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73
74화
“넌 뭐야?”
말은 날카롭게 나갔다. 리즈벨은 급작스레 몰려오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시어스를 그대로 두고 오면 안 될 것 같았는데.
붉은 머리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이름까지 아실 필요는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공격은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다. 번개 같은 속도로 성력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심장을 향해 곧바로 찌르고 들어온다.
“……!”
리즈벨은 참아 왔던 감정들이 일순간에 터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 웬…….”
발디마르의 성벽과 돌바닥을 깨부쉈던 낫 형태의 성력이 가감 없이 튀어나왔다. 얼음으로 된 창끝을 베어 방향을 꺾고 옆으로 내리꽂았다.
콰앙-.
“큭!”
창이 허공으로 높이 튕겨 올라갔다. 붉은 머리가 벽에 처박히며 오두막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부옇게 파편과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 순간, 리즈벨의 머릿속을 뚫고 튀어나온 것은 그날의 기억이었다. 지칼과 루시페를 단죄하던 날. 그리고 바로 조금 전 되새겼던 진리.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한다.
천장까지 높게 솟구쳤던 얼음 창이 리즈벨의 손안으로 떨어졌다. 창은 그녀의 손에 닿자마자 금빛으로 물들었다.
“어디서 웬 쥐새끼가 튀어나와서.”
초조함과 당황이 섞이자 짜증이 튀어나왔다. 리즈벨은 지금까지 쓰고 있던 유리 가면을 벗어 버리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다시 묻는데, 너. 누구야?”
리즈벨의 뒤편으로 떠오른 거대한 금빛 낫이 굉음과 함께 바닥을 할퀴자 쩌적 하고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그 균열을 타고 금빛 성력이 수십 갈래로 뻗어 나갔다.
“망할.”
카잔이 숨을 삼키며 뒤로 풀쩍 물러났다.
“밀!”
그러나 그의 외침은 한 박자 늦었다. 동료들을 돌아보았을 때, 카잔은 기막힌 광경을 목격했다.
“크헉…….”
갈래갈래 찢어진 성력이 마치 단단한 사슬처럼 동료들의 몸을 억죄고 있었다. 그 채로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콰앙-.
성력의 줄기에 붙잡힌 열 개의 몸이 뒤흔들리는 오두막의 양옆 벽에 동시에 메다 꽂혔다.
“……!”
카잔은 숨을 집어삼켰다.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려고 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이 바닥에 붙어 버렸다.
“헉…….”
목덜미에 싸늘한 무언가가 닿았다. 굳이 돌아볼 필요도 없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그의 창이었다. 이제는 금빛으로 변해 버린, 녹지 않는 얼음 창.
창끝이 카잔의 목덜미를 찔렀다. 조금만 더 힘이 들어가면 그대로 목이 꿰뚫릴 위기였다.
‘꿰뚫어 버릴까.’
실제로 리즈벨은 고민했다. 그녀를 죽이려 시도한 자에게 자비는 없다. 사치다. 위협을 가한 자들의 생은 그녀 손으로 거두어 주는 게 맞았다. 그것이 발디마르의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리즈벨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길게 호흡했다.
“왕족의 광기…….”
사고를 물들였던 짙은 살의가 한 꺼풀 벗겨졌다. 이성이 돌아왔다. 배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부터 볼 필요는 없다. 아니, 배후를 안다고 하더라도…….
생을 빼앗는 걸 그렇게 가벼이 여길 필요는 없는 건데. 리즈벨은 착잡한 숨을 삼키며 얼음 창을 꽉 쥐었다.
“누가 보냈어?”
카잔은 목 뒤에서 들려오는 냉소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침을 삼켰다. 계획이 틀어졌다.
실패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은 일은 단 하나였다.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오른쪽 벽 끝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
몸을 뒤틀어 손목에 새긴 문신을 누르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매달려 있던 벽과 함께 산 자의 육신이 폭발했다.
몸과 함께 벽도 부서져 내렸다. 오두막 전체가 또 한 번 뒤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선명히 들려오는…….
퍽. 인간의 머리가 터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
시뻘건 피보라가 일었다. 반쯤 무너진 벽의 잔해물들 사이로 언뜻 보이는 살점들. 찢겨 나온 몸의 부분들.
반대쪽 벽에서 한 번 더 폭발음이 터져 고막을 강타했다. 피와 뇌수가 섞인 질척한 액체가 벽과 천장에 흩뿌려졌다. 이번만큼은 리즈벨도 진심으로 당황했다.
“자폭……?”
“제기랄.”
카잔은 더 생각할 것 없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성녀와 가장 가까이 있는 그가 주의를 끌면 나머지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팔뚝 안쪽에 새겨진 검은 글자가 불빛 아래 또렷이 드러났다. 카잔에게는 불행하게도, 그 모습은 리즈벨의 눈에 정확히 포착되었다.
리즈벨은 굳이 말로 그를 멈춰 세우지 않았다.
퍼억.
“컥.”
성력으로 강화된 창이 카잔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막 제 손목의 문신을 누르려던 카잔이 휘청거렸다.
“내 손으로 죽이지 않는다는 게…….”
동시에 리즈벨은 아직 자폭하지 않은 여덟 명의 목에 휘감긴 성력의 줄기들을 확 당겼다. 단번에 의식을 날려 버릴 정도로 센 충격이 그들의 머리를 내리쳤다.
콰득.
리즈벨은 마지막으로 얼음 창을 쓰러진 카잔의 얼굴 옆에 박아 넣으며 씹어뱉었다.
“너희 멋대로 죽어 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어.”
황성에 침입한 ‘이단자들’이 기절하기 직전 들은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툭.
리즈벨은 카잔의 몸을 구두 신은 발로 툭 건드렸다. 기절한 사내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상대가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한 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빛 성력이 속박해 놓은 자들은 총 여덟 명이었다.
두 명은 스스로 자폭하여 죽어 버렸다. 리즈벨은 죽어 버린 두 명에 대해 그다지 대단한 감상을 느끼지는 못했다. 벽 한쪽이 거의 부서지다시피 한 오두막은 조심스러운 걸음에도 끼익거리며 위태로운 소리를 냈다.
오두막의 문은 걸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그러나 리즈벨이 손에 쥔 창끝으로 걸쇠를 쿡 찌르자, 문의 빗장 전체가 와스스 얼음 조각이 되어 부서져 내렸다.
리즈벨은 큰 어려움 없이 오두막을 나섰다. 더 이상의 술수가 걸려 있진 않았는지, 그녀는 곧바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주위를 둘러싼 풍경이 낯이 익었다. 바로 며칠 전, 아시어스가 돌아오던 날 오후에 티스의 손을 잡고 걸었던 에엘의 거리와 비슷했다. 그 거리보다는 훨씬 폭이 좁았고 길도 울퉁불퉁했지만…….
“…….”
푸른 눈이 길가에 가득 피어난 붉은 코스모스를 담았다. 에엘의 거리가 확실했다. 나온 것이다. 황성에서도, 그리고 마탑에서도.
리즈벨은 홀린 듯 앞으로 걸어 나갔다. 깊은 밤이 내려앉은 거리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도 없었다.
금빛 성력이 그녀가 딛는 땅을 금빛으로 물들이며 그녀를 뒤쫓아 왔다. 종속은 여전히 느슨해져 있었다.
지금껏 ‘묶여 있다’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사슬이 느슨해지고 나니 숨이 탁 트이며 드디어 풀려났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영혼을 묶고 있는 사슬을 조금만 더 당기면, 그러면 이대로 끊어지리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붉은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자유…….”
금빛 성력은 점점 더 그녀의 몸을 짙게 감싸고 있었다.
[드디어 풀려났구나. 사랑스러운 리즈벨.]그리고 머릿속으로 곧장 내리꽂히는 목소리.
[그간 답답했지? 이리 오렴.]달콤하게 유혹하는 여신의 목소리.
리즈벨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마침내 눈앞에 그녀가 아는 풍경이 나타났다.
첸 강 하구, 에엘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는 아치 모양의 돌다리였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타다 남은 재 같은 회색 눈. 도무지 인간 같지 않게 정교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감정이 죄 읽히는 얼굴.
그녀를 쾌락에 젖어 울게 하고, 매번 그녀를 끌어안고 죽은 듯 잠드는 남자. 그리고…….
어둠에 잠겨 있던 혼의 세계. 폐허 속에 쓰러져 있던 누군가의 피투성이 등.
[이리 와, 리즈벨. 그놈은 버려두고.]여신이 재촉했다. 리즈벨은 그 음성을 무시하고 연인의 다리 한중간에 올라섰다.
석양을 반사하던 어느 날과는 달리, 지금 첸 강은 은은한 달빛에 잠겨 있었다. 아치형의 다리 아래에 붉은 코스모스가 가득 피었다.
“뭐가 가장 아름답던가요?”
아시어스가 그렇게 물었었다. 어떻게 대답했더라.
“거리에 가을꽃이 만발해 있더라. 티스가 코스모스라고 알려 줬어.”
“예뻤겠네요. 꼭 당신처럼.”
“그래. 꼭 너처럼.”
주고받았던 짧고 일상적인 대화.
[어리석은 소년. 영혼이 갈래갈래 찢겨 죽겠지. 멍청한 것.]헬라르는 이제 다른 누군가에게 음성을 내려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듣는 이가 누구인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정말 딱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한 음성으로 여신이 말했다.
[너는 네 아비가 그랬듯, 네 형제가 그랬듯 처참하게 죽어 갈 거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