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69
70화
황성 깊숙한 곳의 어느 화려한 방으로 안내된 뒤에는 에릴의 주의 사항이 줄줄 이어졌다.
“성녀님께서는 탄신회의 제일 마지막 순서로 입장하시게 될 겁니다. 홀의 문으로 입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황좌 근처에 있는 문으로 입장하실 예정이니 부담은 갖지 마십시오.”
“나는 괜찮아.”
리즈벨은 이미 대규모 연회장에 몇 번이고 맨발에 흙투성이 몰골로 쳐들어간 전적이 있었다. 웬만한 시선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에릴도 일전에 발디마르에서 왕녀를 에스코트할 때 그녀가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톡 치면 부서질 것같이 가는데도 절대 부러지지는 않아서.
에릴은 감정을 숨기고 부러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은 단지 성녀님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제국에 공표하고 헬라르께 축원을 올리는 자리입니다. 자리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됩니다. 굳이 무언가를 말씀하시거나 행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
뭔가를 해야 한다면 오히려 곤란할 뻔했다. 지금 그녀의 성력은 모두 아시어스의 통제하에 들어가 있기에 그녀 마음대로 꺼내다 쓰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쨌든 요는 가만히 서서 얼굴만 잠시 비치면 된다는 거네. 전시된 인형처럼.”
리즈벨은 아무렇지도 않게, 외려 흥얼거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지만 에릴은 순간 흠칫했다.
아름다운 전시 인형. 저 왕녀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 아닌가.
“아시어스는 언제 오니?”
“아마도, 곧…….”
에릴은 바싹 마른 입 안을 간신히 혀로 적시며 대답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날카롭게 단련된 기사의 감이었다.
오늘의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을 것 같다는 그런 감.
에릴이 몇 가지를 더 일러 주고 호위 몇을 문 앞에 배치하고 나서야 리즈벨은 홀로 남겨졌다.
“흐음…….”
사실 리즈벨은 그때까지만 해도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방문해 본 황성은 낯설었지만 신기했다.
발디마르와는 기둥 주춧돌의 모양에서부터 커튼의 자수까지 전부 다 달랐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뭔가를 할 수도 없고, 딱히 하지 않아도 된다.
리즈벨은 정말로 얌전히 있다 돌아갈 셈이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황제나 라타에의 귀족들 따위가 아니었으므로.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리즈벨은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잔잔하던 사고가 휙 돌아가며 몇 가지를 계산한다.
잠시의 침묵 끝에,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 * *
아시어스는 정말로 금방 돌아왔다. 리즈벨은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중이었다. 그녀의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익숙한 기운. 향.
“왔어?”
에릴이 해 준 ‘마력의 향’에 관한 이야기 때문인지, 이제는 굳이 돌아보지 않고도 알 것 같았다.
“혼자 괜찮았어요?”
“괜찮지 않았을 리가. 뭐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리즈벨이 가볍게 대꾸하며 뒤돌아섰다. 아시어스가 움찔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방금까지 하던 생각을 잠시 접어 두고 그를 보았다.
평소와 달리 쓸어 넘긴 머리 모양. 격식을 갖춘 차림. 그런 것은 사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리즈벨은 그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좀…….’
묘하게 낯빛이 창백했다.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리즈벨이 아시어스를 샅샅이 뜯어보는 동안, 그 역시 그녀를 훑고 있었다. 오늘의 리즈벨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몸에 밀착되는 드레스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허리 끝에서 물결쳤다. 드레스 밑단은 풍성하게 퍼지지는 않았지만 다이아와 금사로 놓인 수 덕분에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살갗은 드레스 밑단의 레이스에 비치는 발목과 얼굴 외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붉은 입술과 드러나는 몸의 곡선만으로도 충분히 고혹적이었다.
아시어스는 습관적으로 ‘예쁘다’는 말을 하려 입을 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리즈벨이 더 빨랐다.
“오늘은 더 잘생겼네.”
“아…….”
무심하기 짝이 없는 칭찬이었다. 그러나 물론 듣는 아시어스는 그처럼 무심하지는 못했다.
리즈벨이 그의 당황을 눈치챈 것처럼 눈을 찡긋했다.
“넌 나한테는 매일같이 예쁘다고 해 주면서 정작 네 칭찬엔 약하더라.”
“……그럴 리가 없는데.”
아시어스는 맹세코 생을 살면서 그의 능력만큼이나 외모로 많이 화제가 된 작자였다.
제 외모가 잘났다는 걸 세상도 알고 그도 알았다.
“그냥 당신 칭찬에 약한 거겠죠.”
아시어스는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푸른 눈동자에서 살짝 시선을 비꼈다. 저 얼굴을 더 보고 있으면 대책 없이 들뜨기에 십상이었다.
“아직 월경이 안 끝나서 아쉬워.”
리즈벨은 그조차 민망해서 담지 못하는 말을 몹시도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당신은 대체…….”
아시어스의 귀 끝이 속절없이 붉어졌다. 그가 작게 투덜거렸다.
“솔직한 건지 짓궂은 건지 모르겠네요.”
“둘 다야.”
아시어스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리즈벨은 그를 휘두르는 법을 지나치게 잘 알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꼭 해야 하는 말은 있었다.
“테사 경이 대강 설명을 해 주던가요?”
“응,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하던데.”
“누가 불러도 가지 말고. 말 걸어도 답하지 말고.”
흡사 어린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듯한 어조에 리즈벨은 살짝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러나 아시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리즈벨의 손을 잡아 올렸다.
“누가 이렇게 손을 잡아서, 여기에 입을 맞춘다거나.”
서늘한 손가락이 리즈벨의 손등을 천천히 문질렀다.
“춤을 신청한다거나. 지금 나 이상으로 가까이 온다거나.”
아시어스는 생각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절대 안 돼.”
“응.”
“절대. 나 외에는 누구도. 그게 여자든 남자든.”
내뱉는 말은 철없는 아이의 집착 같은데, 그 말을 하는 남자의 눈은 짐승이었다. 잿빛 눈이 꼭 눈빛만으로 그녀를 샅샅이 탐하려는 것처럼 강렬한 빛을 띠었다.
리즈벨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어차피 그렇게 두지도 않을 거면서?”
“바로 봤네요.”
아시어스는 싱긋 웃었다. 그가, 마탑의 주인이,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바로 곁에 있는데 감히 접근할 간 큰 놈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 연회만 끝나면 당분간은 건방진 황제가 성녀를 내놓으라 성화를 부리지도 못할 테지. 그리 생각하면 남는 장사였다.
“갈까요?”
“그래.”
순순한 대답과 함께 가느다란 손이 나비처럼 그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탄신 연회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리즈벨이 발디마르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연회나 파티들보다 열 배는 더 화려했고 백 배는 더 큰 규모였다.
“크네.”
“크죠.”
아시어스가 불쑥 리즈벨의 입가로 손을 들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설탕 가루를 묻힌 작은 초콜릿이었다.
보기만 해도 달아 보였지만, 리즈벨은 물리지 않고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초콜릿은 혀에 닿자마자 찐득하게 녹았다. 리즈벨은 약간 불분명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맛있…… 네…….”
그러나 아시어스가 기특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연회는 아시어스가 단언한 대로 무척이나 지겨웠다. 리즈벨은 종종 아시어스가 건네주는 간식거리를 먹으며 연회를 구경했다.
푸른 눈이 느릿하게 연회장 구석구석을 훑고 황좌 쪽으로 돌아갔다.
황좌는 연회장을 전부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에 있었다. 주홍빛 융단이 깔린 스물두 개의 계단은 황좌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좁아졌다.
타국에서 온 사절들은 그 계단을 밟고 올라가 황좌에서 정확히 세 계단 밑에 멈추었다. 계단의 너비가 넓은 것을 보니 그곳이 황제에게 예를 올리는 위치인 모양이었다.
사절단 뒤로는 라타에 귀족들의 차례였다. 리즈벨은 그 모습까지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라타에의 귀족들이 어떤 자세로 예를 취하는지. 어떤 말로 황제에게 축사를 건네는지. 그러다 문득 의문이 솟았다.
리즈벨은 그녀를 거의 가리고 선 아시어스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너는 안 해?”
“안 합니다.”
리즈벨은 눈으로 이유를 물었다. 아시어스는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하더니 순순히 설명했다.
“나는 라타에의 신하가 아니니까요. 마탑주는 황제와 계약 관계에 놓인 일종의 동업자일 뿐, 주종 관계가 아닙니다.”
“……그렇구나.”
리즈벨의 붉은 입술 끝이 비딱하게 올라갔다.
“주인과 신하…… 그래.”
미소 띤 얼굴이기는 했으나, 그녀의 눈은 차게 식었다. 그러나 아주 순간이었다.
“리즈벨?”
아시어스가 위화감을 느끼고 그녀에게로 완전히 몸을 돌리기 직전, 리즈벨은 생긋 웃으며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푸른 눈동자 속에 스쳤던 서늘함은 금세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