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88
89화
“만약에…… 찾지 못하면, 아시어스.”
리즈벨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입 안이 자꾸만 바싹 말랐다. 그녀는 떨지 않기 위해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1년이 지났는데도 우리가 여전히 그대로라면. 그러면…….”
아시어스에게 무슨 말이 필요한지 알았다. 그를 살게 할 말은 딱 하나였다. 그녀 평생에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결심이 떨리는 목소리에 실려 나왔다.
“그때는, 네 손에 죽어 줄게.”
그녀를 부서질 듯 끌어안고 있던 팔이 순간적으로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리즈벨은 간신히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이 1년은 나를 위해 살아.”
리즈벨은 아시어스가 긴 숨을 내뱉는 것을 느끼며 그 말이 정답이었음을 알았다.
‘로제스.’
문득 그리운 이름이 떠올랐다. 나를 위해 기꺼이 죽음도 감수하리라 결심했던 다정한 오라버니가 꼭 이런 기분이었을까.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이었다. 리즈벨에게 안배된 운명이 그러했다.
삶은 언제나 죽음에 더 가까웠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삶과 죽음과 사랑. 그 사이의 경계가 흐릿했다.
돌아보면 한쪽에는 죽음이, 또 한쪽에는 삶이, 사랑이. 그렇게 너무나 가까워서 결국엔 생도 사랑도 전부 죽음과 닿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웃어. 리즈벨.”
어린 날, 무의식 깊숙이 새겨진 오라비의 목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그러면 끝이, 끝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니까.”
손끝의 잔경련이 서서히 멎었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던 푸른 눈에 점차 빛이 돌았다.
하지만, 그래. 리즈벨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인생에 안배된 것이 비단 죽음과 절망뿐일리는 없다.
진창에서 난 년이라고 진창에서 죽어야 한다는 법 있는가. 있다면 누가. 그녀의 인생은 오직 치열한 생존의 연속일 뿐이라고 그 누가. 누가 정해 놓았단 말인가?
리즈벨은 제대로 숨을 내쉬기 시작한 남자의 손을 얽어 맞잡으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누가. 그녀 자신이 아닌 누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인데.
“나는 찾을 거야.”
찾고 또 찾아서, 세상 끝까지 다 뒤져서. 어떤 방법이든 찾을 것이고, 무엇이든 시도해 보리라.
그러다 보면 그 어딘가에는 행운이. 또 어딘가에는 희망이, 구원이. 그녀를 살게 할 것들이.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구할 것들이 반드시 존재할 테니까.
“너는, 그리고 나는. 괜찮을 거야, 아시어스.”
리즈벨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의 떨림은 없었다.
* * *
[너,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인다?]라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시어스를 보았다. 요 며칠 죽을상을 하고서는 라타에 남부의 신전들을 부수고 다니더니, 그제를 기점으로 얼굴이 활짝 핀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급격한 변화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분 좋으면 안 돼?”
[응. 네가 그렇게 속 시원하단 얼굴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일 텐데.]“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들으니 기분이 묘한데.”
잿빛 눈에 오랜만에 생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라제는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네 평생 그런 눈을 하는 건 처음 봐.]“맞아, 주인. 우리한테도 한 번도 안 보여 줬던 눈이잖아.”
티스가 끼어들었다. 아시어스는 웃으며 티스의 붉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가 진심으로 즐거운 듯 말했다.
“타협점을 찾았거든.”
티스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검은 안개 형체를 띤 바일은 그의 발치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라제는 앞발을 들고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아직 말을 다 듣지도 않았는데 불안감부터 일었다.
“1년. 딱 1년이야.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할 시간.”
아시어스의 얼굴에는 더는 고민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간의 무수한 고민이 하루아침에 전부 재로 화하기라도 한 것처럼.
“주인…….”
불안감은 점차 증식했다. 세 악마 중 가장 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티스조차 약간의 위기를 느낀 모양인지, 소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한꺼풀 걷혔다.
라제가 사나운 어조로 물었다.
[1년이라. 그래. 그 시간이 지나면?]“계획을 실행에 옮겨야지.”
아시어스의 말은 태평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앞으로 1년 동안 찾아볼 거야. 성녀를 죽이지 않고 그 몸에서 헬라르의 권능을 빼낼 방법을.”
[……그리고?]“그리고 1년을 채우는 날 헬라르를 죽이는 거지. 그날은 아마도…….”
그의 삶도 끝나는 날일 것이다.
1년. 아시어스가 정해 놓은 그 기간은 그에게 남은 수명이었으며 그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유예의 전부였다.
마지막 남은 시간.
[리즈벨을 죽이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하면?]“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주인의 감정에 동화된 티스가 그를 따라 태평한 표정을 지었다. 아시어스는 여우로 변해 품을 파고드는 티스를 가볍게 도닥였다.
“함께 죽는 수밖에 더 있겠어.”
[허. 리즈벨이 그래 주겠다 하던?]“응.”
[뭐?]라제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리즈벨이 그랬다고?]아시어스는 희게 웃었다.
“정말로 내게 죽어 줄까. 글쎄, 그것보다는 그 여자가 방법을 찾아내리란 쪽이 더 신빙성 있는데.”
[…….]“어느 쪽이든 난 좋아. 사실 말이야, 라제. 1년이 지나면 어느 쪽으로든 결판이 날 거야.”
그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끝이 맺어질 것이다. 그의 복수도, 그의 생도, 리즈벨의 운명도. 아시어스는 정말로 어떤 식으로 끝이 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들 운명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적힐 구절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헬라르를 죽일 방법을 찾는다고. 네가 100년 동안 못 찾은 걸 1년 안에 찾겠다고? 못 찾으면? 그러면 너는 그녀를 죽일 수 있어?]“내 말 뭐로 들었어.”
아시어스는 희게 웃었다.
“함께 죽을 거라고 했잖아.”
[…….]“라제, 죽으면 그만이야. 다 끝나.”
고통도. 괴로움도. 번뇌도. 죄책감도. 그리고 사랑도.
라제는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미친놈.
아시어스는 라제에게서 시선을 떼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회색빛 안개가 위로를 건네듯 그의 몸을 한 바퀴 감쌌다.
“사실…….”
희미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번졌다.
“그 여자를 안고 있으면, 그날이 평생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행복이 이런 건가 싶어지거든. 유예가 1년이 아니라 한 10년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해. 하지만 이렇게 혼자 있으면…….”
“그냥 얼른 다 끝내 버리고 싶어져.”
아시어스는 여전히 헬라르라는 지옥을 걸었다.
“쉬고 싶어.”
그는 어릴 적부터 오래도록 고통스러웠고, 이제는 지쳤다. 남은 시간은 쓸데없는 고뇌에 골머리 썩이지 않고 사랑만 하다 죽고 싶었다. 오랜만에 제 속을 털어놓은 게 낯부끄러우면서도 후련한 모양이었다.
아시어스의 목소리에 꼭 소년이었을 적처럼 작은 응석이 배었다.
“더 아프기 싫다, 라제.”
쉬고 싶다는 상처투성이 인간에게,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뭐라 더 충고할 수 있는가?
라제는 구태여 말을 얹지 않았다. 그는 곧 검은 아지랑이가 되어 휙 사라졌다.
“…….”
아시어스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단단히 결속된 종속의 사슬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얼른 리즈벨의 침실로 이동진을 엮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아시어스는 살짝 잠이 덜 깨어 흐트러진 채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일어났어요?”
“……어디 갈 거면 말하고 가.”
그녀는 약간 잠겨 있는 목소리마저도 예뻤다. 막 일어난지라 살짝 엉켜 있는 금빛 머리카락도.
아시어스의 품에 아직 안겨 있던 티스가 바닥으로 퐁 튀어 나가더니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티스는 리즈벨의 품에 꼭 방금까지 아시어스에게 안겨 있던 것처럼 폭 안겼다.
“안녕. 티스도 왔네.”
붉은 여우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리즈벨은 아직도 뻥 뚫려 있는 티스의 몸통 안쪽 털을 살살 만져 주며 고개를 돌렸다.
창가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가득 받으며 서 있는 그에게로. 그녀가 평온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야, 아시어스.”
아, 마음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에 겨운 일인가. 비록 끝이 파국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좋은 아침이에요, 리즈벨.”
아시어스는 그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기로 한 여자를 보며 가을 햇볕만큼이나 따스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