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77
78화
그길로 황금빛 피부의 소년은 아시어스의 방을 나섰다.
“야, 인간. 거기 서 봐.”
“라이제스 님?”
그리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막 마탑을 나설 채비를 하던 라타에의 기사를 붙들었다.
* * *
“내 생각에 방법은 딱 하나야.”
라제가 심드렁하게 지껄였다.
“둘은 붙여 놓으면 돼. 억지로라도. 그럼 알아서 해결될 거야.”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에릴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라제가 당연하다는 듯 눈을 치떴다.
“야, 남녀가 비좁은 공간에 붙어 있으면 다 해결되는 거야.”
“세상에, 라이제스 님!”
에릴이 단번에 기겁했다.
“마탑주야 방종하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왕녀님은 성녀입니다!”
“성인이라고 순결해야 한단 법 있어?”
라제가 단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정했는데?”
에릴은 입을 다물었다. 정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리가 없다. 수천 년 역사에서 성녀는 늘 고결하고 순수한 존재였으니까.
라이제스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협조할 거야, 말 거야?”
에릴은 몹시 할 말 많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유스타프가 이 사실을 알면 이번에야말로 기절할 게 뻔했다. 대체 주군에게 입을 다물어야 하는 사안이 얼마나 더 있는 건가.
하지만 애초에 주군이 기절할 일이 없게 감쪽같이 봉합하는 것도 충성스러운 기사의 소임일 것이다.
결국 에릴은 대충 그렇게 생각을 봉합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불만 붙여 놓고 알아서 타오르게 두면 된다, 이 말씀입니까?”
“그래, 그래.”
“짐승도 아니고, 무슨……. 아, 물론 마탑주 말입니다.”
그러나 에릴은 곧 제 향을 리즈벨에게 잔뜩 묻혀 두었던 남자의 작태를 상기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효과적인 방법인 것처럼 보였다.
라제가 심드렁하게 에릴에게 손을 까딱까딱했다.
“바일은 늘 아시어스 곁에 붙어 있고, 리즈벨이 요즘 들어선 나나 티스도 잘 안 보려 하니까 네가 제격이다.”
라제는 에릴의 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 * *
리즈벨은 근 며칠간 끊임없이 탄신 연회의 밤에 일어났던 일들을 되풀이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라고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폭언을 쏟아부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 말을 하지는 말걸.’
아시어스의 과거가 그의 역린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정작 자신은 황제가 그녀의 역린인 로제스를 건드렸을 때 그렇게 반응한 주제에, 타인을 같은 방식으로 건드려서는 안 됐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역시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면 그냥 나랑 하는 섹스가 좋아서?”
새삼스럽게 상처받을 것 없는 말이었는데도. 솔직히 아시어스가 없는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가 아시어스를 유혹한 이유도 그가 말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를 유혹해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 목적을 잊고 있었더라.
어쩌면 말려 들어 간 건 그녀 쪽일지도 몰랐다. 대단히 큰 착각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그가 내비치는 다정함이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그녀가 그를 택했다고 말하면 그가 안심하고, 웃어 줄 거라고.
하지만 그들 사이에 있는 건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아시어스의 말대로 살을 맞댔던 그 몇 번의 밤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뭘 바란 거지? 실망했다면 대체 어디에?
절절한 사랑 고백이라도 바랐나?
……아, 그랬나 보다. 리즈벨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아시어스가 그녀와 같은 마음을 돌려줄 거라고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자유를 등진 것처럼 그도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버려 줄 줄 알았나 보다.
‘정신 차리자.’
그 남자는 언젠가는 그녀를 죽이려 들 텐데. 기대할 게 따로 있지. 리즈벨은 그때 그녀를 움직였던 감정을 순간의 흔들림으로, 그날의 모든 행동을 기행으로 치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더는 흔들리지 말자. 이 탑에 처음 들어오던 날 결심했듯 기회가 오면 지체하지 말고 도망가자. 그리고 꼭 운명의 장난처럼, 그녀의 앞에는 꼭 그녀를 위해 안배된 것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캬. 이거 참 살다 살다.”
에릴이 두고 간 붉은 머리의 남자는 유유자적한 태도로 주위를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었다.
“저 같은 놈이 마탑에도 다 들어와 보고 말입니다. 가문의 영광인데요.”
리즈벨은 침묵을 지키며 그를 한참이나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남자가 빙글빙글 웃었다.
“제가 좀 생겼나 봅니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시는 걸 보니.”
말투가 아주 경박했다. 리즈벨은 손가락을 까딱했다.
“뒤돌아봐.”
“예엡.”
카잔은 순순히 돌아섰다. 리즈벨은 등 뒤에서 교차되어 묶인 그의 팔을 확인했다. 손목 부근에 새겨진 검은 글자가 보였다.
“고향이 어디야?”
“없습니다. 거리에서 난 놈이라.”
대답은 거침없었다. 리즈벨은 다시 물었다.
“네 손목에 새겨져 있는 그 글자. 그리고 황성 벽에 쓰여 있던 글자. 마법은 아닌 것 같던데, 무슨 힘이지?”
“모릅니다.”
이번에도 즉답이 돌아왔다. 남자는 뒤돌아서 있었기 때문에 리즈벨은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황성에는 어떻게 침입했어?”
“어느 상냥하고 아리따운 아가씨의 인도로?”
리즈벨은 피식 웃었다.
“아는 게 없구나.”
“말씀드렸다시피, 길에서 난 놈이라서요.”
“그럼 내가 말해 볼까?”
“예?”
카잔이 뭐라 반문하기도 전에 리즈벨의 걸음이 떨어졌다.
한 발짝.
카잔은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몸을 흠칫 굳혔다. 바로 이틀 전에 그를 압도했던 여자의 기운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것이 성력의 위압감인 줄 알았는데…….
“첫째.”
서늘한 목소리가 고막을 후벼 팠다.
“헬라르를 믿지 않는 이단자. 왜 믿지 않을까? 여신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지. 따로 섬기는 신앙이 있다는 이야기겠구나.”
“…….”
“둘째, 잡히느니 죽음을 택한다. 그것은 곧 무엇을 믿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결코 들켜서는 안 되는 자들이라는 뜻이겠고.”
리즈벨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카잔은 뻣뻣하게 굳어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마지막 셋째, 얼음의 창과 공간 전체를 감싸고 있던 얇은 살얼음.”
“……!”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은 당연한 진리일 텐데……. 그곳에는 물기 한 점 없었지. 그러니 그것들은 본래 ‘녹지 않는 얼음’.”
리즈벨의 입술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검지 끝이 카잔의 몸을 묶은 금빛 성력을 톡, 건드렸다.
“이 세 가지 사실을 종합하면…….”
이 대륙에서, 녹지 않는 얼음으로 뒤덮여 있으며, 이상하리만치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 있고. 헬라르의 권능이 닿지 않는 유일한 땅.
리즈벨은 얼어붙은 남자에게 속삭였다.
“아스테르반.”
“…….”
“그곳에서 온 이단자들, 맞지?”
카잔이 쉰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고개만 돌려 리즈벨을 돌아보는 새파란 눈에는 종전까지의 장난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역시 그날 죽었어야 했나.”
긍정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리즈벨은 상냥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는 내 허락 없이는 죽을 수 없어.”
아스테르반. 겔오르의 눈이라고 불리는 대륙 최북단의 섬. 몇 달 전 그녀가 도망할 곳으로 점찍어 두었던 땅이었다.
리즈벨은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너 참 시기적절하게 내 눈앞에 나타났구나.”
새파란 얼음을 닮은 남자의 눈동자에 적개심이 타올랐다. 그가 입 모양으로 중얼거린 기이한 언어가 번쩍하고 힘을 발했다. 그러나 그의 몸을 두껍게 감싼 성력에 금세 허공으로 와해했다.
리즈벨은 단조롭게 말했다.
“소용없어. 나도 못 푸는 걸 네가 어떻게 풀겠니.”
카잔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리즈벨은 그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그 땅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기를 바라. 아스테르반의 모든 비밀. 그리고…….”
“…….”
“그곳으로 가는 방법.”
웃는 와중에도 속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 꼭 모든 것이 그녀를 이 마탑 밖으로 등 떠미는 것 같았다.
* * *
리즈벨의 확신과는 달리,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리 만만하지가 않았다. 그녀가 그의 출신을 꿰뚫어 본 즉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능글맞은 웃음기가 싹 빠진 얼굴은 답답할만큼 고집스러웠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에는 입을 절대 열지 않으리라는 굳은 의지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리즈벨 역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