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76
77화
리즈벨의 검지가 정확히 카잔을 가리켰다. 그의 시린 하늘색 눈이 리즈벨을 향했다.
카잔의 눈매가 장난스럽게 휘었다.
“짐짝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예쁜 성녀님.”
리즈벨은 굳이 대꾸해 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카잔의 몸을 묶은 성력을 파악하기 위해 그쪽으로 한 발 뗀 차였다.
“그런데 왕녀님.”
에릴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리즈벨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혹시, 마탑주와 다투셨습니까?”
에릴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리즈벨은 작게 실소했다.
“어떻게 알았어?”
“어쩐지 분위기가 좀…….”
에릴은 차마 탄신 연회의 밤에 사라진 성녀를 뒤쫓다 성녀와 마탑주가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을 목격해 버렸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둘 다 서로를 죽여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맹렬하게 노려보던 것도. 그런 주제에 둘 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던 것도.
내용은 막돼먹었을지언정 구사하는 화법만은 우아하던 마탑주가 반말을 쓰는 것도, 늘 차분하고 이성적이던 성녀가 그만큼 목소리를 높여 쏘아붙이는 것도 에릴은 처음 보았다.
심지어 둘은 에릴이 복도 코너 끝에서 멍청하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무려 마탑주와 헬라르의 성녀가 타인의 기척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말다툼에 열을 올렸다?
‘그게 무슨…….’
게다가 마탑주를 두고 뒤돌아서는 성녀의 눈꼬리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들의 기세가 하도 흉흉해 에릴은 감히 말을 붙이지도 못했다. 하지만 분명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다.
에릴이 빠르게 그녀를 따라 성녀를 찾던 기사들을 물렸기에 그 다툼 소리를 들은 것은 에릴 혼자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갑작스레 복도에 나타난 성녀가 했던 말들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들었다.
“나는 네 거잖아.”
그 말이 연인들 사이의 다정한 속박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말 그대로 지배 관계를 나타내는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다만 전자와 후자 어느 쪽이라 해도 문제였다. 라타에가 아니라 대륙 전체의 힘의 균형이 뒤흔들리는 일인 것이다.
“관심 둘 필요 없는 일이야.”
그렇게 말하는 리즈벨의 얼굴은 서늘했다. 에릴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둘 사이에 뭐가 있다는 건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서로를 보는 눈빛부터가 발디마르에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게다가 대체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성녀에게서 흐르는 마력의 향이며,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는 언행이며…….
가벼운 접촉에서도 농밀한 분위기가 줄줄 흐르는데 눈치채지 못하면 바보가 아닌가. 대륙을 손쉽게 제패할 만한 강자 둘이서 사랑싸움을 하고 있다는 건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제국에 국한된 게 아니라 가히 대륙적인 스캔들이 아닌가!
에릴은 슬쩍 리즈벨의 눈치를 보며 운을 뗐다.
“두 분…… 아무리 그러셔도, 육탄전까지 가셔선 안 된다는 건 아실 테지요?”
“뭐?”
리즈벨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러나 에릴은 진지했다. 그녀는 남녀의 개인사를 굳이 황제에게 일러바칠 정도로 눈치와 융통성이 부족하진 않았다.
그러나 남녀가 아니라 성녀와 마탑주의 문제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둘이 정말 제대로 싸운다면 에엘 전체가 으깬 감자처럼 짜부라지는 덴 반나절도 안 걸릴 것이다.
그러는 날에는 주군에게 위장약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는 턱도 없을지도 몰랐다.
리즈벨은 망설이는 기사의 눈에서 그 기색을 쉽게 파악했다. 그녀는 단호하게 확언했다.
“걱정 마. 우리 둘 사이의 일이고, 그것이 라타에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없을 거야. 그 정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 말에 에릴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그 쓸데없이 우아한 망나니 같은 마탑주는 그렇다 치더라도, 눈앞의 성녀는 감정적으로 극단까지 치닫는 일은 없으리라.
‘그렇겠지……?’
리즈벨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제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생글생글 웃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싸늘함이었다.
‘그런 걸까…….’
에릴에게는 그저 간절히 믿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 * *
같은 시간, 라제는 아시어스를 달래고 있었다.
“리즈벨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네가 거기서 다짜고짜 화를 낸 건 네 잘못이 맞아.”
“누가 뭐래?”
아시어스가 비딱하게 대꾸했다.
“나도 알아. 내가 잘한 거 없다는 거.”
“그럼 가서 사과해. 미안하다고 빌어.”
“싫어.”
“왜 싫은데?”
“리즈벨이 한 말을 인정하는 게 싫어.”
“내가 왜 네 잘난 복수를 위해서 목숨을 희생해 줘야 해? 처음부터 그럴 생각 없었어.”
그날 그 여자는 그의 치부를 잔인하게도 들쑤셨다. 제가 퍼부은 폭언의 맞대응이라는 걸 알아도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넌 내가 널 갖고 놀다 버려도 나한테 매달려야 해. 나를 통해 이뤄야 하는 게 있으니까. 복수해야 하잖아? 아시어스.”
사실 그 말이 백번 맞았다. 리즈벨이 마음만 먹으면 영혼의 종속을 끊고 달아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체감한 이후, 그와 그녀의 우위 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놓칠 수가 없으면 가서 빌어야지. 그건 별거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되짚어 보니 잘못한 건 그가 맞았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버팅기고 있는 건 순전히 제 못된 심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 마음이라는 게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법이 있던가.
아시어스는 제게 날카롭게 쏘아붙이던 리즈벨의 말투와 표정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평생을 바란 목표가, 헬라르를 향한 복수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당하는 건. 그건 그가 복수를 위해 살아온 100여 년의 세월을, 그의 과거를, 온몸에 깊게 밴 흉터만큼이나 깊은 감정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문득 서러워졌다. 잿빛 눈이 처연한 빛을 품고 밑으로 떨구어졌다.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가, 형이, 누이가, 어떤 꼴로 차례차례 죽어 갔는지도 모르면서. 아니, 그녀의 말마따나 제가 말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 치더라도.
그 자신의 몸에 남은 흉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을 거면서…….
라제가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래, 네가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라제의 말끝에는 결국 약간의 웃음기가 섞였다.
“말과 행동을 반이라도 일치시키고 그런 말을 해봐라, 좀.”
아시어스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는 평소의 습관처럼 창틀 위에 올라앉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중이었다.
마탑을 방문한 에릴 테사와 리즈벨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혹시 마탑주와 다투셨습니까?”
“어떻게 알았어?”
“어쩐지 분위기가 좀…….”
아시어스는 리즈벨이 답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숨조차 죽였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한참이나 들려오지 않았다.
리즈벨이 뭐라 변명이라도 했다면 이 뒤틀린 심사가 좀 나아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고집스럽게도 침묵했다. 속이 꽈배기처럼 배배 꼬였다.
리즈벨은 절대로 그에게 먼저 말을 붙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온 신경을 곤두세워서 여자의 기척이며 숨소리까지 읽어 내는 것과는 반대로, 리즈벨은 정말 저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어쩌다 마주쳐도 냉기 뚝뚝 흐르는 눈으로 쌩하니 돌아서 버리기 일쑤였다.
아시어스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왜 나만 안달이지?”
“네가 더 좋아하나 보지.”
“닥쳐. 사랑 같은 건 안 해. 못 해.”
“누가 사랑이래? 네가 더 몸이 달았단 얘기지.”
라제의 빙글거림에 아시어스는 그를 향해 몇 마디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더 엿 같은 건, 암만 머리를 굴려도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벌써 일주일째 그녀를 안지 못했다. 달짝지근한 살갗과 체향이 주는 쾌락에 푹 길든 남자에게는 가히 인고의 시간이었다. 게다가 리즈벨을 안지 못했다는 건 곧 불면의 밤이 다시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아시어스는 근 일주일간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잠을 못 자는 거야 지난 수십 년 동안 늘 그랬으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너무 길들었어.”
아시어스는 그제야 제 과실을 알아차렸다. 그간 너무 의지했다.
이러다간 꼴사납게 먼저 굽히고 들어가 제발 좀 재워 달라고 애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라제가 빈정거렸다.
“고집부리긴. 그냥 가서 키스해 달라고 하면 될 것을.”
“닥쳐. 좀. 제발.”
아시어스는 마른 얼굴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창틀에서 휙 내려섰다. 번민의 시간에는 늘 그랬듯 몸이라도 풀고 와야 할 것 같았다.
“저거, 또 아무나 붙잡고 시비 걸려고…….”
라제는 아시어스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푸른 마력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아무래도 저 멍청이를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다.
아시어스는 기본적으로 제멋대로에 속내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인간인 것과는 별개로 과거에 대해서는 미련하리만치 고집스러웠다.
혼자 두면 또 안쓰러울 정도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갈 게 뻔해서, 결국 라제는 몸소 나서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