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86
87화
아시어스가 기어이 리본을 풀었다. 약간 서늘한 손이 아슬아슬하게 헐거워진 천과 살갗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불시에 가슴이 튕겨지는 감각에 리즈벨은 흡 숨을 멈추었다.
“웬만해서는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더 참았다간 내가 그자를 죽여 버릴지도 몰라서.”
아시어스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고 곧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두근두근 뛰는 핏줄을 따라 목으로 내려가더니, 이내 콱 물어 버렸다.
리즈벨의 목에 잇자국이 빨갛게 남았다.
“아시어스!”
“붉은 머리가 취향이에요? 만나지 말라는데 왜 자꾸 만나. 그것도 단둘이. 밤에. 나 몰래. 응?”
리즈벨은 아픈 목을 문지르며 아시어스를 저지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성력을 풀어 주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난 카잔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고, 그와 뭘 해 볼 생각도 없어.”
잿빛 눈에 의구심이 마구 차올랐다.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리즈벨은 그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재빨리 선수를 쳤다.
“그런데 너,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게 싫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왜 싫은데?”
질투라는 감정이 생기려면 그 전에 전제되어야 하는 감정이 있기 마련이다.
리즈벨은 아시어스가 제 입으로 절대 그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하지만 역시 미약하게 기대가 이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어쩌면 술김에라도 해 줄 수도 있으니까…….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두근 박동했다.
“왜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게 싫은데?”
“…….”
“내가 떠날 것 같아서? 그것뿐이야, 아직도?”
아시어스가 당혹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그녀의 몸을 만지던 것도 멈추고 한동안 그녀를 멀거니 보기만 했다.
리즈벨은 떨리는 심정으로 그에게서 떨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달싹였다.
“그것뿐이냐고 하면, 그건 아닌데.”
“그럼…….”
“주인이 사라지면 기르던 개는 슬퍼하잖아요. 어쩌면 배신감도 느낄 테고. 비슷한 거죠.”
제가 내놓은 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금세 다시 여유를 찾은 아시어스가 싱글거리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말이에요. 반대로 생각해 줄래요? 내가 나가서 다른 여자랑 밤을 보내고 와도 당신은 아무렇지 않을 건가?”
“미쳤어?”
리즈벨은 기가 막혀 쏘아붙였다.
“생각도 하지 마. 그럼 너랑 두 번 다신 키스 안 할 거야.”
“그럼 결론 났네요. 당신은 그 남자를 안 만나고, 나는 당신에게 키스할 수 있고.”
남자가 그녀의 턱 밑에 입술을 대고 체취를 들이마셨다.
리즈벨은 아시어스가 교묘하게 대답을 피해 갔다는 걸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죽어도 사랑해서라고는 말을 안 하는구나. 그녀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치사해.”
“그냥 치사한 인간 하죠, 뭐.”
아시어스가 느슨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를 짓누르듯이 위에 올라타고는 그녀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빠르게 내뱉었다.
“리즈벨, 나 재워 줘요.”
“뭐?”
반쯤 짓눌리다시피 한 리즈벨이 숨이 막힐 즈음이 되어서야 아시어스가 그녀를 홱 들어 올렸다.
그는 소파에 길게 누워 리즈벨을 제 위로 올렸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꼭 안았다. 몸을 겹치고 싶어 한다기보다는 긴 밤 곁을 채워줄 곰 인형이 필요한 어린애처럼.
“재워 줘.”
맞닿은 가슴에서 심장 고동 소리가 전해져 왔다. 쿵. 쿵.
“자고 싶어요.”
하는 짓은 꼭 새끼 고양이 같았지만, 새끼 짐승이라기엔 그녀가 한 번에 끌어안기가 한참 버거웠다.
리즈벨은 고개를 빼꼼히 들어 붉은 기가 도는 눈매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말 안 듣는 못된 아이 같은 남자.
“…….”
그러나 리즈벨은 천천히 아시어스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 느리고 일정하게 그의 어깨를 토닥이자, 조금 빠르게 뛰나 싶던 심장이 서서히 느릿하게 제 박자를 찾는 것이 느껴졌다.
리즈벨은 한참이나 그 고동 소리를 들었다.
“너 진짜 치사해. 알아?”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도 그녀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나도 너 사랑 안 해.”
그런 거 안 해. 그러나 이내 또 한숨.
“……안 하고 싶다.”
어쩐지 조금 지치는 기분이었다.
* * *
꿈을 꿨다. 늘 꾸던 악몽이었다.
그는 다섯 갈래의 성력에 목과 사지를 결박당해 있었다. 빛 무리가 그려 낸 여신의 형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프니, 아시어스?]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었다. 열두 살 어린애에 불과한 소년은 절대자의 존재 앞에서 날개를 뜯긴 나비만큼이나 무력했다.
가시 돋은 성력의 사슬에 깊이 찢긴 상처에서는 피가 멈출 생각을 않았다. 사방에 그가 흘린 피의 비린내가 진동했다.
깨진 이마도 핏자국이 흥건했다. 힘없이 내리깔린 눈꺼풀 위를 덮고, 속눈썹 위에 맺혔다가 뺨으로 툭 떨어진다.
언뜻 피눈물처럼 보이는 그것을 빛이 만들어 낸 여신이 손을 뻗어 닦아 냈다.
[태울 수도 없고, 이대로 목을 잘라 버릴 수도 없고…….]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헬라르가 중얼거렸다.
형체가 명확하지 않아 그녀의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럼 역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겠구나.]채찍처럼 들고 일어난 성력의 갈래가 소년의 발치에 형편없이 뒹굴고 있던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소년의 피에 흠뻑 젖은 검은 짐승이었다.
라이제스가 검은 눈을 들어 헬라르를 노려보았다.
[……미친년 같으니.] [어머나, 말버릇이 심하네. 불순물 주제에.]빛무리가 튀어 올랐다. 저항할 수 없도록 포박된 검은 사자의 몸통이 성력의 낫에 수십 조각으로 썰렸다.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소년이 귀청을 찢었다.
“라…… 제…….”
검은 피와 살점이 튀었다. 벽에 매달린 소년의 몸에 사자의 견고한 표피가 철퍽 달라붙었다.
헬라르는 흉측하게 꿈틀거리는 살덩어리 중 가장 큰 것을 집어 들었다. 검은 체액이 질질 흐르는 딱딱한 악마의 살점을 소년의 코와 입에 처박았다.
[먹어, 아시어스. 남김없이.]끝까지 그녀의 어조는 상냥했다.
“…….”
언젠가부터 아시어스는 깨어 있었다. 반쯤 뜨인 잿빛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는 느리게 제 몸을 훑었다. 마르고 약한 피투성이 소년의 몸이 아니었다. 그러나 손목의 흉터에서 자꾸만 헛것이 보였다.
“……우욱.”
아시어스는 허리를 숙이고 헛구역질과 마른기침을 몇 번 토해 냈다.
“라제.”
귓바퀴 끝에 박힌 소환석이 바르르 떨렸다.
황금빛 피부에 검은 머리의 소년이 소리도 없이 창틀에 내려앉았다. 라제가 한숨과 함께 물었다.
“이번에는 나를 먹는 꿈이야?”
“…….”
그의 첫 번째 사역마의 목소리가 아시어스를 현실로 끌어 올렸다. 삐걱대던 사고가 서서히 제 궤도를 찾았다.
아시어스는 관자놀이 부근을 꾹 짚다, 잠들기 전과 달라진 것을 찾아냈다.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리즈벨.”
“나가던데.”
라제의 무심한 대답에 아시어스는 잠시 침묵했다. 느리게 손으로 제 몸을 더듬었다. 여자의 온기로 물들어 있던 품이 도로 차게 식어 있었다.
아직 머리가 몽롱했다. 술을 입에 댄 것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사고가 한 박자씩 느렸다.
분명히 품에 안고 잠이 들었는데. 그랬는데…….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디로?
아시어스는 상체를 일으키며 가만히 종속의 사슬을 더듬었다.
그와 단단히 연결된 사슬을 잡고 반대쪽에 매인 여자의 위치를 확인한다. 술기운이 서서히 걷혔다.
약한 두통과 함께 그녀가 어둡고 빈 복도를 걷고 있는 것이 생생하게 감각에 닿았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리즈벨이 닫지 않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복도로 나섰다.
리즈벨은 어두운 복도를 익숙하게 더듬어 어딘가로 향했다. 아시어스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그 뒤를 따랐다.
마탑의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다. 리즈벨은 복도 끝에 있는 문 앞에서 멈추었다. 그녀가 요 며칠 동안 새벽마다 늘 들락거리곤 하던 바로 그 방 앞에서.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 * *
“오늘도 왔네요.”
“오늘은 시간이 별로 없어.”
리즈벨은 서둘러 방으로 들어와 문을 밀어 닫았다. 불을 켤 필요는 없었다.
카잔의 몸을 묶은 성력이 그 자체로 빛이 되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재워 놓고 오기는 했는데, 언제 깰지 알 수가 없어서.”
아시어스가 깨어나서 정신을 차리면 아마 카잔을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가 그녀를 가두지 못하는 건 본인도 알고 있을 테니 아마 내일부터 품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려 할 게 분명했다.
“리즈벨. 정말 나랑 그 땅으로 안 갈 겁니까?”
카잔은 며칠째 같은 말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도망가라고. 그 땅으로.
리즈벨은 지금까지 어떤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 땅으로는 어떻게 갈 수 있는데?”
“물론, 길잡이가 있어야죠.”
“길잡이?”
“아스테르반이 왜 수천 년 동안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고 고립된 채로 남아 있을까요. 헬라르의 세계의 인간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지. 인간이 마계에 드나들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점에서 당신은 운이 좋아요, 리즈벨.”
얼음을 닮은 푸른 눈이 빛났다.
“나를 만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