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8
8화
Chapter 2. 낯선 남자
리즈벨은 천천히 눈을 떴다.
“……?”
그녀는 처음 보는 곳에 와 있었다. 가구는 몇 없었지만 널찍하고 단정히 정돈된 방이었다.
리즈벨은 자신이 어느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몸에 가벼운 이불이 덮여 있었다. 그녀의 침대보다는 시트가 훨씬 푹신한 것을 보니 자신의 방은 아니었다.
리즈벨은 이불 속에서 제 손을 꺼내 눈앞까지 들어 올리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보았던 금색 빛은 지금은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그건 뭐였지…….”
목소리는 푹 잠겨 있었다.
리즈벨은 다른 쪽 손도 들어 올린 뒤 손바닥과 손등을 몇 번이고 뒤집어 가며 그 빛이 다시 새어 나오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한참을 봐도 눈을 아플 정도로 찌르던 그 빛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뭐였을까.’
리즈벨은 아직도 멍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어쩐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한겨울에 잠옷 차림으로 왕성 호숫가에 뛰어들었다가 고열로 사경을 헤매던 때와 비슷했다. 기력이 다 빠져나가 기진맥진한 상태다.
하지만 눈을 뜬 이상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의 여유는 사치일 뿐이다. 리즈벨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입고 있던 드레스는 누가 벗겼는지 간데없고, 웬 슬립이 입혀져 있었다. 딱 보기에도 왕성에서 입던 잠옷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 슬립이었다.
리즈벨은 의아하게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겨 버렸다. 발작하다 지쳐 쓰러진 자신을 시녀들이 멋대로 굴려 욕실에 담가 놓고 옷을 갈아입히는 일에는 익숙했다.
리즈벨은 얇은 레이스 캐노피를 젖혔다. 그제야 방 안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어디야, 여긴.”
리즈벨이 깨어난 곳은 그녀의 원래 방보다도 더 컸다. 게다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딱 봐도 가구들이 손때 탄 흔적 없이 새것처럼 광택이 나는 게, 분명 왕족들이 사용하는 탑 안쪽의 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루시페가 거처하는 본성인가? 그러나 본성은 루시페의 허락이 없이는 열리지 않는다.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 본성으로 끌려갈 일도 없다.
리즈벨은 자신의 몸으로 시선을 내렸다.
지칼이 분명 그녀의 목덜미로 검을 겨누었었다. 리즈벨은 손으로 제 목덜미를 슬쩍 찔러 보았다.
‘잘 붙어 있는 거 맞지……?’
일단 목은 제 위치에 잘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러면 더더욱 이곳이 왕성일 리가 없다. 지칼이 방금까지 죽이려고 한 누이를 곱게 좋은 방에다 뉘어 놓았다고? 말도 안 돼.
리즈벨은 여기가 왕성이라는 가정을 때려치웠다. 고개가 휘 돌아갔다.
방의 한쪽 벽에 커다란 창문이 나 있었다. 창문은 커튼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녀는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바닥을 디딘 발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 정도는 그녀에겐 아픈 축에도 끼지 못했다.
리즈벨은 거침없이 창가로 다가가 드리워진 상앗빛 커튼을 걷어 냈다. 그제야 창밖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담겼다.
밖은 사위가 캄캄한 밤이었다. 집집마다 희미하게 밝혀진 등불이 별처럼 점점이 찍혀 있었다.
“어…….”
리즈벨은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수도를 내려다본 적은 없었다. 왕성에서도 가장 높은 본성 꼭대기 탑까지는 올라가야 이런 전경이 보일 텐데.
‘여기, 정말 어디야?’
왕성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이곳이 수도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여관, 그중에서도 가장 꼭대기 층이라는 걸 알 리가 없었다.
리즈벨은 걸쇠를 풀고 창문을 밀었다. 굳건히 닫힌 창은 조금 무거웠다. 막 손에 힘을 주는 찰나,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열지 마십시오.”
“……!”
리즈벨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
그녀의 말은 맺어지지 못했다.
방금까지는 분명 꽤 멀찍이서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 같은데, 눈 한 번 깜빡이지도 않은 찰나에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
리즈벨은 고개만 돌린 채로 얼어붙었다. 짙은 회색빛 눈이 정확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막 불씨가 사그라든 잿더미 같은 색이었다.
창문 걸쇠를 잡은 리즈벨의 손 위에 그녀의 손등 정도는 가볍게 덮고도 남는 큰 손이 얹혔다.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탁. 남자가 그녀의 손등을 감싼 채 힘을 주어 창문을 닫았다. 아주 살짝 열렸던 창문이 다시 빈틈없이 닫혔다. 이윽고 남자가 담백하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열면 새어 나갑니다. 당신, 아직 조절이 전혀 안 되고 있어서요.”
“무슨…….”
리즈벨은 입술을 깨물고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짙은 회색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신장이나 체격은 로제스와 비슷해 보였다. 단추 두어 개가 풀어 헤쳐진 검은 셔츠 사이로 목울대가 도드라진 목이 곧게 뻗었다.
시선이 매끄럽게 쭉 뻗은 턱 선과 사내치고 묘하게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을 타고 올라갔다.
눈매가 길고 날카로운 편이었으나, 살짝 내리깔린 눈꺼풀의 모양이 나른하고 색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보기 드문 미남자였지만 리즈벨은 그 얼굴에 감탄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 낯선 남자.
잿빛 눈동자가 속을 알 수 없이 무념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얼핏 로제스의 눈과 비슷해 보였으나 아니었다. 로제스는 숨기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자는 아니다. 리즈벨은 보자마자 알았다. 애써 자신을 숨겨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무신경한 위압감이 폐부를 짓눌렀다. 리즈벨은 이런 눈을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누구?”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리즈벨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고 발랄하기 짝이 없는 음성을 제 귀로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강자를 앞에 두면 더더욱 약해 보이면 안 된다. 그 자기 세뇌에 가까운 다짐이 리즈벨을 움직였다.
“여기는 어디고, 너는 누구야?”
습관처럼 미친년의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애초에 이 나라의 왕녀인 그녀가 반말을 찍찍 일삼는대도 책잡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자 역시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미미한 웃음을 띤 그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딜까.”
“그건 대답이 아니야.”
“나도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피차 같은 입장, 곤란한 질문은 하지 않기로 하지요.”
그의 답은 모호했지만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리즈벨도 자신이 왕녀라는 걸 순순히 밝힐 마음이 없었으니까. 상대 역시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더 이상 리즈벨을 보고 있지 않았다. 회색빛 눈동자가 슥 아래로 내려갔다. 리즈벨은 미간을 찡그리며 남자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곁눈질했다. 그리고 피로 붉게 물들고 있는 바닥을 발견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도 경고해야 했을까.”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그녀에게로 한 발 다가왔다. 리즈벨은 순간 흠칫하며 몸을 물렸으나 뒤는 창가로 막혀 있었다. 거부감이 크게 몸을 불렸다.
“손 대지 마.”
두려운 눈. 가진 위압감을 가감 없이 내보이면서도 차고 무신경한 눈. 가슴이 제멋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프지 않은가요?”
“신경 꺼.”
상대는 그녀의 강한 거부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짧게 신음했다.
“아.”
리즈벨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 잠시 멈춰 있던 손이 금세 거두어졌다. 길쭉한 검지가 유연하게 움직이며 작은 원을 그렸다. 푸른 빛이 탁 튀었다.
리즈벨은 인상을 쓰며 그 모양을 바라보다 이내 나타난 남자의 변화에 입을 벌렸다.
그의 얼굴에 가느다란 은빛 테의 안경이 나타났다. 옆으로 길쭉한 둥근 유리알 한 쌍이 남자의 회색빛 눈이 내뿜는 안광을 가렸다.
남자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이제 좀 낫겠지요. 미안합니다. 잠시 벗어 둔 걸 깜빡해서.”
뜬금없는 사과였고, 그 행위로 마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투였다. 그러나 리즈벨은 어쩐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뒤덮었던 버거운 위용이 한결 가셔 있었다.
“이제 됐지요?”
남자가 다정하게 웃으며 두 손을 펼쳐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무기도 없고, 당신을 공격할 의사도 없고.”
“…….”
“그리고 슬슬 정말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데.”
그가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리즈벨은 그제야 찌릿하게 느껴지는 발바닥의 통증을 알아차렸다. 몇 번이고 터졌다 조금 아물었다 다시 터지기를 반복한 발은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염증이 나거나 곪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리즈벨이 막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남자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
안 그래도 가까웠던 두 몸이 틈도 없이 맞붙었다.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았다. 낮고 고른 숨결이 리즈벨의 턱 언저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