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95
96화
* * *
성전 순례 일정은 금세 정해졌다.
성녀가 대륙의 성전을 순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 행보에 마탑주가 함께한다는 것은 이례적일 테지만, 리즈벨은 무려 113년 만에 나타난 성녀였다. 그녀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목적지는 두 군데였다. 라타에 남부의 네키엘 성전. 그리고 중부에 위치한 라타에의 두 번째 심장, 바리엔 성전.
“네키엘에 마탑 소유의 별장이 있어요. 경관이 좋기로 이름난 데다 남부의 분지 지역이라 따듯하기도 해서 겨울을 나는 데 제격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나 어쩐지 아시어스는 성전 순례보다는 다른 것에 들뜬 것처럼 보였다.
“마침 네키엘에 볼일도 있으니 이곳을 먼저 가죠. 에엘보다 훨씬 따듯하니 당신 감기에도 좋을 거예요. 주위 경치도 정말 예쁘고.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
리즈벨의 눈초리가 의구심을 띠고 가늘어졌다.
“역시 이거, 그냥 요양인 거지?”
“겸사겸사. 그리고 당신이 쉬어야 하는 건 맞아요. 아직 미열이 있는걸.”
어쩌면 감기라는 건 사실 요양을 가야 할 정도로 큰 병일지도 모른다. 리즈벨은 심각하게 고민하다 정말 멍청한 생각이라는 걸 알고 헛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그렇게 경로가 정해졌다. 남부 네키엘 성전을 방문한 뒤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내년 봄에 있을 계절 제의에 맞춰 중부의 바리엔 성전으로 향한다.
네키엘까지는 이동 시간만 마차로는 일주일, 말을 아무리 빨리 달려도 꼬박 사흘이 넘게 걸렸지만, 그들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아시어스는 손끝으로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실을 자아내듯 마력을 엮었다. 몇 초 지나지도 않아 푸르스름한 장거리 이동진이 떠올랐다.
“별장에 웬만한 건 다 갖춰져 있으니까 굳이 짐을 챙길 필요는 없어요. 뭐, 없는 건 만들면 되고.”
“네 마법은 참 쓸모없는 부분에서도 편리한 것 같아.”
“당신과 관련된 것 중에 쓸모없는 부분은 없어요.”
“요즘엔 예쁜 말만 하네, 아시어스.”
“당신이 훌륭하게 길들인 덕이죠.”
여행용 로브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나른하게 턱을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키스해 줄 걸 아니까. 틀렸나요?”
늘 삐딱하게 반항을 일삼던 짐승이 예쁘고 얌전하게 굴어 주는 건 기꺼운 변화였다.
리즈벨은 당연한 듯이 허리를 낮추는 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 * *
네키엘은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영지 자체는 평지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산간이라 농사를 짓기에는 불리했다.
그러나 영지를 둘러싼 산과 골짜기가 대륙에서도 이름난 장관이라, 네키엘은 1년 사계절 늘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영지를 먹여 살리는 수입의 반절은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라타에에서 가장 많은 외지인이 몰려드는 곳이란 뜻이기도 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는 늘 사건이 터지기 마련이다.
아시어스는 네키엘에 발을 딛자마자 공기에 떠도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챘다.
“이상하네.”
리즈벨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활기 넘치는 북적북적한 번화가에 불길한 암운이 감돌고 있었다.
아시어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당신도 느껴져요? 이 고약한 기운.”
“……낯설지 않아.”
기시감이 날카롭게 살갗을 찔렀다. 리즈벨의 푸른 눈이 차분하게 주위를 훑었다. 그들이 마탑에서 이동한 곳은 네키엘의 가장 중심지라는 천사의 광장이었다.
천사들의 나팔에서 시원하게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육각형의 광장은 관광객들과 현지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리즈벨은 광장을 둘러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위가 아니다. 아래다.
아시어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땅이 이상하네요. 여긴 성역 일부라 삿된 힘이 침범할 수가 없을 텐데.”
잿빛 눈이 네모진 돌로 덮인 광장 바닥을 훑었다. 그의 눈에는 네키엘의 땅을 뒤덮은 마력의 그물이 뚜렷하게 보였다.
결코 섞일 수 없는 4색의 마력이 아이가 가지고 놀다 버린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었다. 마법사 실종 사건이 일어난다더니 뭔가 수상쩍은 것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을 돌아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리즈벨, 당신은 성전으로 가는 게 낫겠어요. 나는 여기를 좀 뒤엎어 봐야 할 것 같네.”
리즈벨은 흘끗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그녀도 아시어스를 성전에 들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헬라르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건 아시어스에게 좋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이따 보자.”
하지만 헬라르와 관련된 일을 제외한 모든 일에는 걱정이 불필요한 남자였다. 리즈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며칠 전 네키엘 백작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네키엘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중 하나였다.
최근 네키엘의 기세는 꽤 흉흉했다. 약 두 달 전부터 백작가에서 고용한 마법사가 하나씩 실종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저택에서 살인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그 사건이 무려 라타에 마탑주를 불러올 줄, 네키엘 백작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마…… 마탑주께서 직접 오실 줄은…….”
네키엘 백작은 안절부절못하며 허리를 숙였다. 아시어스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저택을 휘 둘러보았다.
네키엘 백작가는 영세한 지방 귀족 가문이긴 했으나 꽤 유서가 깊었다. 저택 내부는 그의 어린 시절 속에 남은 기억과 거의 유사했다.
아시어스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네키엘 백작의 얼굴에서 까마득한 옛날, 그에게 친절했던 네키엘 가주의 얼굴을 보았다.
“마탑 소관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예. 제 저택에서 마법사 간의 결투가 일어난 정황이 발견된 터라…….”
“안내하시지요.”
아시어스는 더 말하지 않고 턱짓했다.
네키엘에는 온통 유년의 기억이 묻어 있다. 하다못해 몇 번 방문하지도 않았던 백작저에마저 어린 날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이곳으로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리즈벨이 오고 싶다고 했으니까. 그 사실을 되새기면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네키엘 백작이 그들을 저택 안쪽으로 안내했다.
“현장은 저택의 1층 응접실입니다. 살해된 자는, 이미 보고를 들으셨겠지만 제가 직접 고용한 제국 출신의 마법사고요. 살인자는…… 집사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최근 네키엘로 관광을 온 피람 출신의 마법사인 것 같답니다.”
네키엘 백작의 상황 설명은 사실 필요 없었다. 아시어스가 저택에 들어선 순간부터 저택 전체에 기억 복구 마법을 걸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초록빛 마력이 기다란 복도를 순식간에 타고 퍼졌다. 벽면으로, 계단을 타고 위아래로, 저택 지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전부. 마침내는 거대하게 얽힌 그물이 되어 저택 전체를 감쌌다.
저택에 깃든 기억이 천천히 시전자에게로 흘러 들어왔다.
라제가 주둥이로 아시어스의 무릎을 툭툭 쳤다.
[무리하지 마라, 아시어스.]“너는 나를 무시하지 마라, 라제. 이 정도는 아직 괜찮아.”
퉁명스러운 대답에 라제가 팽 코웃음을 쳤다.
[등판에 시커먼 구멍을 달고 사는 놈이 말이 많…….]아시어스는 대꾸 없이 라제를 발로 걷어찼다.
하지만 라제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인간의 기억을 읽는 것보다 세 배는 고위 마법인 사물의 기억 복구술은 상당량의 마력이 필요할뿐더러, 정신력도 상당히 요하는 작업이었다.
아시어스의 상태가 멀쩡했다면 이쯤이야 숨 쉬는 것만큼이나 간단했을 것이다.
아시어스는 아릿하게 이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살인자가 피람 출신의 마법사라고요? 글쎄, 아닌 것 같은데.”
저택 전체에 얽힌 초록빛 마력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물에 깃든 기억들이 쉼 없이 아시어스에게 흘러들었다.
“하, 하지만 마법사 간의 결투가 이곳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미처 지워지지 못한 마법진의 흔적들이 여기도…… 또 여기도!”
네키엘 백작이 가리킨 곳에는 과연 반쯤 맺어지다 만 수식들이 문신처럼 남아 있었다.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응접실은 사건이 벌어진 뒤로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시어스는 그것들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저택의 기억 속에서,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핵이…….”
아시어스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네키엘 별장에 봉인되어 있어야 할 ‘핵’이었다. 별장에 깃든 113년 전의 기억과 마력이 봉인된, 멸문한 옛 마법 가문의 유물.
별장을 드나드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그의 명으로 교대로 지켜 왔던 그것이…….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라제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왜 그러냐, 너?]대꾸하지 않고 홱 돌아선 아시어스는 이동진을 그려 놓고 순식간에 공간을 타 넘었다.
그는 단숨에 네키엘 골짜기의 별장 맨 꼭대기, 차가운 골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
그가 직접 몇 겹에 걸쳐 걸어 둔 봉인이 처참하게 깨어져 있었다.
아시어스의 인상이 왈칵 구겨졌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결론을 냈다.
핵을 도둑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