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birth of the Hero’s Party’s Archmage RAW novel - Chapter (276)
용사파티 대마법사의 환생-276화(276/280)
외전 5화.
잊혀진 전쟁, 거미 군주 토벌전 (5)
“이해가 안 돼. 모든 게 계획대로 됐잖아. 레인이 밀실에 도착하고 난 뒤 곧 전투가 시작되는 거 아니었어?”
렘이 식은땀을 훔쳐내며 말했다.
그때 발렌시디스가 열쇠 거미의 힘을 삼킨 카샤수르를 휘둘러 차원을 열었다.
“서둘러서 돌아가야 한다.”
“뭐? 레인은? 미리아는?”
“지금 벌어진 일을 모두에게 전해야 해. 안 그러면 이번 계절이 끝나기도 전에 인류는 멸망한다.”
그러자 공황 상태에서 겨우 빠져나온 카세나가 입술을 당혹스럽게 떠듬거렸다.
“레인을 두고 가자는 거예요?”
“기척 자체가 사라졌어. 레인은 죽었다.”
“안 죽었어요! 지금 도우러 가야 한다고요!”
“안 죽어, 안 죽어, 안 죽어.”
“정신 차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만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거다. 레인이 살아 있다면 플러스 요소가 되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러자 피피가 발렌시디스 어깨 위로 날아가 볼을 마구 깨물었다.
“안 죽어, 안 죽어, 안 죽어.”
“소망을 말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라. 어서 차원 균열 속으로 들어와! 왕이 온단 말이다!”
“발렌시디스의 말이 맞다. 지금 이게 현실이다. 레인은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어. 왕이 깨어나 버리고 만 거다. 신들도 없는 마당에.”
“믿을 수 없어. 미리아와 레인 둘 다 죽었다고? 그 미친 할배 할매가?”
“렘, 나도 레인이 죽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뭔가 문제가 생겼고,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인 건 분명해.”
“어떡하면 되지?”
“우선 황제에게, 그리고 수룡 예리세리카한테, 법황청의 오주(五柱)에게도 말해야겠지. 봉인됐던 옛 귀족들도 하나둘씩 풀려날 거다. 시간이 없어.”
렘이 장갑 낀 양손으로 얼굴을 쥐어뜯듯이 비빈 다음, 한숨과 함께 차원 균열로 몸을 던졌다.
바트가 그 뒤를 따랐으나 카세나는 여전히, 이제 저 멀리 보이는 천수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렌시디스가 강제로 그 뒷 목을 잡아끌려던 순간.
파동(波動).
사악한 파동이 천수궁으로부터 시작되어 광기의 산맥 전체로 퍼졌다.
차원의 균열이 절규하듯 뒤틀렸고, 북극 전역에서 광기 어린 신음 소리가 휘몰아쳤다.
그리고 눈(雪)이…….
바로 앞조차 볼 수 없는 눈보라가 새하얗게 소용돌이치며 산맥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산맥이 왕의 귀환을 경배하고 있었다.
“빠져나가야 해. 빨리 와라!”
그러나 이미 차원 균열은, 더 강대한 존재에 의해 뒤엉키고 망가진 뒤였다.
이런 망할…….
카세나를 끌고 균열 속으로 들어간 뒤에야 발렌시디스는 그 사실을 깨달았고, 한순간 미친 듯이 머리를 회전시켜야 했다.
좌표 계산.
좌표 계산.
좌표 계산.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가는 기괴한 좌표에 떨어지게 된다.
담벼락 사이로 이동하여 몸이 절단되거나, 아득한 땅 밑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영원과도 같은 초긴장의 한순간.
“큭……!”
“앗……!”
발렌시디스와 카세나는 눈밭을 거칠게 몇 번이고 나뒹굴다가 겨우 회전을 멈추었다.
셋 중에서 멀쩡한 것은 전이의 순간 날아오른 피피뿐이었다.
카세나는 머릿속을 울리는 포성과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포성? 아직 프리스비아는 <온 것들>의 포 기술을 해석해내지 못했을 텐데.’
흠칫 놀라 몸을 일으키자, 익숙한 풍경이 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곳은 병선기지였다.
본래 <온 것들>의 좌초된 전함이었으나, 전진기지로 개조되어 쓰이던 장소.
“피피 알아, 여기 알아, 알아.”
병선기지의 포신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끝도 없이 밀려드는 거미들을 도축해나가고 있었다.
“흐, 어떤 놈이 화망을 피해 이리로 들어왔나 했더니 새끼 돼지가 남자 하나를 물어왔군. 그걸로도 모자라 짐승까지.”
프리스비아가 시야 속으로 불쑥 들어온 건 그때였다.
<온 것들>의 기술을 해명해나가면서 개발해낸 증기기관 갑주의 마디마다 증기가 쉬익, 뿜어져 나왔다.
눈구멍으로 흐릿한 외줄기 빛을 뿜는 광학 기술 투구가 목소리를 기계음으로 변조해서 냈다.
피피가 그 투구를 부리로 쪼면서 시위했다.
“짐승 아니다. 짐승 아니다. 피피는 피피.”
“사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흐, 보면 모르나? 전폭적인 공격이 시작된 거지. 흐, 네 꼴사나운 얼굴을 보니 그 꼬맹이는 실패한 모양이로군.”
카세나는 그 말에 가슴 한편이 뚫리는 듯한 통증을 맛보았다.
“아니야! 실패 안 했어! 실패는…….”
하지만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프리스비아 앞에서 어떻게 부정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이성과 사실만이 통했다.
“전설의 아인 화차 부대를 이 북극 땅까지 오게 하다니, 과연 킨덜란드의 왕녀로군.”
발렌시디스가 말했다.
프리스비아와 같은 갑옷을 입은 단원들 외에도, 수석땜장이 닐스 블란츠가 개발한 특수 병기, 화차(火車)가 마구 화살을 뿜어내고 있었다.
통상적 화살보다 서너 배는 크고 굵은 화살이 육신에 꽂히자, 거미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토했다.
화차를 다루는 포병대의 숫자는 얼추 헤아려도 5천이 넘었다.
“내가 물어본 건 상황을 말한 게 아니야. 왜 안 피했어?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프리스비아는 왜인지 그 대답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다.
“흐, 피할 수 없었다.”
“왜?”
“이슬라의 상태가 안정되지 않았어. 지금 꺼냈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는다.”
이슬라는 적룡 알라키쉬와 프리스비아와 카세나의 신체 유전자를 결합해 만든 반룡이었다.
아직 시험관 속에서 양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긴 했지만, 프리스비아는 그 아이에게 모종의 모성애를 느끼는 게 분명했다.
이슬라 배양에 성공한 이후로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으니까.
“그런…….”
“그래서 너와 그 건방진 꼬맹이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흐,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군.”
“그나저나 대국적 공세가 시작됐다면 저 망가진 전함과 5천 명의 병력으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프리스비아라고 그런 현실적인 의문을 품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흐, 경우의 수는 셋이야. 이 누추한 곳까지 투입할 병력이 없거나, 우선순위를 뒤로 미뤘거나 아니면…….”
프리스비아가 병선기지 동북쪽, 쓰러지는 거미들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고분을 가리켰다.
“굳이 많은 숫자를 보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력한 무언가가 있거나.”
그것은 무덤.
희생의 안치소(安置所).
천 년이란 시간 동안 세계를 수호해온 용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옛 귀족을 봉인한 눈물의 씨앗.
그 씨앗에서 자라난 꽃은 뼈로 이루어져 커다랗게 펼쳐졌었는데, 지금 그 뼈가 달각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달각, 달각, 달각…….
병선기지의 함교에서는 [비상 : 위협적 심연체 출현]이라는 비상 문구가 미친 듯이 출력되었다.
그러나 그 문구를 보지 않아도, 카세나는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려는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안 돼.
아니야. 안 돼.
성인이 되어 이 북극 땅으로 온 이유는 프리스비아에게 훈련을 받고 싶은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알라키쉬가 목숨을 바쳐 지켜온 땅을 부족하게나마 돌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알라키쉬와 함께했던, 비참했으나 또 그만큼이나 눈부신 추억을 떠올릴 시간조차 주지 않고.
퍼어어어어엉!
다음 순간, 뼈 무덤은 폭발하며 사방으로 뼛조각을 휘날렸다.
그 폭발력이 어찌나 강대했던지, 주위에 있던 거미들이 날아가고 짓쳐 들던 광탄과 화살들은 허공에서 궤도가 꺾였다.
「아아…….」
광증, 용골이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재 부스러기처럼 나부낀다.
광폭, 문득 한기가 급증하며 눈이 시야를 뒤덮기 시작한다.
광기, 아인 공병들이 까닭도 모른 채 비명을 내지르고 거미들은 굴복하듯 낮게 엎드리는 혼란의 한복판에서.
검푸른 머리칼과 옷자락을 우아하게 나부끼며 옛 백작이 옥체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카세나는 멍하니 그 공포를, 어린 시절 영혼 깊숙이 새겨진 증오의 대상의 이름을 읊고 있었다.
“백도령, 샤르’카스…….”
* * *
“여긴 대체…….”
정신이 들었을 때는, 차디찬 우주의 눈보라가 몰아치는 암흑 공간에 서 있었다.
거미줄 형태의 빙판이 저 보이지 않는 수평선까지 수많은 가닥으로 퍼져나가는 공간에.
“조심해, 레인. 겨우 발 하나를 걸칠 수 있을 정도로 협소해.”
그리고 그 거미줄 아래에서는.
“으…….”
“우…….”
“으아아…….”
메스껍게 부글거리는 늪, 그 속에 잠긴 망자들이 신음을 흘리며 손발을 뻗어대고 있었다.
공포로 등줄기가 떨린다.
미끄러지면 저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거미줄을 소름 끼칠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타고 움직이는 거미들이 어둠 속에서 우릴 집요하게 노렸다.
“어서 차원을 열어! 싸우기에 너무 불리해! 발판이 너무 좁고!”
“나도 하려고 하고 있어! 계속 시도하는데!”
마법으로 지면을 만들려 해도, 그때마다 무언가가 방해했다.
무언가, 지금까지 알지 못한 사악한 섭리에 지배받는 공간이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차원을 열려 해도 차원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공기가…… 마법으로 대기 자체를 창조해내지 않으면 호흡을 하기도 힘들어.
점차 벅차오르는 호흡 속에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긴 설마, 아예 다른 차원으로 끌려온 건가?”
그 불길한 추측을 부정하기라도 하겠단 듯, 미리아가 눈부신 휘광을 흩뿌리며 쉬르팽을 휘둘렀다.
시공섬(時空殲).
시공을 초월해서 차원을 찢는 오의, 하지만 평소대로였더라면 전율했어야 할 공간에 아무런 이변도 생기지 않았다.
“뭐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미리아는 믿을 수 없단 듯이 연신 칼을 휘둘렀으나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오히려 허점을 내주고 말았을 뿐이다.
평생 처음 보는, 빛과 어둠의 영역 너머의 괴물체.
한기의 폭풍 속에서 뭉쳐졌다가 죽으면 다시 한기로 흩어지는 새하얀 옛 거미.
“미리아!”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땅의 이름은 천년설옥(千年雪獄).
아니, 땅이 아니라 차원의 이름이다. 거미 군주 아쉬론에게 심연의 주인이 하사한 외우주의 봉토.
심연이 창세의 힘을 극도로 차단하는 공간이었기에 나도 미리아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던 것이다.
내 차원적 지식은 아직 우주에 닿지 못하였으므로, 그곳에서 자력으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거기 갇혀 방황하는 우리의 존재를, 머지않아 외우주의 무언가가 감지해냈다.
* * *
<설령장성> 공방전은 인류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심연의 존재들은 장벽에 몸이 닿자마자 그 몸이 성화(聖火) 속에서 불살라졌다.
그리고 용현 레인 루드윅이 부흥시키고 인도한 마법의 중흥기, 그 시대를 타고난 마법사들이 각 요충지마다 배치돼 있었다.
“좋아,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크리스타 에이진.
그녀가 연주를 지휘하듯 손을 흔들 때마다, 수백 명의 모래 병사들이 장벽 아래에서 거미들을 살육하고.
“나와라, 염망(炎蟒).”
리븐델의 카라인 일족으로 특무과를 지휘하는 릴리안 카라인의 불뱀이 거미들을 불태우고.
“풍서섬진(風書纖塵).”
로휘넘 학파의 일등 제자이자 <델라이텐> 차석 교수인 위베르.
“수화생월(水禍生鉞).”
그리고 멜레브의 젊은 장로 노라 레던의 바람과 물에 거미들을 도륙하고 또 휩쓸었다.
용현과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낸 황금 세대의 인물 중 활약하지 못하는 사람은 로건 한 사람!
음공 마법을 사용하는 케이든은 전투 병과가 아니므로 제외한다!
“큭, 제기랄! 릴리가 이렇게나 애쓰고 있는데 난 여기 위에서 근육 트레이닝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다니!”
마법으로 만든 아령으로 열심히 근육 운동 중인 로건, 그러다 릴리안이 흘끗 눈치를 줬다.
“말만 하지 말고 바위라도 던지지그래? 그 무식한 힘으로.”
“앗!”
황금 세대의 일원들을 제외하고도 마도세가와 칠대학파 등 마법계의 중요 인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스칼지 루드윅을 대표로 하는 루드윅 일가, 마델리아 페이지, 전 수석 교수 마르헤나와 도란 슬레이드 등…….
일성칠검을 위시한 검파들은 손가락만 빨면서 구경해야 할 정도로 전황은 압도적이었건만.
한순간 안개보다도 자욱한 눈보라가 시야를 뒤덮나 싶더니,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중경부(中經部)를 맡고 있던 노라 레던을 시작으로.
일순간 시야가 암전했다 싶더니 몸속에서, 체내에서 기포가 고통스럽게 부풀어 오르더니 육신이 통째로 폭발했다.
“어……?”
노라뿐인가.
<설령장성>의 중심인 백본과 동쪽의 창동문 사이에 위치한 중경부를 맡았던 1만 명의 병력의 육신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 폭발 속에서, 기생충 같은 거미줄이 꿈틀거리며 춤을 추었다.
또 3천 명이 폭발해서 죽었다.
광기, 광란, 광질.
필멸의 육신으로는 감히 왕을 대적할 수 없고.
왕의 분노를 그 육신과 영혼이 견뎌낼 수 없다.
이어서 4천 5백 명.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또 3천 명.
거미 군주, 아쉬론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 자리마다 악몽의 비명만이 가득했다.
또 이어서 6천 명.
또 뒤이어 8천 7백 명.
왕이 내뿜는 안개를 감히 삼킨 이들은 그 분노의 대가를 치렀다.
황제와 사령관이 위치한 백본으로 이동하는 찰나 동안.
시공간을 초월하는 왕의 위엄 앞에 약 3만 5천에 이르는 제국군과 제후군이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핏덩이로 찢어졌다.
계속해서 2천 2백 명.
왕의 그 육신.
인간의 지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선 안 되는 그 역겹고 메스꺼운 형체.
그 옥체를 감히 보고 살아남은 이들은 미쳐버려 광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이 압도적 위협을 감지한 순간, 로건이 릴리안을 붙들고 장벽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그 다음 순간, 그 자리에 남아 있던 모두가 사망했다.
또다시 1천 4백 명.
그 위대한 육신이 휩쓸고 지나갈 때, <설령장성>은 감히 저항했으나 결국 무너져 내렸다.
무너지는 틈새로 거미들이 몰려 들어왔다.
그 거미들 중 장성한 거미들이 멘 가마에서 7척의 장신에 서릿발보다도 차가운 표정을 가진 여인이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臣) 자윤, 진정한 왕, 주군 폐하을 다시 뵙게 되니 그 은혜가 실로 한량없나이다.」
옛 왕은 눈짓만으로 그 인사를 받았고, 왕을 곁에서 보좌하던 남동자 알큐타가 우아한 경례로 상급자에게 예를 보였다.
「후신경께서는 이대로 군세를 이끌고 장벽 이남, 북부 땅을 수복하십시오. 이는 주군 폐하의 뜻입니다.」
옛 왕의 살육은 백본에 이르러서야 멈추었다.
모두 죽지는 않았으나, 그냥,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고 절하고 있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나는 군주 아쉬론, 이 땅의 진정하고 합법적인 지배자이니라.」
라이다 에이진도.
세이건과 키란 블라도 남매도.
검성 브린덴 벨체스터도.
「내가 지극한 자비로 친히 귀축의 언어를 읊어 너희들에게 권하노니, 왕관을 쓴 자는 지금 이 앞으로 나오라.」
황제 라이다 에이진은 무언가에 홀린 듯, 터벅거리며 나아가 옛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너는 감히 왕을 참칭하고 이 땅을 그릇된 세대로 가득 채우는 죄를 범하였으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러하나 진정한 왕의 은혜로 너에게 선택지를 주겠다.」
“용서…… 용서 하십…….”
「2천 명의 남녀를 선발하라. 신인류로서 이 아쉬론을 섬기는 지체로 길러내겠다. 허나 나머지는 그릇된 신을 섬긴 죄로 모두 심연 속에 잠길지니.」
전신이 절로 복종하게 되는 그 악몽적 공포 속에서, 홀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운 건 크리스타 에이진이었다.
“네, 네깟…… 웃기지도 않는…… 개…… 개소리는 집어치워……!”
아쉬론은 그 행태가 재밌다는 듯이 눈을 흘겼으나, 충신 알큐타가 그 불경함을 넘어갈 리 없었다.
알큐타의 손에서 뻗어나간 거미줄이, 크리스타의 몸을 휘감았다.
거미줄의 압박이 일순간 강해져 그 육신으로부터 내장과 눈이 빠져나오는 고통의 죽음을 맞게 하려던 그 순간.
「Oufari(물).
Asrai(따스하게).
Bertas(뒤덮다).」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안개처럼 자욱하게, <설령장성> 위를 잠식하던 눈보라가 따스한 물살에 의해 쓸려나갔다.
육신을, 더욱이 영혼을 좀먹던 심연을 씻어내는 신성한 물살. 모두에게 제정신이 돌아왔다.
남동자 알큐타의 아름다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건……!」
장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서른세 마리의 백룡이 창공에 출현했다.
그리고 저 아득한 상공, 암흑에 가려진 태양을 대변하는 듯한 발광체가 천지에 빛을 흩뿌렸다.
그 존재가 전신으로 뿜어내는 생명의 무지갯빛, 암흑에 잠겼던 모든 것이 다시 빛으로 돌아온다.
「아수라……?!」
삼신룡 중 홍일점.
검은 태양 카렌덴이 친자식처럼 기른 기적의 일부. 그리고 지금 신들이 떠난 이 땅에 남은 유일한 기적.
그 이름, 수룡 예리세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