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72
73화
유스타프는 황좌의 팔걸이를 세게 움켜쥐고 리즈벨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거리야.”
“너 말부터 조심해야겠다.”
리즈벨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번에는 유스타프에게만 닿을 정도로 작았다.
“내게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는 편이 네게 좋지 않을까? 내가 여기서 한마디만 하면 라타에가 여신에게 버림받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
“나를 화나게 하지 마. 나는 네 생각보다는 더 미친년이라 못 할 게 없거든.”
“이런 무엄한……!”
“아양은 못 떨지언정 비위도 못 맞추진 말아야지.”
리즈벨은 그 말을 뱉으며 흘끗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몸에서 흘러나오던 성력은 차츰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앞으로 발디마르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 생각 같아서는 속국령도 해제했으면 하지만, 그건 내 오라버니랑 협상할 일이니 관여는 안 할 거야.”
말을 맺음과 동시에 성력 대신 푸르스름한 마력이 얽히기 시작했다. 익숙한 마력의 향이 코끝에 스쳤다.
리즈벨은 작게 중얼거렸다.
“부르나 보네.”
유스타프가 뭐라 더 말을 할 틈도 없이 푸른 마법진이 리즈벨의 발밑에 펼쳐졌다. 연회장에서는 보이지 않을 모습이었다.
“……!”
마법진이 빛을 발함과 동시에 성녀의 모습이 황좌 앞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온몸에 팽팽하게 들어가 있던 힘이 일시에 탁 풀렸다. 유스타프는 헛숨을 내뱉었다.
“……허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혹은…….
유스타프는 입술을 깨물며 황좌 아래의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성녀가 사라졌음에도 계단은 이전의 주홍빛을 회복하지 못했다. 선명한 금빛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
“하…… 하하.”
유스타프는 미간을 짚으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괴이한 계승식의 실질적인 승자라 하더니…….”
발디마르의 수치라 불리던 미친년이었다는 정보가 선입견을 만들었던가.
“교활한…….”
황제에게 뻔히 위협을 가하고 있는데도 황실 기사단장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 그들의 모습이 타인의 눈에 전혀 위협적으로 비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홀을 내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경외를 담은 시선들이 가득했다.
“……제기랄.”
유스타프는 다시금 이마를 짚었다.
* * *
연회장 안의 경이로운 시선 중에는 카잔의 시선도 끼어 있었다.
“와, 미친…….”
상스러운 말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의 말을 들은 이는 없는 것 같았다. 카잔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좌와 계단을 보며 감탄 어린 신음을 흘렸다.
“이래서야 진짜 헬라르의 현신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감탄하고 있을 시간 없어, 카잔.”
밀이 그를 툭 쳤다. 카잔은 간신히 성녀가 사라진 자리에서 눈을 떼었다. 함께 동석해 있던 타국의 동업자, 갈리오드 공녀가 고개를 끄덕여 신호하는 것이 보였다.
행동 개시였다.
* * *
주홍빛 휘장 뒤, 어두운 복도에 푸른 마법진이 나타났다. 마법진은 곧바로 금빛 인영을 내뱉었다.
“아시-.”
리즈벨은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아시어스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중간에서 뚝 끊겼다. 몸이 센 악력에 무참히 끌려갔다.
“아……!”
쿵. 리즈벨의 등이 벽에 세게 부딪혔다. 리즈벨은 신음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화내리라 예상은 했다. ‘사슬’이 흔들렸다.
아시어스는 그걸 용납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일단 그를 어떻게든 달래 볼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어. 나도 내 힘이 갑자기 터져 나올 줄은 몰랐…….”
리즈벨은 무어라 더 말을 이으려 했다. 꽉 짓씹힌 입술을 보지 않았다면. 헐떡이는 숨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녀는 그제야 공기 중에 옅게 풍기는 피비린내를 맡았다.
“아시…… 어스?”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를 부서뜨릴 것처럼 쥐고서, 고개를 숙이고서……. 이건 리즈벨이 예상한 아시어스의 반응이 아니었다.
“아…… 제발.”
아시어스가 처참한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그만…….”
또다시 악몽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때도 이렇게까지 식은땀을 흘리고 있지는 않았었다.
리즈벨은 이렇게 약한 그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아니, 아니다. 처음이 아니다. 피 웅덩이 한가운데 쓰러져 있던 남자.
리즈벨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그를 부르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손을 들어 아시어스의 뺨을 감쌌다. 차다.
“왜 그래. 뭘 그만해?”
리즈벨의 목소리에 서서히 다급함이 실렸다.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피비린내가 계속해서 풍겨 왔다.
“어디 다쳤어?”
황급히 그의 몸을 살펴보았지만 로브와 셔츠가 온통 검은색 일색이라 핏자국이 분간되지 않았다. 아시어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안 들리게…… 해 봐요.”
꼭 짐승이 우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붉은 마력이 팟 튀었다. 리즈벨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마력이 아시어스의 팔을 할퀴었다. 핏방울이 튀었다.
[멍청한 소년. 피투성이 아이야. 얼마 남지 않았구나.]헬라르가 비웃는 소리는 리즈벨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아시어스는 뇌를 좀먹는 그 음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 안쪽을 꽉 깨물었다. 입술 안쪽이 터지는데도 통증은 미약했다.
[내게는 보여. 네 남은 생이.]“너, 뭘 듣고 있어?”
리즈벨은 결국 아시어스의 뒷목을 잡고 제게로 끌어 내렸다. 차가운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엇나가 있던 초점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아시어스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
“…….”
“아무것도 안 들려. 여기에는 너랑 나밖에 없어.”
차분한 목소리가 끊김 없이 아시어스에게로 흘러들었다.
두개골을 쪼개 버릴 듯, 섬광처럼 내리꽂히던 여신의 음성이 뚝뚝 끊기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옛 기억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한 번 더 입술이 닿았다. 이번에는 조금 길었다. 아시어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봐.”
미세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리즈벨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나밖에 없지?”
차분한 미소. 그러나 여전히 느슨한 종속.
그는 당길 수 없다. 당겨지지 않았다. 아시어스는 남은 정신을 끌어모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도망갈 거예요?”
“뭐?”
리즈벨은 멈칫했다. 유리알에 가려지지 않은 삭막한 회색빛 눈이 사나운 빛을 띠고 일렁였다.
“갈 거야?”
리즈벨은 그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떠나야지. 이 유리 새장에서 평생 살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나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리즈벨이 망설이는 그 짧은 시간.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아시어스의 손이 미끄러지듯 떨어져 내렸다.
“잠깐만…….”
리즈벨은 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위잉-.
그 순간, 무언가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
위화감을 느낀 리즈벨이 확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방금까지 기대고 있던 벽에 쓰인 검은 글자를 보았다.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질 낮은 장난질인가 싶어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아시어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
“뭐야?”
리즈벨조차 이번에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휘황한 흰색 빛이 눈을 찌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휙 자취를 감추었다.
리즈벨은 황망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까지 휘장 뒤편, 반쯤 어둠에 먹힌 공간 속에 있었는데…….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전혀 다른 장소였다. 황성 안인지도 알 수 없는, 낡은 오두막 안. 층의 구분은 없었다. 천장은 곧 지붕이었다. 방금까지 등을 기대고 있던 벽. 그 벽은 더 이상 정교하고 화려한 황성의 상앗빛 벽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글자만은 같았다.
낡은 통나무 벽에 쓰인 검은 글자. 여전히 읽을 수 없는 글자였다. 문자인지 그림인지도 불확실했다. 다음 순간, 검은 글자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파슥, 파스슥.
리즈벨은 인상을 찡그리며 다 부서져 가는 나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얼음 조각이 발에 차였다. 물도 없는 건조한 곳에서 얼음이라. 몸을 긴장시킨 순간, 무언가가 리즈벨을 향해 쇄도했다.
쇄애애액-.
“……!”
금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허공에 나풀거렸다. 리즈벨이 조금만 늦게 그 공격을 알아챘더라면 목이 꿰뚫렸을 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달려드는 누군가의 존재를 감지했고,
휘릭.
성력은 그녀의 의지에 충실히 반응했다.
서걱. 성력이 갈퀴처럼 무언가를 베어 냈다. 빠르게 돌아선 시야에 보인 것은 얼음으로 된 뾰족한 창이었다. 그리고 붉은 머리카락.
“아, 이런.”
얼음의 창을 쥔 것은 처음 보는 선 낯선 사내였다. 벽에 쓰인 것과 비슷한 검은 글자가 창끝에 둥글게 떠올라 있었다.
“정말…… 미인이시네요.”
불한상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