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birth of the Hero’s Party’s Archmage RAW novel - Chapter (274)
용사파티 대마법사의 환생-274화(274/280)
외전 3화.
잊혀진 전쟁, 거미 군주 토벌전 (3)
하르바도니아.
북극의 영원하며 새하얀 죽음의 세계.
혹독한 북극의 돌풍이 운명의 전율로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다시 이 전인미답의 설원을 찾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것도 이 사람과 같이.
“옛날 생각이 나네요.”
화톳불 너머에서,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카세나 페이지와 시선을 마주쳤다.
“옛날?”
“알라키쉬랑 같이 있었을 때요.”
그러자 카세나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참 힘들었었는데.”
“그랬죠.”
“그래도 다 같이 있을 때는 정말 즐거웠어. 알라키쉬도…… 아키를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카세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인도 잘 아는지 목소리가 처연했다.
“아키는 어때? 잘 컸어?”
“이제 소녀티를 벗고 숙녀 느낌이 나는 단계가 왔어요.”
“뭐야! 나도 보고 싶어!”
“예전부터 몇 번이고 인사드리려 했는데 안 계셨잖아요. 가출하셔가지고.”
“그건…… 내 탓하지 마! 그래도 찾아왔었어야지! 그것도 못 해? 넌 용현이잖아! 이런저런 마법을 써서라도 찾아왔어야지!”
무슨 이런 막무가내…….
하지만 이러한 막무가내적인 언어와 성질이야말로 카세나의 것이 아니었던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흠…… 저 녀석 지금 바람피우는 건가?”
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트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나흘간의 여정은 그런 식이었다. 심연의 눈보라를 피해서 설원을 답파하는 식이었다.
사실, 어린 시절과는 달리 대지 계열 마법을 쓸 수 있기에 여정은 쉬웠다.
크레바스나 낭떠러지 따위의 험지들 위로 도로를 만들어서 이동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눈보라를 막을 화염의 지붕도 만든다.
“거의 다 왔어. 저기가 아사스 계곡이야.”
앞서 걸으며, 길을 잡던 카세나 페이지가 입김을 새하얗게 뿜어내며 말했다.
카세나는 이 위험천만한 상황의 일면에서도 모험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무책임하게 긍정적인 분위기는 렘과도 아주 잘 맞는지라, 둘은 순식간에 친해졌다.
“아타스?”
“아 사 스. tha가 아니라 sa야, 렘.”
예상외로 세 사람은 모험가로서 약간의 일면식이 있었다.
흠, 그러고 보니 이 아가씨, 백금 등급이었지…….
계곡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음역대가 기이하리만큼 높은 관악기 연주를 연상시켰다.
우주의 납골당에서 불어오는 그 바람에, 흐릿한 햇살이 떨었고 눈 덮인 나무들은 숨을 죽였다.
갑옷의 표면에 서리가 새파랗게 낀 바트가 물었다.
“레인, 네 눈으로 뭐가 좀 보이나? 벨 시디어스로 말이야.”
“결계를 쳐놨어. 그런데 조금 이상해.”
“어느 쪽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 같아. 막을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안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렘이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대단한 악취미네. 이런 게 진짜 공포야. 사람을 놀려먹고 있어.”
카세나도 진지한 눈빛을 했다.
이 셋 중에서 유일하게 옛 귀족을 직접 대면한 적이 있으니 감상이 남다를 것이다.
“놀랍게 생각할 것도 없어. 그냥 호기심을 표하는 걸지도 몰라.”
“우리가 안 무섭나?”
“무서워해? 설마. 옛 시대의 지배자들인데…… 그 녀석들 눈에 우리는 벌레랑 다를 게 없어.”
계곡 어귀에 둘러쳐진 결계는 똑바로 심층의 동굴로 이어졌다.
걷는 내내 주의 깊게 사방을 살폈으나 함정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결계 밖에서 수많은 네크라크네들과 옛것들이 위협적으로 침을 흘리긴 했으나 공격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운녀 레퀸의 저택에 다다랐다.
석굴과 빙하를 저택 형태로 깎아내 만들어낸 눈의 절경, 그 심미적 아름다움은 인간 세계의 미적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이것 봐, 이게 누구야? 인간들의 희망께서 친히 나오셨잖아.」
그러나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역겨운 종양 덩어리 같은 거미줄이 사방에 쳐져 있었는데, 거기에 시체가 매달려 시즙을 떨구었다.
손뼉을 맞부딪치며 나타난 옛 귀족의 품행 거지는 두려울 정도로 정돈되고 우아했다.
「명성이 아주 대단하던데. 인간들이 피를 빨려 죽어가면서 뭐라 속삭이던지 알아? 용현께서 나를 어쩌고저쩌고…….」
자운녀 레퀸.
거미 군주의 오본위 서열 4위.
거미의 중독적인 요염함을 한몸에 거느린 흑발의 미인이었는데, 거미 털로 이루어진 숄을 입었고 송곳니에서 거미 독이 떨어졌다.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자극하고 또 굴복시키는 아름다움은 옛 귀족들의 공통적 특징이다.
「사실, 널 죽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약간의 호기심이 동했단 말이지.」
이런 혹한 속에서도 식은땀이 흘러내리게 만드는 중압감…….
어깨를 바위로 짓이기는 듯한 위압감…….
날벌레가 사람의 숨결에 휘청거릴 때와 마찬가지로, 태생적 격차를 느끼게 하는 차별감…….
「샤르’카스 그 밉상에게 망신을 준 보답이라도 생각해도 좋아.」
카세나는 예전과 달리 직접 자기 몸을 지켰으나, 그래도 초월적 존재와의 대면 때문에 코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아! 카렌덴의 분신과 카렌덴이 끼고 다니던 버러지의 후손이 함께 오다니, 갈수록 흥미롭네?」
“수다 떨러 온 거 아니다, 레퀸.”
「그래, 그래. 시간이 없으시겠지. 곧 군주께서도 깨어나실 테니 말이야. 하지만 삶에서 중요한 건 여유야. 여유 없이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거든.」
“천수궁으로 향하는 열쇠가 있다고 들었어. 어디에 있지?”
「그 주둥아리 닥쳐! 되지도 못한 버러지 따위가 어딜 감히 이 레퀸이 말하는데 입을 놀리지!」
갑자기 레퀸이 고성을 터뜨리자,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옛 거미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왔다.
즉시 렘이 세르웨본에 시위를 매겼고 카세나도 손끝으로 허공에 룬을 그리려 했다.
레퀸이 손을 들어 거미들을 멈춰 세우더니, 문득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야! 난 너희들의 공포를 보는 게 아주 즐거워. 특히 그렇게 움찔거리는 모습이란! 생사가 내 손에 달려 있단 걸 인지하고 있단 거니까.」
“이 자식…….”
「천수성으로 가는 열쇠? 그래, 내가 가지고 있지.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드는군. 왜지? 그걸 이용해서 뭘 하려고? 그 궁극적 목적을 알면 내가 들어줄지도 모르지 않겠어?」
“가는 이유는 하나뿐. 잘 알고 있을 텐데.”
「나야 물론 네 저급한 생각을 꿰뚫는 건 일도 아니지. 하지만 너는 얼마나 잘 알지? 그 파란 뱀 년의 말대로 하는 것뿐 아냐?」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 녀석…….
예리세리카에게 정보를 얻었단 걸 어떻게 알지?
「저기 저 거미들을 좀 봐. 아무 생각도 없어. 그저 하란 대로 착실히 따를 뿐이지. 얼마나 사랑스러워?」
“생각이 없는 노예라서?”
「흣흐흐, 생각이란 지배자의 전유물이야. 생각은 선택으로 이어지고, 선택은 책임으로 이어지지. 너희 인간들은 선택의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나?」
뭐?
무슨 질문이지?
「아, 질문이 틀렸네. 책임질 능력을 갖추고 있을까? 아니! 전혀 아니야! 너희들은 천 년이란 세월 동안 아무것도 ‘생각’ 하지 않았어. 나름 ‘생각’ 한다고 착각했겠지만 너희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어. 그러니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있는 거야.」
“……?”
「너희는 우리를 모방해서 왕과 귀족을 세워놨더군? 봐, 그게 너희의 유일무이한 선택이야! 사실 알고 있는 거지, 누군가의 지배 아래서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게 행복하단 걸! 우리는 단순히 군림하는 게 아니라 이 선택에 모든 책임을 질 수 있기에 군림하는 거지.」
점점 다가온 레퀸은.
맹독과도 같이 영혼으로 따스하고도 질척하게 스미는 숨결이 귀에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는.
요염한 미소로 말을 맺었다.
「알아들었으면 특별히 살려서 보내주지. 그 파란 뱀에게 전해. 이 레퀸 님께서 곧 네년의 비천한 모가지를 따러 가겠다고 말이야.」
실소가 나왔다.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 때, 내 시야에 비치는 모든 만물이 숫자열로 해석되고 있었다.
“왜 샤르’카스와 달리 장광설을 늘어놓나 싶었더니 사실 넌 내가 두려웠던 거군.”
「?」
“내 눈을 속일 생각하지 마. 이 눈에 다 보인다. 네 저택을, 이 계곡을 급히 빠져나가고 있는 그림자의 형체가.”
레퀸의 미소 밖으로 거미의 송곳니가 요사스럽게 튀어나온다 싶더니, 이내 등가죽에서 거미 다리가 질척하게 돋아났다.
즉시 매섭게 돌진한 바트의 창극이 지면에 꽂혔다.
그 자리에서 높이 뛰어오른 레퀸이 손을 뻗자,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거미들이 달려 나왔다.
“아가씨, 렘과 바트와 함께 가세요. 저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너는?”
“혼자서 처리하죠, 전부.”
옛 기억이 겹쳐지는 걸까.
먼저 가라고 한 다음 샤르’카스에게 심장을 꿰뚫려 죽었던…….
카세나의 눈빛에 망설임과 당혹감이 뒤엉켰으나, 렘이 어깨를 잡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너무 늦게 오지 마!”
옛 귀족을 만만히 보는 건 아니다. 이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샤르’카스, 나리아두크, 제르닉스, 베샨시두그를 상대해보면서 짐승과도 같은 감(感)이 날카롭게 다져졌다.
「처리해? 혼자서? 전부? 하, 핫하하하하하! 결정했어.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널 조련해 주겠어. 예의와 예절이란 걸 가르쳐줄게.」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자운녀 레퀸, 이 녀석은 그 괴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레퀸의 육신이 메스껍도록 새까만 거미줄과 새하얀 기포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걸 보면서, 양손을 모았다.
“오의, 원소 전개(元素-展開).”
* * *
“미친, 저건 눈 속에서 어떻게 저리 빨라?!”
천수성의 열쇠를 품고 있는 건 산토끼 크기의 거미였다.
새하얀 보호색을 지니고 있기에 눈 속에서 색적도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상당히 빨랐다.
빨라.
너무 빠르다.
중무장을 한 바트는 이미 저만치 뒤쳐졌으며, 염동력으로 다리를 움직이는 카세나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놓치면 모든 계획이 끝난다.
놓쳐서는 안 돼.
하지만 열쇠 거미는 점점 시야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눈보라 덕에 안 그래도 안 보이는데…….
“카세나, 다리!”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렘이 말을 채 끝마치지도 않고 허공으로 뛰어오르자, 카세나의 뇌리에 순간적 깨달음이 왔다.
페이지 가문의 비급, 허공에 룬을 그려내 염동력을 구축한다.
밀고 당기는 무형의 힘, 그 힘을 하나의 덩어리로 십여 개를 허공에 띄운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덕에 그걸 알아보기는 쉬웠다. 렘은 조약돌을 밟듯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밟으며 몸을 솟구쳤다.
팅, 쒜에에에엑!
세 발의 화살이 이리저리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열쇠 거미의 발치에 꽂힌 화살들에서 상록의 뿌리가 돋아나왔다. 거미를 제압하듯 묶었다.
곡예사보다도 더 기교적인 동작으로 렘이 눈밭 위에 착지했다.
“크흐, 잡았어!”
“렘, 대단해!”
“이 정도로 뭘! 궁성 렘 님이시라고.”
“떠들 때가 아니다! 어서 저걸 잡아!”
사방팔방에서, 눈보라 속에서 거대한 형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포(恐怖).
혐오감(嫌惡感).
크기는 각양각색이었는데, 산봉우리가 다가오는 것 같이 소름 끼치는 크기를 지닌 놈도 있었다.
카세나가 이마에 잔뜩 맺혀 서리로 뒤바뀐 식은땀을 털어내며 말했다.
“카크레부쉬, 최상위 옛것이야.”
바트가 발뒤축을 지면에 꽂아 몸에 제동을 걸었다.
뒤돌아서면서 그 제동의 힘을 어깨로 전달, 강대한 검강이 넘실거리며 피어오르는 용골창을 전방으로 힘껏 내찔렀다.
천극(天極), 일순 세상의 명암이 뒤바뀌는 힘의 파도가 카크레부쉬의 십여 개의 눈알을 꿰뚫었다.
“KiaaaaaaaaaaakkkkkkkKK!”
시각을 잃은 카크레부쉬가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근방의 네크라크네와 옛것들이 그 털북숭이 다리에 짓밟혔다.
“엄청나다! 일부러 쓰러뜨리지 않고 시야를 빼앗은 거구나!”
“내 파트너야. 내 파트너.”
“왜 렘이 우쭐하는 거야.”
“안심하긴 이르다.”
카크레부쉬가 휩쓰는 방향이 있다지만, 적은 다른 방향에서도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카세나가 허공에 네 개의 룬을 그렸다. 머릿속으로 수학식을 전개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연산을 마치고 주먹을 움켜쥐자, 무형의 장막이 반원형으로 전개되어 옛것들을 밀쳐냈다.
“염동력 결계야.”
“이거 안 좋은걸. 나랑 바트는 직선 계열 기술밖에 없는데. 카세나는 레인 같은 공격형 마법사가 아니라 보조형 마법사고.”
“아냐, 레인은 공격형 마법사가 아니라 그냥 혼자 다른 마법을 쓰는 거야!”
“근데 왜 네가 우쭐해하는 거야?”
“그만 떠들고 여길 돌파할 방법이나 생각해라.”
그래,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이미 사방을 에워싸고 침을 흘리는 이 거미들을 상대로…….
세 사람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바트가 길을 만든다고 해도, 눈밭을 달리는 속도가 거미들에 비해 너무 느리다.
레인이 올 때까지 결계가 버틸 것인가? 아니다. 이미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품에서 발버둥 치는 이 열쇠 거미를 렘과 카세나 둘 중 하나는 계속 잡고 있어야 했다.
‘최악이군.’
‘최악이야.’
‘여기에 미리아가 있었더라면.’
셋 다 지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바트가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외쳤다.
“엎드려!”
그러기 무섭게 결계 너머의 시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일순, 그 차원이 찢어졌다.
찢어진 차원 위에 서 있던 것들을 빨아들이듯, 무형의 결계가 잘려 나가고 수많은 거미들의 육신에 동일한 절단면이 그어졌다.
“시공섬(時空殲).”
갑작스럽게 생겨난 섭리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 휘몰아치는 돌풍 속으로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참으로 대조되는 인물이었다.
어깨에 성검 쉬르팽을 걸머진 여걸과, 심연의 불경한 힘이 맴도는 부채를 쥔 사내였다.
그걸 보고는 렘과 카세나가 멍하니 소리쳤다.
“발시렌디스!”
“발렌디시스 회장님?!”
“내 이름은 발렌시디스다…….”
“발렌시디스, 미리아, 여긴 어떻게 온 거지?”
“위대한 용현께서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사정사정을 하시더군. 그래서 마지못해 왔다.”
그때 미리아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피피가 가벼운 날갯짓으로 날아와 카세나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카세나, 카세나, 카세나.”
“피피!”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의 해후란 말인가? 10년? 카세나의 눈가에 눈물이 핑 맺혔다.
분명 초면이건만, 렘과 얼싸안던 미리아는 여성의 직감에 비상 신호가 잡힌 걸 느꼈다.
가벼운 턱짓으로 바트에게 그 정체를 물었다. 발렌시디스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레인 루드윅이 과거에 남겨둔 허물이라고 보면 된다.”
“흠, 그래?”
차분하게 대꾸하는 미리아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이 혹한의 눈보라보다도 더 차가웠다.
“……피바람이 불겠군.”
“뭐라 했어?”
“아무 말도 안 했다.”
* * *
“오의, 원소 전개.”
여덟 개의 고리가, 제각기 빛깔을 지니며 등 뒤에서 커다랗게 펼쳐진다.
화(火).
수(水).
지(地).
풍(風).
뇌(雷).
빙(氷).
철(鐵).
독(毒).
여덟 가지 속성을 모두 다루는 방식은 엘리멘탈 마스터에게는 꿈과도 같은 이상향.
이 오의 개전은 6대 대마법사 제르닉스에 의해 연구되어 완성을 이루었다.
마법 사용을 위해 속성 룬을 기입할 필요는 없다. 그런 초동 동작은 필요 없다.
필요한 건 수학식 계산뿐.
이 경우, 더없이 짧은 시간 내에 4성 이상의 다중 속성 마법을 난사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암산하는 수학식의 개수는 5개, 요컨대 위력은 5성 이상으로 설정하겠다.
「뭣……!」
화(火)와 철(鐵).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강철 송곳이 무수히 솟구쳐 올라 옛 거미들의 육신을 꿰뚫는다.
뇌(雷)와 독(毒).
맹독의 안개를 퍼트리고 전도체 역할을 하게 만들어, 순식간에 광범위한 영역의 옛것들을 감전시킨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火), 수(水), 풍(風), 지(地), 독(毒), 뇌(雷), 빙(氷), 철(鐵).
모든 고리가 하나로 합쳐지며 찬란한 무지갯빛으로 명멸한다. 벨 퀴리어스로 위력 보정, 7성.
음지전양지변(陰地轉陽地變).
폭렬의 화염이, 급류의 물살이, 태풍의 바람이, 지변의 대지가, 설파의 빙석이, 부패의 맹독이, 뇌천의 전격이, 구겸의 강철이.
영겁의 동토를 개변시키며 발현, 반경 500미터 일대의 지리적 설정을 뒤바꿔놓는다.
그리고 그 모든 힘의 중심, 즉 폭심지에 위치한 것은 고대의 식인 거미 레퀸.
나를 덮치기 직전이었던 그 거대한 몸이 뇌화(雷火), 불타고, 독수(毒水), 짓물러지고 빙풍(氷風), 찢어지고 지철(地鐵), 으깨졌다.
「Paru…… 너…… 이놈…….」
하지만 레퀸은 오본위, 영겁의 피를 마신 존재.
불멸의 혼과 불사의 육신을 갖고 있기에, 이 피해로부터 금방 재생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먼 시대로 추방하는 건 가능하다.
“룬 개합, 광(光).”
여덟 개의 룬이 창조의 룬으로 합쳐지며 햇살 보다도 눈 부신 빛을 쏟아내자, 레퀸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저 룬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저 룬으로부터 비롯되는 이 봉인의 힘, 바로 광서법진의 힘이 두려울 뿐.
“착한 아이는 아직 잘 시간이야. 벌써 일어나면 안 되지.”
「이 미천한…… 길가의 벌레만도 못한 것이 감히……!」
레퀸이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기포 속에서 창백하게 재생된 다리를 내뻗은 순간.
챠챠챠챠챠챠챵, 빛의 쐐기가 열여섯 쌍의 다리를 꿰뚫어 지면에 고정시켰다.
뒤이어 천공으로부터 급강하한 두 개의 쐐기가 그 심장과 머리를 관통했다. 다리를 고정한 것들보다 두 배가량 더 크고 눈부셨다.
“그래, 천 년 정도는 더 자는 게 좋겠어. 쑥쑥 자랄 수 있게.”
너 말고, 내 애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