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96
97화
* * *
아시어스는 곧장 별장을 나와 네키엘의 중앙 광장에 도착했다.
네키엘에 발을 들이자마자 느낀 위화감의 기저에는 별장의 핵에 잠들어 있던 마력, 즉 옛 공가가 다루었던 검은 마력의 결집체가 있었다.
그 위에 다른 마력이 수십 겹 겹쳐져 있어 단번에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거대한 흑사자의 모습을 한 라제가 돌풍처럼 거대하게 휘몰아치는 마력의 그물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꼬이고 꼬인 마력은 오랜만인데. 전부 섞이고 뭉개져서 구별할 수가 없다.]“어쩔 수 없지. 한 겹 한 겹 들어내는 수밖에.”
별장의 핵을 도로 긁어내기 위해서는 가장 위의 마력부터 걷어 내는 수밖에 없다. 꽤 귀찮은 작업이었다.
아시어스는 얼굴을 굳힌 채 우선 네키엘을 감싸는 결계를 쳤다. 라제가 혀를 찼다.
[핵을 훔쳐 가다니. 그것도 나름대로 대단한 놈인데.]“백작가를 방문했던 건 피람 출신의 젊은 청년 마법사라고 하더라. 악마의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인간은 진짜 몇 없는데, 몇 대 쥐어박은 다음에 후계자로 삼으면 딱이겠어.”
아시어스는 분수대에 걸터앉아 허공에서 실을 자아내듯이 마력을 올올이 뽑아냈다. 손가락이 음률을 다루듯 우아하고 유려한 궤적을 그렸다.
물 흐르듯 끊김 없던 동작이 순간적으로 박자를 놓쳤다. 아, 하는 짧은 신음이 터졌다.
아시어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놓쳐 버린 마력의 가닥을 찾기 위해 다시 허공을 더듬었다. 그러나 길쭉한 손가락은 종전과는 달리 허무하게 빈 곳만 긁었다. 그는 잠깐 굳었다가, 이내 피실 웃었다.
“안 되네.”
요즘 이런 일이 잦다. 아시어스는 마력을 탐색하는 것을 잠시 관두고 분수대에 앞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긴 다리를 쭉 펴고 분수대 아래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었다.
[괜찮은 거냐, 아시어스?]“아직은.”
검은 돌 사자는 움직임을 멈추고 유심히 주인을 관찰했다. 아직은 괜찮다고 아시어스는 말했지만, 사실 괜찮지 않은 걸 알고 있다.
아시어스는 요즈음 종종 마력을 읽지 못했다. 마력의 흐름을 보지 못하면 마력을 얽어 진을 만들 수가 없다.
아시어스는 마력의 흐름을 봄과 동시에 자유자재로 엮어 눈 깜짝할 사이에 대단위 마법을 구사해 내는 희대의 천재였다. 그런 인간이 마력의 운용에 문제를 겪는다?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서서히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뜻했다.
아시어스 뤼켄의 몸 한중간에는 시커먼 구멍이 있다. 마력과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구멍이. 이미 자연의 섭리를 한참이나 거스른 인간이 또다시 섭리를 어긴 대가였다.
라제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때 너를 말렸어야 했어.]로제스 발디마르를 살린 것을 말하는 것일 테다. 아시어스는 희게 웃었다. 뭉툭한 손끝이 소득도 없이 분수대의 대리석 바닥을 긁었다.
“네가 말렸어도 어차피 안 들었을걸.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리즈벨이 간절해서.”
잿빛 눈에 다시금 마력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시어스는 시야가 완전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대꾸했다.
“그리고 100년을 넘게 살았으면 슬슬 고장 날 때가 됐어. 굳이 죽어 가는 인간을 되살리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망가졌을 거야.”
아시어스는 애초부터 생에 별다른 미련이 없는 인간이었다. 생을 이어 가는 이유는 그저 바라는 형태의 죽음을 위해서. 그 외의 이유는 없다.
다시 회복된 마력의 결계가 드넓은 네키엘의 땅을 뒤덮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리즈벨은 성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키엘 성전은 야트막한 구릉 위에 지어져 있었다.
높은 돌담이 성전 전체를 둘러쌌다. 외벽은 모두 흰 돌로 덮여 있었고, 하얀 대리석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직 여름의 푸르름이 가시지 않은 주위 풍경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건축물이었다.
라타에에서 두 번째로 큰 성전이라 하더니 과연 그 규모부터 범상치 않다.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성전의 신관들이 입구 앞까지 그녀를 마중 나와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신관이 그녀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
“언젠가는 나타나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성녀님의 존재가 그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설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노신관의 눈가가 촉촉했다. 리즈벨은 그 모습을 보며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에 휩싸였다.
여신의 성력 한 점 얻지 못하였으나 여신에게 기꺼이 생을 바치리라 맹세한 자들. 무려 1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타나지 않는 성녀를 대를 이어 기다려 온 이들이다.
이들은 헬라르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그녀를 믿는 걸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제단으로 모시겠습니다.”
헬라르의 수족들이라고 생각하니 영 정이 가지 않았다. 그녀를 여신의 현신처럼 떠받드는 모습도 썩 유쾌하진 않아, 리즈벨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입구를 통과하니 널따란 뜰이 나타났다. 노신관은 그곳을 ‘이방인의 광장’이라고 불렀다.
“성전 본당은 성스러운 벽으로 둘러싸여 이방인의 광장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성녀님, 이쪽으로.”
본당은 한 겹의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노신관은 ‘성스러운 벽’이라 했지만 성스럽다기엔 다소 초라해 보였다.
“네키엘 성전은 113년 전 헬라르께서 마지막으로 지상에 강림하셨던 곳입니다. 그 뒤로 성녀께서 나타나지 않아 대륙의 성전들은 그 기운이 쇠하여 이단자들의 창 아래 짓밟혔으나 바리엔과 이곳 네키엘의 성전은 헬라르의 기운으로 지금껏 무너지지 않고 버텨 오고 있습니다.”
리즈벨은 성전이 이단자들의 창에 짓밟힌 게 아니라 마탑주의 손에 무너진 거라는 말을 굳이 보태지는 않았다.
성스러운 벽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자 성전 본당이 눈앞에 드러났다. 본당의 크기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게다가 외벽에 금이 가 있고 옆면이 반쯤 함몰되어 있었다.
“왜 성전이 이 꼴이 난 거야?”
“송구합니다. 이곳은 사제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장소라, 지난 세월 동안 복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이 꼴이 난 건데?”
노신관은 황폐한 본당의 광경에 그녀가 노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설명하는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113년 전…… 헬라르께서 강림하실 때, 거대한 성력에 버티지 못하고 성전이 훼손되었습니다. 기록에는 여신께서 대노하셨다고 쓰여 있습니다.”
여신의 분노. 113년 전. 리즈벨은 노신관에게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막 본당으로 올라선 순간, 묘한 기시감이 칼날처럼 뒤통수를 베었다.
“……!”
리즈벨은 홱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가 감각을 예민하게 긁었다. 리즈벨의 시선이 제단 아래에 닿았다. 그녀는 물음에 대답하려는 노신관에게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잠깐. 이 아래에 뭐가 있어?”
“지하 말씀입니까? 헬라르께 바치는 제물들을 가두어 놓는 우리가 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제를 올린 지 오래되었으니까요.”
노신관의 대답과 동시에 기시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착각…… 이었나. 리즈벨은 본당과 제단을 노려보다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하려던 말, 계속 해.”
“예. 113년 전, 대륙력 5122년. 전대 성녀께서 뤼켄가의 악마 소환에 휘말려 목숨을 잃으신 직후, 대노하신 여신께서 직접 성전의 사제들을 희생하여 지상에 강림하셨다고 기록은 말합니다.”
노신관이 허둥지둥 읊는 말이 귀에 박혔다. 헬라르가 성전의 사제들을 희생하여 지상에 직접 강림했다. 직접?
“전대 성녀가 어떻게 죽었다고?”
“뤼켄가의 악마 소환에 휘말려…….”
두 단어가 느릿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뤼켄. 악마.
뤼켄……? 리즈벨은 잠시 그 성을 입 속으로 되뇌어 보다, 이내 하얗게 질렸다. 아시어스의 풀 네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시어스 뤼켄.
“뤼켄…….”
그의 성이었다. 우연의 일치라 하기에는 ‘악마 소환’이라는 지점이 걸렸다. 리즈벨의 푸른 눈에 날이 섰다. 그녀는 노신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명령했다.
“더 설명해 봐. 그 뤼켄이라는 가문과 헬라르의 강림에 대해서.”
노신관의 설명은 리즈벨이 라타에의 장서관에서 발견하지 못한 정보였다. 뤼켄 공작가. 그 가문은 라타에 황실의 오른팔이자, 마탑이 출현하기 전 라타에 마법의 역사를 견인했던 가문이었다.
마력의 3색은 물론 악마의 검은 마력에 대해서도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마탑의 전신이라 봐도 무방한 마법 가문.
대륙에서 상대할 가문이 없이 강력하던 그 공가는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단 5일 만에 세상에서 깨끗하게 존재가 지워졌다.
‘신벌’이었다.
뤼켄가의 악마 소환에 성녀가 휘말려 사망하자, 진노한 여신은 뤼켄의 성을 가진 이들을 전부 단죄하였다.
여신이 성녀 없이 지상에 강림하는 과정에서 네키엘 성전의 신관 500여 명이 희생되었다.
“네키엘에는 아직 몰락한 옛 공가의 별장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마탑의 소유이지요. 그 별장에서 첫 번째 단죄가 이루어졌습니다.”
리즈벨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마탑 소유의 별장.
“뤼켄의 마법사들은 제국 곳곳으로 도망하였으나 결국에는 모조리 처단되었습니다. 그 사건을 마지막으로 성녀의 맥은 끊겼고…… 성력은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마탑이 세워지기 전까지 10년간은 대륙에 성력도, 마력도 사라진 암흑기였다고 합니다.”
살해당한 성녀. 악마를 소환한 마법사 가문. 진노한 여신.
리즈벨은 막힌 목으로 간신히 소리를 짜냈다.
“그럼 살아남은 마법사는…….”
“없습니다.”
노신관이 대답했다. 없다고.
아니다. 있다. 리즈벨은 섬광처럼 내리꽂히는 깨달음에 숨을 멈추었다.
113년 전의 참극에서 살아남은, 그리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마법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