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91
92화
Chapter 8. 유년의 별장
라타에 황성의 장서관은 따스한 가을 햇볕에 푹 잠겨 있었다.
사람을 절로 나른하게 만드는 공기에는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가득했다.
이 장서관은 대륙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마탑과 더불어 라타에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기도 했다.
구하기 힘든 모든 고서, 심지어 황실이 금지한 금서까지도 장서관에는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귀한 고서나 금서는 황제의 허락 없이는 열람할 수 없다. 물론 아시어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꽤 살 만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얼굴의 소유자가 입구에 나타나자 장서관의 사서는 냅다 허리부터 숙였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마탑주.”
“예, 오랜만입니다.”
“함께 오신 분은……? 헉.”
사서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후다닥 도로 숙였다. 그의 곁에 헬라르의 성녀가 있었다.
“그런데 정말 허가받지 않아도 돼?”
리즈벨은 아시어스를 따라 장서관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아시어스는 시답잖은 말을 들었다는 듯 실소했다.
“나나 당신이나, 이 황성에서 못 갈 곳은 없을걸요.”
그러나 사실 아시어스가 황제의 허락 없이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장서관을 설계하고 방어 마법까지 친 것이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물론 세간에는 이 장서관이 100여 년 전의 마탑주가 라타에에 준 선물이라고 알려졌지만. 그때도 지금도 마탑의 수장은 그 하나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시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정 신경 쓰인다면.”
그는 사서를 돌아보며 나른하게 눈짓했다.
“폐하께는 저희가 온 것을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아…… 네. 물론이지요.”
그 얼굴에 사서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됐죠, 리즈벨?”
아시어스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다가, 저를 흘겨보는 눈초리에 의아해졌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사람 홀리는 게 특기야?”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걸까.”
그 말에 리즈벨이 활짝 미소를 내걸었다. 아시어스는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그녀 특유의 웃음에 불안감부터 느꼈다. 그녀가 그를 휙 지나쳤다.
“나한테는 아무에게도 웃어 주지 말라고 하더니. 너는 여기저기 잘만 웃고 다니네.”
“네?”
아시어스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멈춰 섰고, 리즈벨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장서관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서 일 봐. 내가 말한 책도 좀 찾아오고.”
장밋빛 드레스 자락이 책장 사이로 쏙 사라졌다. 아시어스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제 행동 지침에 추가했다.
아무 데서나 웃고 다니지 말기. 리즈벨이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발걸음이 그녀가 향한 곳의 반대쪽으로 향했다. 리즈벨에게는 마탑의 일이라며 대강 둘러대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오늘 역대 대륙에 나타난 성녀들에 대한 기록을 열람하기 위해 장서관에 들렀다.
“어디 보자…….”
성녀에 대한 기록은 장서관에서도 특히 귀한 자료였다. 아시어스는 장서관 전체에 흐르는 자신의 마력을 더듬었다.
“헬라르의 성녀.”
입력어를 마력에 흘려보내자 즉시 신호가 왔다. 소용돌이처럼 기둥을 빙글빙글 감싸는 계단이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아시어스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한 층을 오를 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책장의 모습이 휙휙 바뀌었다.
다섯 층을 올랐을 때, 그의 눈앞에 조금 전에 내뱉은 입력어가 선명히 떠오른 책장이 나타났다.
아시어스의 걸음이 멈추자 그가 방금까지 걸어 올라왔던 계단이 한순간에 휙 사라졌다.
주위에서 일렁이던 수천 개의 책장도 소용돌이처럼 모여들더니 이내 점이 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 순간 아시어스는 작고 황량한 방 안에 서 있었다. 방 안에 있는 거라곤 텅 비다시피 한 책장 하나뿐이었다.
그는 아래에서 네 번째 칸에 듬성듬성 꽂힌 책 두어 권을 한꺼번에 뽑아 들었다.
대륙력은 성녀의 탄생을 기준으로 한다. 그가 첫 번째로 펼쳐 든 고서는 라타에가 건국되기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5,000년 전에 나타난 최초의 성녀에 대한 기록이었다.
아시어스는 말라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인 고서의 표지를 넘겼다. 유리알 너머의 회색빛 눈이 고서를 빠르게 훑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고대어였으나 그가 읽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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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어스는 두 번째 고서를 펼쳤다. 그다음으로 나타난 성녀에 대한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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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은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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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다섯 번째. 아시어스는 빠르게 고서들을 독파해 나갔다. 그가 읽은 책들이 책장 한쪽에 마구잡이로 쌓였다. 여섯 번째 성녀부터의 기록은 달랑 한 줄이었다.
어떤 성녀는 대륙력 몇 년에 나타났다는 짧은 문장으로 존재의 설명이 끝나기도 했다.
이미 예전에 전부 읽었던 내용이지만 아시어스는 빠짐없이 그 모든 구절을 머릿속에 담았다.
헬라르의 성녀는 한 세대에 한 번 나타난다. 이전 대의 성녀가 죽고 나면 성녀의 권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각성한다.
성녀는 여신의 뜻을 직접 듣는, 그리고 그녀의 권능을 자유자재로 다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그리고 성녀는 대대로 단명한다. 적게는 스물. 길어야 마흔.
“…….”
5,000년 동안 나타난 성녀의 기록을 독파하는 데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성녀의 기록은 정확히 113년 전에 끊겨 있었다.
아시어스는 바로 이전 대의 성녀의 기록을 들고 책장에서 돌아섰다. 기록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는 로브 끈을 풀어 헤치고 셔츠의 목 끝 단추까지 끌렀다.
지금 아시어스의 손에 들린 건 그가 가장 읽고 싶어 하지 않는, 보기만 해도 속이 쓰린 기록이었다.
1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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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서를 쥔 손등에 파랗게 핏줄이 돋았다. 아시어스는 입술을 꾹 깨물며 나머지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113년간, 성녀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탁. 아시어스는 고서의 책장을 덮었다. 그가 찾는 내용은 결국 없었다. 없을 걸 알면서도 부러 걸음 한 것이긴 하지만, 정말로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는 것은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아…… 좋지 않아.”
게다가 그다지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까지 선명하게 떠올라 버렸다. 아시어스는 안경을 벗고 따가운 눈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가 찾는 것은 성녀가 가진 헬라르의 권능을 소실하고도 살아남은 성녀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이제껏 단 한 명도 없었고, 방금 그 기억을 고서를 읽으며 다시 확인했다.
한 명도 없다. 단 한 명도.
헬라르의 권능을 소실하는 것은 성녀에게는 곧 죽음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 태어난 이백 명이 넘는 성녀들은 가진 성력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전부 이른 나이에 죽었다.
물론 그것은 여신의 의지였을 것이다. 성녀들은 기본적으로 여신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이니까.
여신에게 복종하는 감정 없는 마리오네트. 지상에 존재하는 여신 그 자체. 그것이 헬라르의 성녀다.
“…….”
물론 지금 저 아래 1층에서 책을 읽고 있을 여자는 그 법칙에서 다소 비켜나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한들 리즈벨의 힘이 헬라르에게서 비롯된 권능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권능을 소실한 성녀는 죽는다. 그것이 수천 년 이어져 온 정설이었다.
아시어스는 눈을 꾹꾹 누르고 다시 가는 은테 안경을 걸친 뒤, 아무렇게나 벗어서 창틀에 얹어 놓았던 로브를 휙 집어 들었다. 그의 모습은 곧 방 안에서 사라졌다.
낡은 다락에는 푸르스름한 마법의 잔재만이 반짝이며 허공으로 사그라졌다.
* * *
장서관 1층. 리즈벨은 천장까지 까마득하게 뻗은 거대한 책장들 사이를 걷고 있었다. 옆구리에는 두꺼운 책 두어 권을 낀 채였다.
장밋빛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릴 듯 가볍게 팔락였다.
리즈벨은 창가의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장 위에 놓인 책을 펼치고 읽어 내려간다. 평화로운 오후의 공기가 장서관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리즈벨은 문득 저를 향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왔어?”
언제부터였는지, 창가 앞에 아시어스가 기대서 있었다.
그녀가 저를 보자 남자의 얼굴에 반사적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리즈벨은 읽던 책을 덮었다.
“왔으면 인기척을 내지.”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아시어스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탁자 위에 네댓 권의 낡은 고서가 나타났다.
“성력에 관한 연구. 바리엔 성전의 역사. 대륙 고대사. 찾아오라던 것들 맞죠?”
“응, 고마워.”
리즈벨은 로 먼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요즈음 장서관에 있는 모든 헬라르와 관련된 고서들을 독파해 나가는 중이었다.
기간은 1년. 그 안에 할 수 있는 건 전부 시도해 봐야 하니까.
헬라르와 헬라르의 딸은 성력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여신을 죽일 방법은 헬라르가 성녀를 지배하고 있을 때, 성녀의 권능으로 헬라르를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권능을 소실한 성녀는 그녀의 짐작대로 죽음을 맞는다.
그래서 리즈벨은 다른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그녀가 희생양이 되지 않으면서도 헬라르를 봉인할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