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78
79화
그녀는 집념이 아주 강한 편이었다. 애초에 리즈벨이 카잔을 회유할 방법은 차고 넘쳤다. 굳이 목숨을 위협하며 협박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가 그녀와 이야기할 생각이 있을 때의 이야기가 아닌가.
“나랑 한 마디도 안 할 거야, 정말?”
“…….”
“내 얘기를 들어 볼 생각도 없어?”
“…….”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다. 리즈벨은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얼음처럼 새파랗고 투명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그마저도 남자가 고집스레 시선을 피하는 통에 쉽지 않았다.
“너 이름은 뭐야?”
“…….”
“야.”
이제는 오기가 치밀었다. 이 인간은 멍청한 건가, 아니면 멍청하게 굴어야 할 정도로 그가 가진 비밀이 중요한 건가. 그런데 아무래도 전자 같았다.
리즈벨이 짜증을 참으며 막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감각에 익숙한 기운이 닿았다.
“……!”
리즈벨은 그녀를 할퀴는 기시감에 홱 뒤를 돌아보았다. 방 안에는 그와 이단자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스쳐 간 기운도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분명히 일전에 느껴 본 적 있었다. 몇 주 전 마지막으로 티스와 에엘의 거리를 걷던 날. 연인의 다리 앞에서, 그녀는 마법사의 존재감을 또렷하게 잡아낸 적이 있다.
리즈벨의 푸른 눈이 창가에 못 박혔다. 아시어스가 공간을 이동할 때 으레 남곤 하는 푸른 마력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녀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없었다.
정말로 없다고? 리즈벨은 큰 보폭으로 창가로 다가가 거침없이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아시…….”
막 그 이름을 발음하던 순간, 리즈벨은 지금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인식했다. 그녀는 창틀에 손을 짚은 채로 뻣뻣하게 굳었다.
찾고 있다. 내가. 그 남자를.
“…….”
리즈벨은 한참이나 창문 아래에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마법사가 침대보며 캐노피의 색깔까지 하나하나 다 고르며 꾸며 놓은 방 안에서, 황량한 바깥 풍경 대신 마법으로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가을의 정원을. 그리고 동시에 떠올렸다.
그녀가 도망치리라 마음먹은 차가운 얼음의 땅을. 그 땅으로 그녀를 인도해 줄지도 모르는 낯선 이방인을.
저 남자를 회유하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 혀끝이 썼다.
리즈벨은 한참이나 정원을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미약한 두통에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
아시어스는 숨을 멈추고 있었다.
리즈벨이 바로 코앞에 있는 바람에 감히 숨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아주 잠깐 몸을 움직인 정도로 귀신같이 제 기척을 잡아내다니.
아시어스는 막 몸을 풀고 온 참이었다. 몸을 푼다고 해 봤자 라타에에서는 대단위 마법을 멋대로 구현할 수도 없었으므로, 날붙이나 좀 만지다 지나가는 시정잡배를 몇 대 두들겨 주는 데서 그쳤다.
물론 그딴 걸로는 몸도 마음도 전혀 풀리지 않으리란 걸 이미 경험으로 알기는 했다. 그러니 결국엔 관성처럼 리즈벨의 방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사과까지는 못 해도 말이라도 몇 마디 섞어 보자.’
그러나 아시어스는 몰래 방 안으로 이동한 순간 몹시도 기가 막힌 광경을 목격했다.
그녀의 방에 웬 남자가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의 젊은 청년이었다. 게다가 리즈벨은 답지 않게 열성적인 자세로 그 남자에게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
몹시 다정하고 나긋하게 별명 비슷한 것으로 그 남자를 부르면서. 실상이야 전혀 달랐지만 어쨌든 아시어스의 귀에는 그게 아주 달콤한 애칭으로 들렸다.
리즈벨이 살풋 눈매를 접으며 말했다.
“나랑 깊은 이야기 한번 안 해 볼래?”
깊은, 뭐? 뭔 이야기?
아시어스의 얼굴에 쩍 균열이 일었다. 몸을 풀고 온 게 의미도 없이 다시 속이 쭉 비틀렸다. 비틀리다 어디선가 불꽃이라도 옮겨 붙었는지 타닥타닥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깊은 이야기. 무슨 이야기?
리즈벨이 연고도 없는 이 라타에에 자신 외에 아는 남자가 누가 있으며, 깊은 이야기란 대체 뭘 의미하며, 애초에 저자는 왜 그의 탑에 당당히 침입해 있는가? 그리고 리즈벨은 왜 저자에게 웃어 주는가? 저렇게 예쁘게!
‘누구는 지금 일주일째 잠도 못 자고 있는데…….’
저 매정한 왕녀는 정말로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밤 상대로 생각이나 해 주면 다행이겠다!
들으란 듯이 코웃음이라도 크게 쳐 줄까, 고민하다가 아시어스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디, 얼마나 더 하나 보자. 아시어스는 아주 심술궂은 표정으로 창틀 위에 자리를 잡았다.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손등에 턱까지 괸 채, 아시어스는 리즈벨과 붉은 머리 남자의 대면을 당당히 엿보기 시작했다.
“나랑 한 마디도 안 할 거야, 정말?”
그런데 갈수록 가관이었다.
“내 얘기를 들어 볼 생각도 없어?”
“…….”
“너 이름은 뭐야?”
아시어스는 약간 황망한 기분으로 리즈벨이 낯선 남자 앞에 쪼그려 앉아 열심히 말을 붙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주일간 자신 쪽으로는 눈길도 안 준 여자가 다른 남자를 붙들고 말을 걸고 있다. 그 사실에 저도 모르게 발끈했던 게 분명했다.
그의 주위를 늘 휘돌고 있는 마력이 순간 톡 튀었다. 아차 하는 순간, 리즈벨과 눈이 마주쳤다.
“……!”
여자는 정확히 그가 앉은 창가를 직시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정확히 그를. 그의 눈을…….
시선이 마주쳤다. 물론 리즈벨은 그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그의 몸은 투명한 장막으로 단단히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어붙은 아시어스가 차마 다시 마력을 엮기도 전에 창가에 다다른 그녀가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아시어스는 헛숨을 집어삼키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 순간, 가느다란 손이 바로 그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비껴간 손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푸른 눈이 창밖과 창틀 위를 휙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아시어스의 어깨 언저리를 스쳤다가 몸으로 내려가고,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심장만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 박동 소리가 타인에게까지 닿을 수도 있던가?
리즈벨은 한참이나 미동도 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덕에 아시어스 역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댈 곳도 없이 몸을 뒤로 물린 자세가 어정쩡했으나 불편함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 상태로 영겁 같은 시간이 흘렀다. 아시어스는 문득 이 상황이 굉장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그림 같다. 움직임도 감정도 없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명화.
잿빛 눈이 여자의 섬세한 얼굴선을 느리게 훑고 지나갔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겠다.
그녀는 그의 존재를 모르고, 그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딱 지금 이 상태로.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저 얼굴만 하염없이, 영원히 보고만 있어도 괜찮겠다는…….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던 것 같다.
“……후.”
그러나 리즈벨이 짧은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영원 같던 고요는 깨졌다.
그녀는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이마를 꾹 누르고는 그를 등졌다.
아시어스는 그제야 저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간신히 실낱같은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올 거야. 기다리고 있어.”
그러나 붉은 머리 남자에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 속이 들들 끓기 시작했다.
기다리란 말은 곧 다시 오겠다는 이야기 아닌가?
리즈벨의 발소리가 문밖으로 멀어지고 이내 들리지 않게 되자, 아시어스는 제 모습을 가리고 있던 장막을 휙 집어치웠다.
“뭐, 뭐야?”
붉은 머리의 남자가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시어스는 꼭 조금 전에 그가 쥐어 패고 온 시정잡배 같은 껄렁껄렁한 어조로 물었다.
“너, 뭡니까?”
“예에? 뭐긴, 인간인데요.”
상대는 금방 여유를 찾고 유들거렸다.
아시어스는 그 한마디로 남자와 말을 섞을 생각을 집어치웠다. 그는 몹시 우아하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나는 이런 걸 내 탑에 초대한 적이 없는데.”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잔의 발치에 푸른 마법진이 엮였다.
카잔이 억 소리를 내기도 전에 마력이 발동했다.
남자의 모습이 리즈벨의 방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시어스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