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79
80화
* * *
“왕녀님.”
마탑의 기괴하게 꼬인 복도를 멍하니 걷던 리즈벨을 불러 세운 것은 에릴이었다.
리즈벨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안 갔어?”
“아, 네. 막 돌아가려던 참인데…….”
에릴은 침착하게 라제가 시킨 대로 대사를 줄줄 외었다.
“아무래도 나머지 포로들을 마탑에 두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마탑주께도 허락을 받았고, 혹여 그 붉은 머리의 남자로 부족하시다면 개의치 말고 나머지 포로로 실험해 보셔도 됩니다.”
“아, 응.”
리즈벨은 별다른 의심 없이 수긍했다. 뭐, 붉은 머리가 정 입을 열지 않는다면 다른 이단자를 데려다 심문하면 될 일이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에릴이 흘끗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나머지 이단자들은…… 저쪽 계단 위의 골방에 넣어 두었습니다.”
리즈벨은 에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층 구분이 무의미한 마탑에서 장소를 구분하는 지점은 계단이었다.
에릴은 그녀의 방과 아시어스의 방을 연결하는 계단 중간에 난 작은 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리즈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사슬을 끊어 낼 방법을 찾으면 연락할게.”
“예.”
에릴은 예를 취하고 돌아서는 순간까지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정말 이런 방법으로 해결이 되는 건가. 모르겠다.
에릴은 리즈벨이 다시 복도를 가볍게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어찌 되든 주군께는 일언반구도 않아야겠다고. 물론 에릴의 고뇌나, 에릴과 라제라는 뜬금없는 조합이 구상해 낸 해괴한 작전에 대해 리즈벨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거슬려.’
자꾸만 속 시원히 내려가지 않는 가시 하나가 목구멍 언저리를 콕콕 찔렀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계획이 전부 그려져 있었다.
발디마르에 있었을 때부터 생각했던 계획이라 구태여 머리를 굴릴 것도 없었다. 도망치는 장소가 발디마르 왕성에서 라타에 마탑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심지어 마탑은 라타에의 북쪽에 있었다. 라타에 자체도 대륙 북쪽에 위치한 국가였다. 발디마르에 비해 아스테르반과 상당히 가깝다.
그러니 일단 아시어스를 데리고 마탑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든 그녀 자신의 감정이 격해져 종속의 사슬이 흔들릴 때, 사슬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아시어스가 여신의 음성을 다시 들으며 괴로워하는 사이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면…….
“…….”
……되는데.
리즈벨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어이가 없어 실없이 웃었다.
탄신 연회의 밤, 그녀가 종속을 홱 당긴 순간 아시어스가 어떤 꼴이 났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 꼴이 눈에 밟혀 결국 다시 돌아온 게 아닌가.
꼭 서럽게 울음을 터뜨릴 것같이 불그스름하던 눈. 그녀를 필사적으로 잡던 손아귀의 힘. 사정없이 떨리던 목소리. 꼭 상처 입고 버려진 짐승이 주인에게 매달리는 듯하던 그 모습까지…….
리즈벨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 뒤로 아시어스와 대판 말싸움을 한 이후에는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러니 자연히 그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나는 건 그 모습이었다.
“아, 정말. 왜 그렇게 생겨서…….”
마음 놓고 돌아설 수도 없게. 리즈벨은 멍청한 자신을 비웃으며 그녀의 방으로 돌아왔다. 마탑 안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사이 해가 져 있었다.
그녀의 방은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당연히 방 안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붉은 머리의 남자는 간데없었다.
“……?”
리즈벨은 당황스럽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생각은 금세 에릴이 건네고 간 말에 닿았다.
“거기로 갔나.”
리즈벨은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곧장 다시 방을 나섰다.
평소 같았다면 의심했을 법도 한데, 리즈벨은 근 두어 달을 마탑에서 지내며 생각보다 마탑의 안온함에 꽤 깊이 젖어 있었다.
아시어스의 탑이니 그녀를 해칠 만한 것은 없다고. 모순이었지만 그랬다.
자박자박.
어둑한 초저녁의 빛이 내리깔린 복도에 그녀의 발소리가 울렸다. 리즈벨은 곧장 마탑 최상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의 코너에 에릴이 가리켰던 문이 있었다. 리즈벨이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문고리가 저절로 돌아갔다.
“……?!”
그제야 위기감을 느낀 리즈벨은 급히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무언가가 뒤에서 그녀의 등을 퍽 떠밀었다.
“뭐…….”
저항할 새도 없이 몸이 문 안쪽으로 넘어갔다.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자연적이지 않은 돌풍이 불어와 문을 쾅 닫았다.
[둘 다 성질 더럽기론 일등이지. 하여튼.]라제는 리즈벨을 문 안쪽으로 반쯤 집어 처넣다시피 하고는 툴툴거렸다.
[화해하기 전까지는 문 안 열어줄 테다. 알아서들 잘 해 봐.]매끈한 흑요석을 닮은 짐승은 그 말을 끝으로 미련 한 톨 없이 우아하게 돌아섰다.
* * *
리즈벨은 문 안쪽으로 퍽 밀쳐지자마자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문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텅 빈 암경이었다.
심지어 발을 디딜 곳도 없었다. 그녀는 맥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그녀의 몸에서 성력이 막 새어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떨어지는 그녀를 홱 낚아챘다. 몸이 중심을 잃으며 기울었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몸이 넘어갔다. 쿵 하고 뭔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짧은 신음이 지척에서 울렸다.
리즈벨은 자신을 붙잡아 준 이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아.”
어깨와 허리를 잡은 손의 크기. 시야에 언뜻 스친 어깨의 높이. 언제나처럼 서늘한 체온. 끌어안긴 품에서는 익숙한 향이 났다.
“왜…… 왜 거기서 떨어집니까?”
아시어스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일단 본능적으로 그녀를 붙잡기는 했는데, 그 뒤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한 눈치였다.
리즈벨의 허리를 감싼 팔이 어색하게 움직였다.
리즈벨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나…… 앞이 안 보여.”
“뭐라고요?”
“너무 어두워. 여기 어디야?”
여전히 시야는 온통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그녀를 안정감 있게 안은 너른 품뿐이었다.
“잠깐만.”
리즈벨이 그에게 안겨 간신히 숨만 내쉬는 사이, 어둠 속에서 푸른 마력이 탁 튀었다. 그제야 시야가 밝아졌다.
리즈벨이 가장 먼저 본 것은 낡은 나무 벽에 매달린 주황빛 등불이었다.
리즈벨이 떨어진 곳은 낡고 좁은 골방이었다. 폭은 좁은데 천장은 기이하게 높았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가 지척에서 잿빛 눈과 딱 마주쳤다.
그제야 그들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보였다. 몸이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있었다. 남자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맞닿은 가슴으로 전부 전해져 왔다.
허리에 감긴 팔. 반쯤 얽힌 다리. 그녀의 체온에 금세 물드는 서늘한 몸…….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놔.”
리즈벨은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즉시 그녀를 안은 남자를 밀쳤다. 매정하게까지 느껴지는 거부에 아시어스가 홱 인상을 구겼다.
“떨어지는 걸 기껏 받아 줬더니, 이 태도는 뭐죠?”
리즈벨은 대꾸 없이 그의 몸 위에서 몸을 물렸다. 이 남자를 오래 보고 있는 건, 오래 안겨 있는 건 위험하다.
아시어스가 그녀를 놓아주며 빈정거렸다.
“아, 이제는 마주 보고 싶지도 않다 이건가요. 한 공간에 있기도 싫다?”
“맞아. 쉬고 있었던 모양인데 방해해서 미안해.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해.”
뒤에서 아시어스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즈벨은 일단 그에게서 떨어질 요량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
그리고 발목을 타고 올라가는 아릿한 통증에 신음을 내질렀다. 조심성 없이 내디딘 다리가 풀썩 꺾이며 몸이 기울어졌다.
아시어스가 또다시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면 볼썽사납게 주저앉았을 거였다. 아시어스가 사납게 이를 갈았다.
“당신 진짜 손 많이 가게 한다.”
단단한 팔이 다시금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녀가 밀어낼 틈도 없이 제 쪽으로 홱 잡아당겼다.
리즈벨은 잠깐 사이에 도로 그의 위에 올라와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허리를 휘감은 단단한 팔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아시어스는 가소롭다는 듯 픽 웃더니 불시에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들추었다.
“무슨, 뭐……!”
드레스 아래 가느다란 종아리와 발목이 드러났다. 아시어스는 벌써 발갛게 부어오른 발목을 보고는 혀를 찼다.
“접질렸네.”
작은 녹색 마법진이 그녀의 발목에 내려앉았다. 즉시 찌르르한 통증이 자취를 감추었다.
“올라가서 제대로 치료해요. 애초에 여기엔 어떻게 들어와서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틱틱대는 듯한 어투였다. 꼭 그녀를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그에 확 짜증이 솟구친 리즈벨은 따라 날 선 어조로 쏘아붙였다.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거 아냐. 너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착각하지 마.”
“네, 그러시겠죠. 그럼 왜 내 창고에 들어왔는지 물어도 될까요?”
그가 아주 우아하게 시비를 걸었다. 그러면서도 리즈벨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는 여전히 힘을 주고 있었다. 외려 제 쪽으로 꾹 잡아 누르기까지 한다. 몸이 좀 더 바짝 맞붙었다.
빈손으로 리즈벨의 목덜미를 잡아 고정한 남자가 눈매를 휘었다.
“응? 말해 봐요. 해가 진 지가 언제인데, 누굴 찾아서 여기까지 오셨는지.”
리즈벨은 그 눈웃음을 보며 답지 않게 약이 올랐다.
빙글거리는 낯을 단박에 구겨지게 만들 방법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찾아냈다.
푸른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예쁘게 휘었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