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89
90화
* * *
“다시 울어 봐. 그날처럼.”
“자꾸 놀릴 겁니까?”
“놀리는 거 아닌데.”
아시어스는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리즈벨은 웃으며 그가 고개를 돌린 쪽으로 따라갔다.
“그날 엄청 울었잖아.”
“…….”
“그전에도 몇 번인가 울 것 같은 얼굴 잘만 해 놓고. 이제 와서 뭘 부끄러워해.”
작고 검은 장신구가 박힌 귀 끄트머리가 붉어졌다.
아시어스는 제 맨얼굴을 내보이기 싫은지 가는 은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안경으로 존재감을 누르면 더 만만해진다는 건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시어스가 고개를 돌린 채 억울한 목소리로 그녀를 힐난했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당신이 정말 도망가려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리즈벨은 아무 장신구도 박혀 있지 않은 귀 끝을 작게 깨물었다. 아시어스는 귀가 민감한 편이었다.
“으, 잠깐만.”
화들짝 놀란 그가 인상을 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예쁘게 웃는 얼굴을 보고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아시어스가 툴툴거렸다.
“당신이 그렇게 웃으면 내가 가만히 있기가 힘들어요, 리즈벨.”
“키스해 줘.”
“…….”
아시어스는 입을 다물었다. 리즈벨의 투명하고 불그스름한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키스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고개를 비틀어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바싹 말랐던 입 안이 금세 젖어 들어갔다.
리즈벨은 반쯤 내리깔린 잿빛 눈에서 지독할 만큼 선명하게 빛나는 욕망을 보았다.
“당신은 역시 나를 휘두르는 데 재능이 있는 게 분명해.”
미세하게 떨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끊어질 듯 이어지다 툭 끊겼다. 옷가지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창가로 짓쳐들어오는 햇빛에 희게 빛나는 자상들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당신은 늘 나보다는 내 몸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리즈벨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가까스로 그의 상체에서 시선을 떼었다.
아직도 그녀는 아시어스의 등을 보지 못했다. 보면 목구멍 안쪽에 울음이 가득 고일 것 같아서, 도저히 뒤를 돌아보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피 웅덩이 한가운데 엎어져 있던 남자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을 낫으로 베어 내는 기분이었다.
아시어스의 손끝이 리즈벨의 쇄골과 어깨의 곡선을 타고 내려갔다.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 놓은 것 같은 몸을 몇 번이나 어루만졌다. 그의 서늘한 손이 따듯하게 물들 때까지.
그 와중에도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이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았다.
푸른 시선이 그의 상체에 난 흉터를 하나하나 스치는 것도 보았다. 그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다치길 잘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당신이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 좀 더 다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뭐?”
리즈벨은 기가 막혀 아시어스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끝이 몸을 사선으로 가로지른 흉터를 죽 내리그었다.
“더 상처가 날 부분도 없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애초에 내가 멀쩡했다면 당신이 나를 신경이나 썼을까? 장담하건대 아닐걸.”
아시어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리즈벨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가 망가질수록 당신 마음속에 더 분명한 형태로 남을 거예요. 그렇죠?”
리즈벨의 몸이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침대 위에 그녀를 엎드린 자세로 내려놓은 아시어스가 그녀 위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상처 몇 개쯤 더 내서, 엉망진창으로 망가져서 울고 있으면. 당신은 절대로 나를 떠나지 못하겠지.”
리즈벨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따듯하게 물든 손이 그녀의 가슴과 허리를 쥐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신음은 다시 겹쳐진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아시어스가 그녀의 혀를 길게 빨아내며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나는 할 수 있어요, 리즈벨. 흉터 한두 개 더 생기는 거,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거든.”
그의 생각이 순식간에 위험한 방향으로 뻗고 있음을 직감했다. 리즈벨은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런 말 하지 마.”
“예를 든 거예요, 단순하게.”
허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이 골반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서늘한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손가락이 갈라진 틈을 파고들자 허리가 본능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해 움직였다. 아시어스가 다정하게 경고했다.
“안 되는 거 알잖아.”
“으, 으응…….”
아시어스가 한팔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고정했다.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그가 주는 쾌락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입술에 힘이 빠져 벌어지고, 힘이 잔뜩 들어간 허벅지가 세차게 경련했다.
아시어스의 목소리가 각인되듯 고막에 내리눌렸다.
“나는 그만큼, 뭐든 할 수 있어.”
“아시, 윽, 아시어스.”
깊은 곳을 할퀴듯 긁어내리는 감각에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리즈벨의 허벅지 안쪽에 짙은 자욱을 그리며 미끄러졌다.
“얼마든지 더 불쌍한 놈이 돼 줄게요. 당신이 원한다면야.”
리즈벨은 손가락이 빠져나간 은밀한 곳에 닿는 단단한 남성을 느끼고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이어질 쾌락을 직감하자 시트를 움켜쥔 손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덥고 축축한 혀가 리즈벨의 귓바퀴 끝을 스치듯이 핥았다. 느릿하고 색정적인 목소리로, 아시어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도 당신이 예쁘게 우는 걸 좋아하니까.”
그는 느렸다. 언젠가 그녀가 그랬듯, 지독하리만큼 느리게 안을 채우는 감각에 리즈벨이 더운 숨을 토해 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응?”
“아읏…… 아시어스…….”
너무 느렸다. 안달이 나 미칠 것만 같았다. 몸을 그에게 바짝 붙이려고 애를 써 봐도 그가 받아 주지 않았다.
“얼른……. 흐읏.”
그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체위였다. 그를 끌어당길 수도,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이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깊숙이 들어올 수 있는지 다 알고 있는데 얕게 문지르기만 하니 점점 더 애가 탔다.
아시어스가 즐겁게 속삭였다.
“나만 울면 재미없잖아요.”
“아…….”
“나만 울고, 나만 애원하고, 나만 매달리는 건 억울하잖아.”
리즈벨의 눈에 원망이 서렸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돌아본 얼굴은 지독히도 색에 젖어 있었다. 잿빛 눈에 삼켜질 것만 같다.
리즈벨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얼른…… 넣어 줘.”
흔들리는 가슴 한쪽을 주무르고 있던 손이 뚝 동작을 멈추었다. 리즈벨은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며 신음했다.
“얼른. 아시…….”
채 그의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반쯤 들어와 있던 그가 단번에 그녀를 가득 채웠다. 새된 신음이 터졌다.
“하윽……!”
종전까지의 교접은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시트를 엉망으로 쥐어짰다. 상체가 무너지려 할 때마다 그가 입술을 붙였다. 거친 허릿짓에 입술은 깊숙이 얽히지 못했다.
“너는…… 하. 너는 정말…….”
짐승 같은 신음이 아시어스의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아, 너는 어째서 이렇게 죽이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아시…….”
힘이 빠진 그녀가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아시어스는 몸을 지탱하지 않은 다른 손으로 리즈벨의 고개를 돌렸다.
제 쪽으로 향한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눈에는 초점이 반쯤 나가 있었다. 평소의 차분함은 간데없이, 쾌감으로 흐릿하게 흔들리는 푸른빛이 미치도록 기꺼웠다.
격한 행위에 결국 리즈벨의 허리가 아래로 푹 꺾였다. 그 바람에 비스듬히 긁어 내리자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쁜 소리. 더 깊게. 더…….
“하악!”
리즈벨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날카롭게 뇌와 온몸을 관통하는 절정의 순간에, 아시어스는 마침내 오랜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랑해요.”
“흑, 으…….”
“나는, 너를…….”
“아시어스…….”
그를 필사적으로 끌어안는 부드러운 몸이 그를 나락으로 밀쳐 냈다가 단번에 천국으로 끌어 올렸다. 그곳이 지나치게 달콤하고 서러울 만큼 평온해서…….
“사랑해요.”
아시어스는 이대로 함께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아온 긴 세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었다.
* * *
아시어스는 그 밤 이후 사랑한다는 말을 그의 말 습관인 ‘예쁘다’처럼 자주 했다. 입밖으로 내뱉지 않고는 스스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사랑해요.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에 들뜬 듯 정신없이. 혹은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그래도 사랑해요.”
무해하다고 믿고 싶은 애정. 사람이 사람에게 쏟는 애정이라는 것은 여러 형태가 있다. 리즈벨이 아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그녀도 모르는 새 받아 온 애정이 싹을 틔우고 꽃까지 피워 버린 로제스라는 이름의 애정이 하나. 그리고 가시넝쿨로 휘감아 아프게 찔러 오면서도 버겁도록 화려하게 만발한 애정이 또 하나.
리즈벨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녀는 결코 단단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못 되었다. 사랑을 받으면 금세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버려서…….
창밖에 해가 기울고 있었다. 리즈벨은 아시어스의 품에 끌어안긴 채 말없이 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왼쪽 팔뚝 안쪽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찢긴 듯한 흉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