가에 다소 거칠게 앉혀졌다.
젖은 입술이 급하게 턱으로 미끄러지고,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눌러 피하지 못하도록 고정하던 손아귀가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감쌌다. 허리가 파르르 떨리고 몸이 바싹 긴장했다.
그녀의 쇄골에 얼굴을 묻고 체취를 들이마시던 남자가 작게 신음을 내며 움푹 들어간 연약한 살을 이로 깨물었다.
“아!”
살갗이 강하게 빨려 들어가며 새빨간 자국을 남겼다. 열꽃처럼 피어난 흔적을 만족스럽게 핥은 그가 곧장 입술을 옮겼다.
체취가 가장 짙게 풍기는 귓불 뒤에도 은밀한 꽃잎이 개화했다. 연한 살점을 빠는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와 귀를 간질였다.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밑바닥에서 찰랑대던 간지러운 자극이 순식간에 훅 차올랐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가늘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시…….”
그녀가 채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잿빛 눈이 선명한 정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다시 물어봐 줄래요? 오늘 아침에 했던 말.”
“무슨…… 말?”
“나랑 자고 싶으냐고 했잖아.”
아시어스의 목소리는 극심한 갈증으로 푹 잠겨 있었다. 그새 잊어버린 건 아니죠? 그가 드레스의 어깨 리본을 잡아당기며 강요하듯이 속삭였다.
“지금 그 말 다시 들으면 아까랑은 다르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
그의 말이 채 맺어지기도 전이었다.
쿵쿵. 누군가 발랄하게 문을 두들겼다.
“주인! 장신구 골라 왔어!”
방정맞은 여우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쩌렁쩌렁하게 들이닥쳤다.
“나 들어간다?!”
철컥. 드레스 룸의 잠금쇠와 문고리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풀어져 있던 리즈벨의 어깨끈이 저절로 휘리릭 묶임과 동시에, 그녀를 벽에 반쯤 짓누르고 있던 남자의 몸이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벌컥.
티스가 품에 번쩍이는 장신구들을 한 아름 안은 채 안으로 폴짝 들어섰다.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서로 시선을 회피하고 있는 두 남녀를 발견했다.
“뭐 해, 둘이?”
“넌 진짜…… 도움이 안 되는…….”
아시어스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두고 나가, 티스.”
“으응? 싫어. 나도 리즈벨 예쁜 옷 입는 거 볼 건데.”
그 순간에는 리즈벨조차 티스가 정말로 눈치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시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리즈벨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역시 옷이 너무 얇죠.”
“…….”
“살갗이 너무 잘 느껴져서 곤란하네요. 이건…… 이것도, 안 되겠다.”
그는 거짓말처럼 치솟을 뻔했던 욕정을 꾹꾹 눌렀다. 미쳤지. 다른 곳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밖에 다른 인간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곳에서…….
“다른…… 다른 거.”
“……그래.”
아시어스는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채 식지 않은 열기가 목덜미를 홧홧하게 데웠다. 그러나 아시어스는 굳이 이곳까지 걸음한 본목적을 잊지는 않았다.
그는 티스가 난입한 뒤로도 한참이나 그녀에게 드레스를 입혀 보더니 기어이 하나를 골라냈다. 리즈벨은 약간 황당한 얼굴로 그가 내민 것을 바라보았다.
“이거?”
“응.”
소매가 손등을 덮고 목깃이 목 끝까지 올라오는, 금욕적이기 짝이 없는 검은 드레스였다. 그것을 건네는 아시어스의 표정이 확고하기 짝이 없었다.
리즈벨은 달리 항변하지 못하고 드레스를 받았다. 드레스 룸에 쌓여 있던 나머지 수십 개의 드레스는 곱게 포장되어 전부 마탑으로 옮겨졌다.
* * *
의상실에서 돌아온 다음 날, 리즈벨의 방에는 붉은 여우 대신 다른 존재가 온종일 침대를 차지했다. 새카맣게 반질거리는 사자 모양의 석상이었다. 아니, 석상처럼 생긴 사자였다.
검은 사자가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딱딱하고 반질거리는 몸이 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연하게 움직였다.
[오늘도 운 좋게 살아 있군. 사흘이나 숨을 연명한 소감은 어때?]신랄하고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하는 아시어스의 첫 번째 악마, 라이제스였다. 리즈벨은 평온하게 어깨만 으쓱했다.
“나쁜 기분은 아냐.”
[유감스럽네.]“고마워.”
[웃지 마.]라이제스, 아시어스가 ‘라제’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악마는 세 악마 중 유독 그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라제가 투덜거렸다.
[네 웃는 얼굴은 예쁘기는 하지만 속을 모르겠어. 그래서 기분이 나빠.]그럼에도 라제는 꼬박꼬박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의 침대에 당당하게 배를 깔고 누워선 이 말 저 말 쏘아붙이다 홀연히 사라지는 일이 일주일에 너댓 번은 되었다. 조금 더 반항적인 티스를 보는 것 같아 귀엽기는 했다.
리즈벨은 휙휙 움직이는 사자의 꼬리를 만져 보고 싶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아시어스가 보냈어?”
[아니.]“그럼 왜 왔어?”
[네 말동무나 해 주려고.]그러니까 왜? 그 물음이 소용없다는 걸 이미 경험으로 알았다. 정말 앞뒤가 다른 악마가 아닐 수 없었다.
리즈벨은 손에 턱을 괴고 가만히 검은 사자를 마주했다.
“네 주인은 나를 안 볼 생각이라니?”
[그놈이 너를 안 볼 수가 있겠어?]라제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하루에도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니 뭐, 속이 정리될 때까지는 도망치는 수밖에 없겠지.]그녀를 돌아보는 눈동자는 까만 구슬 같았다. 안을 들여다보기 어려운 새카만 구슬.
천국과 지옥이라. 천국은 뭐고 지옥은 뭘까. 흑요석으로 된 사자의 형상이 일그러지더니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황금빛 피부에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열대여섯 살의 소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멍청한 인간.”
그녀의 시트에 벌러덩 드러누운 라제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한 곳만 보는 그 미련한 멍청함을 좋아해. 보면 안쓰러워서 안아 주고 싶거든.”
“인간적이구나.”
리즈벨은 작게 웃었다. 그녀가 보기에 아시어스의 세 사역마들 중 가장 인간적인 것은 제일 쌀쌀맞은 라이제스였다. 소년이 즉각 날을 세웠다.
“어디 가서 그딴 말 함부로 마라, 여자. 모독에 가까우니까.”
“부정은 안 하네.”
“난 이 땅에서 꽤 오래 굴렀거든.”
라제가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비딱하게 앉은 소년이 새카만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리즈벨은 미동도 없이 그 시선을 받았다. 그 겁 없는 태도에 라제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인간적인’ 이 몸이 보기에,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은 알 것 같은데. 맞혀 볼까?”
“말해 봐.”
“도망칠 생각이었지?”
푸른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뜨였다. 다음 순간, 리즈벨은 그림같이 웃었다.
“바로 봤네.”
“…….”
“있지,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니라서.”
가는 손끝이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리즈벨은 흥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못 할 게 없는 인간이거든. 사람도 죽일 수 있고, 누군가의 뒤통수를 때릴 수도 있어. 죽음 앞에서 신의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니.”
“…….”
“그래서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아시어스가, 나를 ‘읽지’ 않고.”
푸른 눈이 점차 깊어졌다.
“내게 꽃을 주고.”
“…….”
“나를 당분간은 죽이지 못한다는 걸 확신했을 때.”
다디단 얼그레이 케이크를 먹던 바로 그날의 정오에. 아니, 실은 지난 한 달간 종속이 느슨해진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던 그 모든 순간순간에.
“그때 생각하길, 바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