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84
85화
짧은 순간이었으나 헬라르가 그녀의 의식에 침투하여 몸을 조종하던 기억은 선명했다.
그것은 아시어스의 종속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완벽한 ‘지배’였다.
“성녀는 대대로 단명했다지. 한 세대를 채 채우지도 못하고 죽었다고 하더라. 왜 그랬을까.”
“…….”
“붉은 머리. 사람은 그렇게는 살 수 없는 거야.”
리즈벨은 손등에 턱을 괸 채로 살풋 웃었다.
“인간의 영혼은 누군가에게 완벽히 지배당하고서는 버티지 못해. 나약하거든.”
루시페는 그가 최후에 불러낸 마에바에게 영혼이 먹혔다. 그녀가 단죄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마에바에게 이미 살해당한 뒤였다.
[너도 네 아비와 같은 꼴로 죽겠구나.]마에바는 리즈벨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이르러, 그녀는 이제 확신할 수 없어졌다. 그녀를 죽이는 자가 아시어스인가, 아니면 헬라르인가?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도 몰라.”
그녀가 아시어스에게 영혼의 소유권을 빼앗기고 나서도 지금처럼 멀쩡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아시어스가 종속의 사슬을 필요 이상으로 당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사슬을 조이면. 그녀를 완전히 장악하고 그녀에게서 헬라르의 권능을 전부 빼앗으면. 그것이 곧 죽음이다. 운 좋게 숨이 붙어 있다 해도 리즈벨에게 그것은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방법을 찾아야 해.”
“도망칠 방법을…… 말입니까?”
“아니.”
리즈벨은 희게 웃었다. 도망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발디마르에서 배웠다.
그녀는 고향에서 이미 한 번 택한 바가 있었다.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버리고 로제스를 선택했다.
이제는 누구를 택할 것인가. 조금만 힘주면 끊어져 버릴 삭은 사슬을 쥔 지금. 또다시 도망칠 기회를 손에 쥔 지금. 자유와 맞바꿀 것은 무엇인가.
답은 이미 그날 밤 내려졌다.
“내가 갖고 싶은 게 생겨 버려서.”
리즈벨의 눈매가 살풋 접혔다. 카잔은 잠시 넋을 잃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하는 ‘갖고 싶은 게’ 누구를 말하는지 카잔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황성에서 그도 들었던 것이다. 마탑주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그때처럼 차분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러면 걸리적거리는 것은 치워 버려야지.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찾아야지. 그게 뭐든.”
“…….”
“나는 살 거야. 어떤 더러운 일이 있고, 또 어떤 나락에 머리부터 처박힌대도. 그리고 나는 그 남자도 그랬으면 좋겠어.”
죽은 눈은 싫다. 죽음을 각오한 자의 눈 같은 건 이제는 더는 싫었다.
그리운 밀빛 금발이 시야를 휙 스쳤다가 이내 검은 머리칼로 변한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봤으면 좋겠어.”
아시어스가 그녀에게 갖는 감정을 인정할 수 없다면, 그를 그렇게 만든 원흉을 없애 버리면 된다.
리즈벨은 눈앞의 남자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러니까 네 도움이 필요해.”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매 안에 박힌 하늘 조각이 빛났다. 그녀가 상상하고 꿈꾸는 수많은 미래가, 무수한 가능성이 그 자유로운 창공을 수놓고 있었다.
카잔은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간신히 숨을 내뱉고 급히 들이쉬는데, 웃음기가 싹 빠진 단호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쯤 했으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야. 난 네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어.”
“…….”
“그러니 너도 이제 내게 최선을 다해, 카잔.”
* * *
카잔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심한 끝에야 털어놓은 이야기는 꽤 놀라웠다.
“아스테르반은 이계의 땅입니다. 헬라르의 권능은 물론, 마력을 포함한 이 세계의 모든 자연법칙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땅.”
가감 없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는지, 그의 목소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아스테르반은 대륙에 현존하는 모든 나라가 건국되기도 전부터, 먼 고대에서부터 이 세계에 존재해 온 유일한 이계의 파편이죠.”
“그게 가능해?”
줄줄 말을 쏟아 내던 카잔이 갑자기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 곁에 이계의 존재들을 셋씩이나 두고 있으면서 그게 가능하다고 물으면 어쩝니까?”
“이계의 존재라니. 무슨…….”
“당신 곁의 악마들이요. 마탑주의 사역마들.”
소리 없는 탄성이 터졌다. 그랬다. 바일과 티스, 그리고 라제. 루시페가 소환했던 이고르와 마에바까지.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으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생물체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악마. 마계의 존재들이다.
“헬라르는 악마의 힘, 즉 검은빛을 띠는 마력을 증오하죠. 왜? 그녀의 권능 밖에 있는 힘이거든.”
“아…….”
“하지만 그들도 어찌 됐건 이 땅에 소환된 이상 그들의 힘을 완벽하게 펼칠 수는 없겠죠. 여기는 땅이며 바다, 심지어 공기에까지 여신의 권능이 묻어 있는 그녀의 세계니까.”
순식간에 기억 속에서 조각 하나가 튀어나왔다. 티스베가 ‘이 땅에서는 성녀의 힘을 당해 낼 수가 없다’고 했던 말이었다.
“맥락은 같습니다. 헬라르는 그녀의 권능 밖에 있는 힘, 즉 이계를 증오하기 때문에 마계는 물론이고 아스테르반 역시 눈엣가시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수백 년간 성녀를 통해 아스테르반의 ‘이단자’들을 박멸해 왔던 거고. 하지만 우리를 박멸한다 해서 아스테르반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헬라르는 그곳을 건드릴 수 없어요. 인식조차 불가능합니다.”
아귀가 착착 맞아떨어졌다. 카잔은 빠르게, 그러나 분명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계는 이 세계와는 완벽히 분리되어 있죠. 그런데 아스테르반은 왜 이 세계에 뚝 떨어져 있나? 언제, 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런 것들은 누구도 모릅니다. 그건 사실 중요한 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건…….”
“중요한 건?”
“그 땅에 우리가 ‘주술’이라고 부르는 다른 힘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수천 년 동안 고갈되지도 않고.”
주술. 새롭게 얻은 정보가 리즈벨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카잔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쩌면 헬라르의 권능과 맞먹을 수도 있을 만큼 강한 힘. 하지만 오로지 아스테르반에서밖에 발휘될 수 없는 힘.”
“역의 관계도 성립하니?”
“예.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잡혔죠.”
카잔이 턱짓으로 그를 묶은 금빛 성력을 가리켰다.
“주술의 힘은 아스테르반을 벗어나 헬라르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반의반, 아니지. 반의반의 반의반으로 줄어듭니다. 헬라르의 성력에 완벽히 압도당하죠. 그때 당신이 그랬듯이.”
리즈벨이 카잔과 그 무리를 제압하는 데는 채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그 말을 거꾸로 하면, 여기가 아스테르반이었다면 내가 당신을 압도했을 거란 얘깁니다. 그곳에서는 헬라르의 권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으니까.”
“그렇구나.”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헬라르의 눈이 닿지 않는 땅. 겔오르의 눈. 그 땅에 숨겨진 힘…….
“그 힘을 온전히 이곳으로 끌어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지?”
“네.”
카잔이 딱 잘라 대답했다. 리즈벨은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까지가 내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거짓은 없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요.”
“……마지막 말만 아니었으면 참 유익한 정보였을 텐데.”
리즈벨이 혀를 차며 그에게 몇 가지 문답을 던지는 사이, 희미하게 아시어스가 마탑에 발을 들인 것이 감각에 닿았다.
“아, 왔다.”
리즈벨은 방금까지의 여유를 거두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다. 내일 또 올게. 올 수 있으면.”
카잔은 얼른 대답하는 대신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리즈벨은 그대로 돌아서려다 저를 뚫어지도록 응시하는 시선을 느꼈다.
“……?”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다시 카잔에게 시선을 던진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그를 사랑합니까?”
“……모르겠어.”
리즈벨의 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그러나 거짓 없는 답이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짧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면 달리 뭐라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네.”
“…….”
“그래, 사랑하나 봐.”
말로 뱉고 나니 명료해졌다. 사랑.
리즈벨은 그 단어를 입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사랑. 사내를 향한 마음이라. 태어나 처음 인정해 보는 감정이다.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드디어 그저 알 수 없는 이끌림, 혹은 이상한 기분이라고만 뭉뚱그렸던 그녀의 감정에 명쾌한 이름이 생겼다.
“거참, 위험한 마음이네.”
카잔이 중얼거렸다. 그녀를 보는 투명한 푸른빛 눈이 복잡하게 일렁거렸다. 그는 약간 딱하다는 듯, 그러나 동시에 신기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리즈벨이 의구심을 갖기도 전에 카잔이 장난스레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럼 불나방 같은 성녀님. 다음 밀회 때 뵙도록 합죠.”
리즈벨은 싱겁다는 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헬라르의 성녀와 악마 소환술사가 서로 사랑한다라.”
리즈벨이 떠난 뒤, 텅 빈 방에서 카잔은 나지막이 뇌까렸다.
“비극이네.”
마지막 중얼거림이 음울하게 내려앉았다. 가을 한 중턱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