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birth of the Hero’s Party’s Archmage RAW novel - Chapter (273)
용사파티 대마법사의 환생-273화(273/280)
외전 2화.
잊혀진 전쟁, 거미 군주 토벌전 (2)
수룡 예리세리카가 세계수의 가지 위에 걸터앉아 호수를 굽어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환각을 보나 싶었다.
바뀐 풍경이라고는 하나 없었으므로.
하지만 수면 위로 비치는 수많은 풍경들을 보고 이곳이 ‘순백의 꿈’ 내부라는 걸 확신했다.
더없이.
고결할 정도로 푸른 머리칼.
거룩한 나뭇결을 그리며 돋아난 용 뿔과, 이 세상 물질이 아닌 청음의 비단옷.
호수 저 아래편, 어떠한 삶을 지켜보던 신룡이 인자한 목소리를 냈다.
「이제 정말로 그분과 같은 향기가 나기 시작했구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예리세리카 님.”
「수인들을 만나러 온 것도 아니고, 미른가디아를 보러 온 것도 아닐지니. 그대가 매일 꾸는 꿈의 내용이 심란하여 날 찾아온 것은 알고 있다.」
예리세리카.
관철(觀徹)하는 눈동자.
그 앞에서 무엇을 숨기겠는가. 하지만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순백의 꿈에서 미래를 엿보실 수 있다고 하셨지요.”
「거울을 보듯이 흐릿하게.」
“똑같은 힘을 쓰는 적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시간의 군주의 종복이었지요. 심연과 같은 힘인 건지요?”
「심연은 여러 세계선을 들여다보고 미래를 점지하나, 이 예리세리카는 인간이 품은 가능성으로부터 미래를 본다.」
“둘이 크게 다른 건지요?”
「분명한 미래는 없다. 네가 여기에 이렇게 도달하는 미래조차도 분명치 않았으니.」
“혹시…….”
「인간도 꿈으로 미래를 엿볼 수 있지 않느냐고?」
“예.”
예리세리카가 손을 크게 펼치자, 호면에 비치던 상들이 일렁이다가 하나둘 사라졌다.
그리고 불길하도록 새까맣고도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소름이 팔을 타고 오르며 머리털이 곤두섰다. 꿈에서 보던 그 풍경들이 아닌가.
화산재와 눈보라가 교차하며 흩날리는…….
「인간의 가능성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악몽이 다가오고 있다. 네가 본 건 미래의 편린 중 하나겠지. 진리를 보게 되면서 세계의 심층을 볼 수 있게 된 거다.」
“아니, 아닙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게 확정된 미래란 건가요?”
「앞서 말했듯 분명한 미래는 없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봐야지.」
“수학자는 함부로 100%라는 말을 뱉지 않죠.”
예리세리카가 인자한 미소를 짓더니, 양손을 맞잡자 대다수의 상들이 사라졌다.
새하얀 상들, 즉 눈보라는 사라지고 오직 화산재와 용암만이 낭자한 풍경만이 남았다.
호수를 가득 채웠었건만 상들 중에서, 눈보라를 제하자 단 다섯 개만이 남았다.
희망을 가리키는 상은 단 하나.
화산재와 용암이 모두 가라앉고 모든 것이 아련한 빛 속에 잠기는 상은 단 하나뿐.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봄바람의 아이야, 네가 그걸 물으러 온 게 아니지 않느냐. 너는 이미 알고 있어. 네가 실패할 경우 세계는 이렇게 된다.」
희망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 하나의 절망은 오직 새하얗기만 했는데, 화산재가 찾아오기 전에 눈보라에 의해 멸망한 듯했다.
“제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알고 계시는군요.”
「이 호수에는 모든 것이 나타난다. 그대의 가능성, 그대의 마음, 그리고 가능성과 마음이 이루어낼 믿음. 여기 온 건 방법을 물으러 온 게 아니야. 가능성을 알기 위해 온 거지, 그렇지?」
과연 모든 걸 꿰뚫어 보는군……. 미소와 함께 주먹을 쥐었다.
거미 군주가 신들의 봉인으로부터 빠져나오기까지 걸린 세월이 천사백 년.
그 녀석을 다시 한번 쓰러뜨려서 힘을 빼놓을 수 있다면…….
그러면 화산재가 폭발하는 마지막 시대에 눈보라는 오지 않는다. 즉, 거미 군주는 힘을 쓰지 못해.
「그러하나 지름길은 가르쳐줄 수 있다. 하르바도니아에서 자운녀(子澐女)를 찾아라. 거미 군주의 심복, 오본위 서열 4위지.」
“역시 이미 옛 귀족이 깨어났군요. 찾아서 뭘 해야 합니까?”
「자운녀가 거미 군주의 천수성으로 향하는 열쇠를 갖고 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게다. 후신경(侯吲卿)이 하르바도니아를 완전히 장악하기 전에.」
그렇게 말을 끝낸 예리세리카는 어딘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러 번 숙고하여 이 일을 행하라. 아직 신들의 때가 갖춰지지 않았으니, 그대가 실패하면 세계는 마지막 시대를 맞기도 전에 몰락할지니.」
“…….”
「네가 어떤 길을 선택을 이 예리세리카 또한 물심을 다해 돕겠다.」
그때였다.
갑자기 세계 전체가 새벽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더니, 머지않아 결속력을 잃고 흩어졌다.
뭐지……?
예리세리카가 꿈에서 강제로 내보낸 건가……?
떨리는 숨을 삼키며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주위는 암흑뿐이었다.
호수도 세계수도 미르도 보이지 않는다. 꿈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다면 여기는 도대체?
원초적인 공포만이 분명한 진실을 심장에 직접적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온다…….
영겁의 피를 지닌 존재가…….
「카렌덴의 분신.」
심연(深淵) 밑바닥에서부터 울리는 음성에, 차원이 악몽의 비명을 내질렀다.
꾸물.
꾸득, 꾸드득, 꾸르륵.
본래 호수였던 공간에 사악한 변화가 깃들어, 늪지대로 변해 하반신을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친히 네게 짐의 모습을 드러낸 걸 영광으로 알아라.」
불경의 신비, 천년의 암흑에서 깨어난 존재.
정신의 착란, 거미줄 아닌 거미줄에 휘감겨 메스꺼운 신음을 흘리는 사자(死者)의 파도.
둥, 둥, 둥, 둥, 병적으로 억눌린 북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수평선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빛과 어둠의 영역 너머까지 뻗어나가는 거미집이 있었다.
죽지 못한 채, 그 거미집에 영겁의 세월 동안 매달린 원혼들이 소름 끼치는 신음을 흘린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머릿속이, 핑핑, 핑핑 돈다.
체내의 유전자 깊숙이 새겨진 복종심이 당장 무릎을 꿇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복종심 이면에서 영혼이 매혹적인 황홀경에 잠긴다.
편안하다고, 자동적으로 그렇게 여기고 마는…….
– 조심해야 함. 꿈의 세계는 근본이 원초(原初)의 세계. 산 인간의 몸으로 오래 머무르면 심연의 표적이 될 수 있음.
설마.
옛 왕이 내 심층 세계로…….
최악의 사태다. 역시 이놈은 깨어나고 있었어.
「얼개를 들여다볼 수가 없군. 신격의 일부가 덮어씌워졌는가, 아니면 복사된 것인가.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되겠지.」
“아…….”
「너는 분명 짐의 심복에게 죽임을 당했다. 필멸의 피를 타고난 인간은 인간이므로 죽음 앞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 허나, 너는 불경스럽게도 되살아났다.」
어둠 저편에서 다가온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온다.
인간의 신체 윤곽 양쪽으로 끔찍한 거미 다리들이 솟구친.
「그 후 짐이 친히 택하고 기른 종자들에게 감히 손을 댔다.」
움직여.
움직여야 해.
「너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이나 크고 깊은 교화의 덕을 베풀어 너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겠다.」
“아, 아수…….”
「창생에게는 삶의 굴레가 존재한다. 슬픔과 고통을 짊어지는 굴레지.」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겨운 육신이 점점 늪 깊숙이 잠긴다. 가슴을 넘어 이제 쇄골 언저리로.
「짐은 세계를 삼키는 자! 짐의 손길은 곧 필멸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이나니. 심연의 축복을 받아들여라.」
다음 순간 어둠이 몸을, 영혼을 꿰뚫었다.
절대적 신비의 냉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뇌리에서 전대미문의 달콤하고 고혹적이고 또 사랑스러운 열망의 언어들이 휘몰아치던 순간.
“아……수……라아아아아아……!”
비명에 가까운 기합을 터뜨리며.
마비되었던 몸을 겨우 움직여 양손을 맞잡았다.
그 일련의 신호를 통해 진리(眞理)가 악몽의 어둠을 걷어내며 강림했다.
화르르르륵!
명징한 광휘가 늪을 휩쓸어, 형언할 수 없이 불길한 악몽의 거미집을 불태웠다.
빛이 웅대한 형체를 갖춘다.
삼두룡 아수라. 그 빛이 거미집을 소멸시키며 어둠의 형체를 움켜잡아 으스러뜨렸다.
「……떨고 있구나. 허나, 이제 시작이니라, 흐흐흐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광기 어린 웃음소리와 어둠이 흩어지면서, 영원과도 같았던 악몽의 장막이 걷혔다.
곧바로 오감이 되돌아온다.
맑은 신록의 향기가 코끝을 찌르는 것을 시작으로…….
“헉…….”
나직한 비명과 함께 몸을 일으키자마자 걱정스럽게 날 살피던 미르와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미르는 비명 하나 내지르지 않았지만 붉게 쓸린 이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괜찮음? 열흘 동안 무의식 상태였음.”
열흘이라니, 잠시 멍하니 미르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미르의 얼굴 위로, 화산재와 눈보라 속에서 쓰러져 죽은 미르의 모습이 포개졌다.
식은땀으로 젖은 손으로 미르의 머리를 토닥였다.
“괜찮아. 응, 난 괜찮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온몸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한참 전에 결심했던 일이건만, 그 절대적 악몽을 직면한 순간 밀려든 공포의 물결은 쉬이 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적은 왕(王)이었다.
그 절대적 신비, 그 절대적 공포, 그 위세는 감히 어떤 귀족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이길 수 있는가?
아니, 싸우는 게 가능할까?
내 욕심 때문에 봉인진 보수를 위한 황금시간을 놓쳐버린 게 아닐까?
오만했다.
자만했다.
과신했다.
<잊혀진 왕들>이 누구인가. 한때 세계를 다스리던 옛 신들이다. <온 것들>이 겨우 물리친 옛 지배자들이다.
그걸 내가 상대하겠다고?
내가 다시 잠재우겠다고?
내 주제를 알았어야 해. 카렌덴 님의 말이 맞아. 난 그저 빛을 전달하기 위한…….
그때 미르가 꾸물거리면서 품에서 빠져나오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 얼굴을 양팔로 꼭 품는 게 아닌가.
“포옹, 긴장 완화에 효과적. 27개 의학 서적에서 그 잠재성을 거론하였으며 4개의 정신의학 책에서도 해당 주제를 흥미롭게 관찰 중임.”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아마도 세상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 물리적 온기에.
그리고 심리적 온기에.
공포로 차갑고도 답답하게 얼어붙어 가던 모든 일들에 제동이 걸렸다.
나약한 소리 할 때가 아니다.
늦지 않았어.
지금이 바로 황금시간이다.
반드시 열어줄게.
너희들에게 미래로 가는 문을. 정해진 미래를 부정해줄게. 그것이 내 삶의 걸음의 종착지다.
누가 점지한 게 아니야.
내가 정했다. 300년 전의 그날, 리스타를 따라나설 때처럼.
이게 내 운명이다.
* * *
“위대하기 짝이 없는 용현께서 하잘것없는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시는군.”
그리핀 두 마리를 이끌고 <화염만리>에 착륙한 발렌시디스가 특유의 냉소와 함께 한 말이었다.
손에는 서한이 한 장 들려 있었는데, 즉시 그 서한을 읽은 미리아와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미리아는 아키레아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는 피피를 데리고 발렌시디스와 함께 <화염만리>를 떠났다.
“…….”
이 모든 것이, 영원의 사구에서 수련 중인 아키레아로부터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련을 통해 지각이 필멸의 영역을 넘어선 아키레아는 이제 불이 있는 곳, 즉 화염만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멀리서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성장을 대외적으로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키레아에게는 뿔들이 돋아났다.
비룡은 뿔이 하나.
그보다 더 지고한 존재인 진룡의 뿔은 둘이다.
‘아빠한테 도움이 필요하다고?’
스스로의 근원을 탐구하는, 통찰 수련은 최종 단계였다.
최종적으로 수련을 끝내기 위해서는, 이 자리에서 1년 동안 미동(微動)조차 하지 말아야 했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어. 심각한 일이라면 나도 아버지의 곁으로 가고 싶어.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어.
그걸 허락받지 못했으니까.
비단 그 문제만은 아니었다.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그뤼다오네와 쟈칸 어르신이 말한 생명의 근원이 자꾸만 마음속에 걸린다.
그 근원의 이름은 알라키쉬였다.
「엉덩이가 근질거려서 죽겠지? 모래 때문에 가렵기도 하고.」
프리데가 찾아온 건, 안 그래도 없는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프리데는 좋은 친구였다.
아키레아가 알지 못하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잔뜩 들려주어 그리움을 달래주곤 했다. 비행을 가르쳐준 것도 프리데 아니던가.
본래 인간이어서일까, 아키레아의 미숙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필요한 것을 가르쳐주는 선생이기도 했다.
친구라기보다는 친언니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참 평화로운 곳이야. 모래가 세상을 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지? 사실, 아직도 이런 평화가 믿겨지지 않아.」
“……?”
「난 소음이 싫어. 특히 전투의 소음은…… 질릴 만큼 들었거든. 몇 년간 그 소리만 듣고 살았어. 그때 날 지탱해준 동료들이 없었으면 진작 무너졌을 거야.」
프리데가 용린으로 뒤덮인 손가락으로 모래밭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용대가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에 대해서 큰 생각을 안 해. 당연히 자기가 가지고 태어나는 거라고,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제멋대로 휘두르지.」
“…….”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됐을지도 몰라. 화룡 벨’다키둔께 가르침을 받지 않았더라면.」
프리데는 본래 화룡의 무녀.
화룡에게서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유일무이한 인간이었다.
「화룡께서는 힘이란 불이라 하셨어. 사람들의 길을 밝혀주고, 지혜를 주고, 용기를 줄 수도 있지만 도리어 모두 불태울 수도 있다고 했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일까?
「좋게 말하면 매사에 적극적으로 일하셨지만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집착적으로 일을 하셨어. 왜인지 알아? 후회 때문이야.」
후회?
「검은 태양 카렌덴께서는 최후의 결전 때 삼신룡 모두를 대동하지 않았다고 해. 오히려 뒤에 남겨두려 했지. 다칠까봐 걱정되었던 거야.」
하지만 검은 태양은 그 방심, 어쩌면 욕심 때문에 심연의 군주와의 일전에서 패배했다.
그 대가로 영원한 고통 속에 빠지게 되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대외적으로 활동할 기력조차 없어 항상 모습을 감추고 다녀야 할 정도로.
「화룡께서는 말이지, 그때 검은 태양 님을 도우러 가지 않았던 것이 못내 후회되었던 거야. 평생의 후회로 남은 거지.」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먼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았으나…….
그 눈빛은 가까운 과거를 들여다보는 듯했고 또 목소리는 가까운 일을 이야기하듯 흔들렸다.
화룡의 얼굴을 그렸던 낙서 아래에는 옛 용사 파티 동료들의 얼굴이 그려졌다.
「삶이란 후회의 연속이라지만, 개중에는 고통이 끝이 없는 후회도 있어. 아키, 너는 그런 후회를 겪지 않았으면 좋겠단 마음이야.」
이 이야기에 담긴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아키레아는 7개월 동안의 부동자세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은 것이다.
그러자마자 머리에서 모래 먼지가 쏟아졌다. 프리데가 그 먼지들을 털어주며 빙그레 웃었다.
「정말, 누굴 닮아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니까.」
* * *
“심연의 군세가 하나둘 <설령장성> 앞으로 집결하고 있으나, 주요 요새를 우회하려는 듯합니다. 낙후된 요새를 우선적으로 노리는 거지요. 이 지점들이 중요합니다.”
<설령장성> 백본(白本).
사령관 키란 울프 블라도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었다.
“백본에서 확인한바, 적을 이끄는 건 오본위 서열 2위인 후신경(侯吲卿)입니다. 그 모습이 몇 번이고 잡혔습니다.”
“말로만 듣던 장벽에 직접 와보니 심연이 여길 넘을 수 있을 거란 생각조차 안 드는군요.”
제국군 특마대를 이끄는 로건의 발언에 키란이 고개를 저었다.
“여태까지의 공격들과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 말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이는 없다. 경의 판단에 따라 제국군을 필요한 곳에 동원하게.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용현으로부터 온 소식이 있나?”
황제의 시선을 받은 검성 브린덴 벨체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었습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40일이 지나서 등장한 용현의 등장에 모든 간부들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등장조차도 위엄차기 그지없었다. 백룡을 타고 등장하다니, 군단의 비호란 황제조차도 감히 누릴 수 없는 호사였다.
물론 그가 다음 말을 내뱉기 무섭게, 그 안도보다 몇 배는 더한 충격을 받게 되지만.
“지금 뭐라고?”
“장벽을 넘을 겁니다. 보름 안으로 승부를 보겠습니다.”
“공자님…… 아니, 용현 각하. 장벽을 넘는다니, 지금 심연이 득시글거리는 걸 모르십니까?”
“알아. 자운녀를 찾아야 해.”
“자운녀라니…… 오본위의 자운녀를 말씀하시는 건지?”
공식선상에서는 릴리안 카라인도 용현을 마도성으로서 존대했다. 현재 제국군을 총괄하는 병부령 세이건 울프 블라도가 말했다.
“그 괴물이 깨어났긴 했답니까? 그리고 찾다니, 저 광대한 설원에서? 찾으려면 몇 년으로도 부족할 것 같은데.”
“길잡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략적인 위치도 알아요.”
“지금 장난치시는 겁니까?”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언동을 주의하라, 병부령.”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근래 용현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사실 아닙니까? 40일 전이었으면 옛 귀족들이 깨어나기 전에 봉인진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황금시간을 놓치고 전면전까지 오게 되었지요! 이로써 대체 몇 명의 사상자가 나오겠습니까? 북부가 전멸하는 건 일도 아니겠죠!”
세이건의 말은 진실을 꿰뚫고 있었으므로 어찌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블라도 가문은 북부에 뿌리를 내린 마도세가이므로 그 누구보다 이 사태를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터였다.
황제가 중재의 손길을 들었다.
“용현의 생각을 우리 같은 범인이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협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용현과 같이 갈 제국군을 편성하라는─”
“─대규모 병력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그랬다가는 제 위치가 노출되겠죠. 인원은 최소한으로 할 겁니다.”
“그게 몇 명인지?”
“두 명이면 됩니다. 사실 시간이 없어서 바로 갈까 했지만 이것 때문에 잠시 왔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명이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 여정으로부터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났건만, 이 녀석들과 함께 있을 때면 마음이 더없이 편했다.
거대한 창, 용골창을 어깨에 걸친 거한이 입을 열었다. 흑철의 갑주에 곰 가죽을 몇 겹이고 덧대서 진정 흑곰처럼 보였다.
“창성 바트가 마도성과 같이 가겠습니다.”
“궁성 렘도 이하 생략.”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있지? 시간이 촉박해.”
양손에 입김을 불던 렘이 고개를 갸우뚱 젓더니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는데?”
“?”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딱 질색이야! 술 좀 마시고 활시위 몇 번 당긴 다음 숙취에서 빠져나오면 다 끝나 있겠지. 궁성 렘 님의 화살 몇 대 맞으면 옛 귀족도 꼼짝 못 하는 거 알잖아?”
아니,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려다가 관두었다. 장난을 칠 때가 아니었으므로.
“좋아, 그러면 바로 가자. 길잡이가 기다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