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birth of the Hero’s Party’s Archmage RAW novel - Chapter (272)
용사파티 대마법사의 환생-272화 (외전)(272/280)
외전 1화.
잊혀진 전쟁, 거미 군주 토벌전 (1)
심연의 군주를 입에 담거나 글로 기록하는 것은 금기이다.
군주에 대한 공포 어린 수런거림은, 그 힘이 되어 종국에는 봉인의 균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역사서들은 내 명에 따라 이 이야기를 간략하게 한두 줄 문장으로 끝마치나…….
나는 지금 여기에 진실을 기록해 두고자 한다.
저 먼 시대 언젠가.
이러한 이야기조차도 필요한 날이 올 것이므로.
* * *
하르바도니아에서 황도로 돌아오는 동안 가끔씩 꿈을 꾸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보자. 자주, 아주 자주 ‘그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암흑이고 절망이며 광란이며 심연(深淵)이었다.
남북에서부터 휘몰아쳐 세계를 뒤덮는 화산재와 눈보라.
눈보라 속에서, 천지가 기이하게 일그러지고 또 화산재 속에서 만물이 섬뜩하게 녹아내린다.
그리고.
그 얼어붙은 극지의 동토와 불타는 열대의 화산재를 지배하는 존재들의 발치에서…… 고통 속에서 죽은 아이들이 보인다.
아키.
넨.
미르.
나의 아이들이 절규하고 신음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무력감의 비명을 내지를 때 꿈은 달아나듯 사라진다.
꿈이 끝날 때면, 온몸에서 열이 끓었고 사지가 빠질 듯이 쑤셨다.
단순한 악몽일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연속성이 짙어.
하지만 예지몽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나에게 그 정도 능력이 있을 리는 없어.
“레인, 괜찮은 거냐?”
“북부에서 돌아오신 이후로 상태가 이상하십니다. 역병에 걸리신 거 아닙니까?”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학우들, 릴리안 카라인과 로건이 걱정스레 말을 걸어왔다.
짐짓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으나 창백한 안색과 여윈 얼굴을 지울 수는 없던 모양이다.
군무회의실로 향하는 주랑에서 결국 솔직하게 한숨을 쉬어야 했다.
“내가 지금 뭘 해야 하는지를 알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군무회의에 참석해야지. 마도성 각하로서.”
“그런 말이 아니고…….”
긴장을 풀라고 한 장난이었을 것이다.
거기에조차 진지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지금 스스로에게 얼마나 여유가 없는지를 깨달았다.
군무회의에는 황하사무성 전원뿐만 아니라 각 병부 요직 인물들도 모두 참석했다.
평시라면 절대 볼 수 없을, 특별한 인물로는 하얀 늑대들의 수장인 키란 울프 블라도가 있었다.
“각지로 내보낸 정찰대로부터의 정보를 취합했습니다. 네크라크네뿐만 아니라 옛것들도 깨어나 설원을 가득 메우고 있어요. 정찰대 10팀 중 5팀은 행방불명입니다. 예전에 백도령이 깨어났을 때 이상입니다. 놈들을 통솔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웅성거리는 목소리에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총사령관, <설령장성>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설령장성>은 망자와 옛것들을 막아내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옛 귀족이 깨어난다면…… 확답을 드릴 수 없겠군요.”
“하지만 걱정할 게 뭐가 있겠소? 우리에게는 용현이 있지 않소.”
존경 어린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며 안도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새어나왔다.
“3대 현자인 용현의 힘이라면 신들의 봉인을 추스르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믿소.”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나에게 이런 힘을 준 건 바로 이때에 봉인을 어루만지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뿐일까? 정말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이런 힘을 갖게 된 데에는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아직 저 자신에게도 확실치 않지만…… 그렇기에 수룡 성하를 만나 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관료들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황제 앞에서 태연하게 하품을 하던 렘이 말했다.
“그래서, 정확히 뭘 어떻게 하자고?”
“한 달 안에 이데아 반도로 가서 성하를 뵙고 오겠어.”
“한 달 동안 하르바도니아를 저대로 내버려 두겠단 겁니까? 일이 어떻게 될지 알고?”
이게 얼마나 위태로운 판단인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어린 날, 긴 잠에서 깨어난 샤르’카스가 얼마나 빠르게 세력을 불려 나갔던가.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도 그 판단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어.
머릿속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려 할 때마다, ‘그 꿈’의 내용이 떠올라 어깨를 붙잡는다.
우스운 일이다.
진리를 대면한 자로서, 이 땅에서 누구보다 이성적이어야 하건만 우둔한 짐승도 아니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다니.
“그 한 달 동안 거미 군주가 봉인에서 풀려나기라도 한다면?”
황좌의 옆자리에서 오만하게 꼰 다리를 건들거리던 크리스타 에이진이 입을 열었다.
황후로서의 지위를 제쳐두고, 마법사로서의 소질만으로도 이미 이 시대의 입지전적인 인물로 군무회의 참가 자격을 쥐었다.
인간이 아닌 규격 외의 존재로 치부되는 용현과 달리, ‘같은 인간’ 중에서는 현세대 가장 큰 재능을 지닌 마법사였으므로.
라이다는 황후의 재능과 실력을 자랑스러워했고,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공적인 자리마다 데리고 다니려 했다.
“그럴 경우 황후마마께서 실력을 발휘하셔서 시간을 벌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육체적으로 얼마나 성장을 했든, 여전히 직설적인 칭찬에는 약한 편이었다.
“뭐…… 흠, 뭐, 그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내가 누군데?”
크리스타가 당차게 대꾸하자 라이다 황제가 크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 지금이나 터무니없을 정도로 막무가내로군. 좋다. 재가하지.”
“폐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봉인진을 시급히 점검하는 걸 우선해야지요, 어찌…….”
“하지만 한 달이다. 그 이상은 지체할 수 없어. 계엄 칙령을 선포하고 전국적 무력을 동원할 예정이다. 자네는 반드시 자리에 있어야 해.”
* * *
<화염만리(火焰萬里)>에서 아키레아가 3년간 한 일은 장엄한 자연의 흐름을 깨닫는 것이었다.
작열하는 태양.
그 아래서 발작하는 불의 벽.
대기가 건조하다 못해 희박해지는 고열의 사구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생명의 원대한 시작과 끝을 탐구했다.
「우리는 불이다, 아키레아. 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옛 불꽃 그뤼다오네는 이따금씩 그 사구로 찾아와 어려운 질문을 던지곤 했다.
“불을 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뤼다오네는 아련한 미소를 남기고 떠나가곤 했으나 쟈칸은 그에 비해 엄숙한 편이었다.
「불은 생명의 시작이다. 불이 없으면 세상은 어둠에 잠긴다. 네가 불이 되어야 한다. 아키레아,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아직 잘 알 수 없었으므로 대답하지 않았다.
용의 언어는 구어를 쓸 때조차도 수사(修辭)가 장려하고 형식이 복잡한 게 특징이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자주, 먼 대륙과 바다 저 너머에 두고 온 동생들이 떠올랐다.
잘 자라고 있을까?
그립다며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수련 중이라며 진룡들께서 내쫓아 버릴까?
「우선 너는 너 자신을 알아야 한다. 네 생명의 기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동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버지 생각은 절실할 정도로 숱하게 났다.
함께 보고 다니던 세상들에 대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바로 방금 전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
그 순간순간마다 다른 누가 한 명 더 있지 않았던가?
‘누구지?’
자신과 마찬가지로, 화염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
혹한의 나날 가운데 늘 자신을 품고 이마에 이마를 맞대며 빙그레 웃던…….
형태는 분명치 않으나 그 존재감만큼은 어찌나 이렇게나 아늑하고 또 확실한지…….
‘누구인지 모르겠어.’
* * *
요정들이 기거하는 이데아 반도는 과연 신비의 비경이었다.
“용현 레인 루드윅, 장로회에서 당신의 방문을 허가했습니다. 하지만 당신뿐입니다.”
요정 종족에게는 아홉 지파(支派)가 존재했다.
신들의 시대에 신들을 처음으로 도운 영장들을 그 시조로 둔 요정들의 자존감은 지극히 높았다.
첫 번째 자손, 요정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며 신들의 적장자를 자처했다.
“티렌데 수문을 엽니다.”
물론 요정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고귀한 생김새와 우유보다도 새하얀 피부색을 지니고 가장 숫자가 많은 백요정. 5지파가 속한다.
물가에 살며 푸른 머릿결과 투명한 피부가 특색으로 물길을 다스리는 청요정. 3지파가 속한다.
이들은 개방ㆍ개혁을 앞세워 수많은 경제특구를 열어서, 지금은 인류의 정재계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이데아 반도 북부를 차지한 흑요정은 변함없이 폐쇄적이고 신비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흑요정.
옛 전통의 수호자이자 세계수의 하수인들.
요컨대 같은 요정들조차 배척하는 그들이, 입항을 허가한 건 심히 이례적인 일이란 소리다.
하지만 허락된 건 나뿐이었으므로, 상선에서 거룻배로 옮겨 탄 뒤 염동력으로 노를 저어야 했다.
사라진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밀림이. 그리고 신록을 밧줄처럼 엮어 짠 부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암록색 망토를 두르고 곡궁을 찬 흑요정 다섯이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 이름은 애설키나. 백스물다섯 번째 수종자(隨從者)로 당신을 세계수까지 안내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흑요정의 땅은 인류가 욕망이 아닌 사랑으로 자연을 대했을 모습을 품고 있었다.
나무 위로 저택들이 지어졌으며, 각 저택들은 현수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자연을 해치는 구조물은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고, 요정들은 짐승들을 벗 삼아 행동했다.
“당신이 검은 태양께 축복을 받았다고 들었으니, 이 아이도 당신을 따를 겁니다.”
이건 설마 전설의 엘크?
사슴보다 허우대가 훨씬 크고 서너 갈래의 뿔은 숲의 수호자로서 가공할 위력을 뽐낸다.
흑요정들은 말 대신 엘크를 탄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구나.
“정말 타봐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려고 데려왔지요. 네메테스. 아주 순한 아이죠.”
“정말로?”
눈을 빛내자 애설키나가 네메테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요정어로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엘크가 다리를 굽혔다. 그 엘크를 타고 신성한 숲길을 거니는 건 끝내주는 경험이었다.
아키랑 넨과도 같이 올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게 못내 아쉬웠다.
제대로 된 사회 기반 시설이 없었으므로, 세계수가 위치한 예라나타 호수에 이르기까지는 숲길을 9일 동안 걸어야 했다.
“당신들은 다른 요정들과 다르군요.”
“무슨 뜻입니까?”
“다른 요정들 특유의 그…… 오만함이 없어요. 그리고 백요정과 청요정은 활을 비겁하다면서 안 쓰지 않습니까.”
야영을 위해 그물침대를 나뭇가지들 사이에 설치하던 애설키나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신들을 섬겨야 할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불경한 일입니다. 저희는 제사장 지파, 그런 일은 용납되지 않지요.”
궁금한 게 상당히 많았으나, 질문을 허용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많이 물을 수가 없었다.
영 딱딱하단 말이지…….
흑요정들은 진리를 대면한 자로서 나를 대했고, 그런 자에 걸맞은 품위를 바라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9일이 지났을 무렵.
문득 햇살을 방울방울 부서뜨려 지면에 흩뿌리던 나뭇잎의 지붕이 사라졌다.
마침내…… 숲이 끝났다.
여긴 거대한 공터인가?
세계수가 앞에 있나? 혹시 잠깐이라도 미르를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 저 너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뭔가, 하고 있는데 애설키나를 비롯한 요정들이 그 앞에 한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용의 현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만 물러가도 좋다.”
사내가 이쪽을 돌아보며, 법복의 긴 소맷자락을 팔랑이며 양손을 맞잡아 보였다.
그 순간의 거룩한 위압감…….
여태껏 거대한 심연의 존재들과는 원천적으로 다르나, 그만큼 강대하며 또 환한 존재감.
“자네의 별호가 용현?”
“……?”
“재미있군. 신들께서 사사(士師)로 기름을 부을 때 나에게 내린 별호는 청은(靑恩). 피차 확인을 하지.”
확인하다니.
무엇을, 이라고 묻기도 전에.
청은의 사사가 성언을 읊으며 양손을 움켜쥐었고, 그 순간 신들의 힘이 이 땅에 체현되었다.
광화(光華).
수없이 피어나는 은빛의 꽃들.
공터라고 여겼던 지천을, 눈부시게 소용돌이치는 꽃의 물결이 가득 메우며 달려들었다.
“첫 번째 자손인 우리는 너희 인류와 달리 모든 신들의 기적을 다룰 수 있지.”
그 꽃이 발목을, 정강이를, 손목을, 사지 전체를 결박하려고 한 것도 한순간.
“아수라 실혼경.”
환상의 용이 천공을 가르며 용솟음친다. 황금빛 용대가리가 토해내는 신성한 파장.
그 빛의 끝에서.
세차게 나부끼던 꽃들은 이내 꽃잎을 모조리 잃어버리고는 끝내 힘없이 낙화했다.
아수라의 다른 두 용대가리가 청은의 사사를 노려보자, 사사가 손을 내저으며 피식 웃었다.
“정말 대단한 힘이군. 이제 됐어. 피차 서로가 누구인지 확신했을 테니.”
무슨…….
어이가 없었다.
“대화로는 안 되는 겁니까?”
“이 한 합으로 나는 네가 용현이라는 걸, 그리고 넌 내가 청은의 사사라는 걸 확인했지. 몇 마디 대화보다 이쪽이 더 효율적이지 않나? 심연은 남을 속이는 데 도가 텄거든.”
청은의 사사가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이 세계의 어떤 물보다도 푸르고 맑은 보석이었다. 입을 맞추자 보석 위로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러기 무섭게, 공터라 생각했던 세계가 광입자로 흩어졌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공터가 아니라 호숫가였어.
그렇다면 이곳이…….
호수 위로 나무 한 그루가 아름다운 자태로 솟아올라 있었다.
가까이에서는,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 나무가 숨을 쉬듯이 나뭇잎들이 규칙적으로 살랑거린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그 위태와 자태만으로도 단번에 알았다. 세계수다.
결정적으로 백창궁 세르웨본과 같은 기운을 품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미르!”
세계수의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 고대 용언의 낡은 두루마리를 읽는 순백(純白)의 아이.
미른가디아.
새하얀 속눈썹 속에서 맑은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가지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저편의 기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만큼, 수심 또한 알 수 없는 호수였건만…….
미르는 고요한 파문을 일으키며 이쪽으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나 싶더니 문득 멈춰 섰다.
“미르?”
그러더니 용의 형태로 변해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 다시 용인의 모습을 취했다.
그러고는 다시.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또는 독서 중에 심히 귀찮은데 마지못해 움직인다는 듯한 거동으로 가지에서 내려오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시선은 짐짓 두루마리에 꽂힌 채였는데, 어쩌다 한 번씩 이쪽을 흘끔 올려다보는 걸로 진심이 엿보였다.
자식이…….
속마음 감추기는…….
그것도 저렇게나 엉성하게…….
너무 귀여운 나머지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청은의 사사가 지켜보고 있는지라 미르의 위엄을 살려주는 게 좋단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나 미르지.
미르는 미른가디아, 하얀 진룡이 아닌가.
광룡정교회가 인류에게 신의 대리인이듯, 요정들에게는 백룡이 신의 대리인이었다.
저것 봐라. 청은의 사사는 곧장 공손히 한쪽 무릎까지 꿇었지 않은가.
그래서 헛기침으로 웃음을 간신히 수습한 다음, 미르와 엄숙한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다.
“예리세리카 성하를 뵈러 왔는데, 지금 어디 나가셨어?”
미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튕기자, 호면 위로 순백색 등딱지를 가진 거북이들이 일렬로 늘어서 세계수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용은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하는 존재,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없다.
그래, 없어야 하는데.
한 달 만에 성장한 일면을 엿보게 된 것 같아 괜히 가슴이 부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햐, 녀석…….
입꼬리가 찢어질 것 같잖아. 어쩔 거야, 이거.
“현재 꿈의 세계에 계심. 알현을 원한다면 꿈의 세계로 들어가야 함.”
“어떻게?”
“세계수에 신체 부위를 접촉시키는 방법이 있음. 인간에게는 가장 효율적.”
에라, 모르겠다.
등으로 사사의 시선을 가린 다음, 오랜만에 머리를 마구 헝클어 제비집으로 만들어 놓았다.
응우…… 힘센 손길에 짧게 목소리를 흘렸을 뿐, 헤어지기 전과 마찬가지로 얌전했다.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감정을 표정으로 내비치지 않으니 진실은 저 너머에.
“그러면 다녀올게.”
거북이들의 등딱지를 밟고 세계수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꿈의 세계라…….
숨을 깊숙이 들이마신 이후, 따스한 숨결이 흘러나오는 세계수의 줄기 위로 손을 얹을 때 미르의 경고가 들렸다.
“조심해야 함. 꿈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원초(原初)의 세계. 인간의 정신으로 오래 머무르면 심연의 표적이 될 수 있음.”
그때 그 경고를 진지하게 명심했어야 했다. 왕의 심연에 붙잡히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