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birth of the Hero’s Party’s Archmage RAW novel - Chapter (280)
용사파티 대마법사의 환생-280화 (외전 완결)(280/280)
외전 9화.
잊혀진 전쟁, 거미 군주 토벌전 (9)
“성공할 리 없음. 자가 차원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함. 그건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일임.”
미르가 경고했다.
“창세의 전설에 따르면, 창세신들은 세계를 만들 때 자신의 가장 중요한 걸 희생했단 모양이야.”
“……?”
“나에게도 신격이 있어. 편린뿐이지만. 그것과 내 가장 소중한 걸 희생한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미르의 눈이 커다래진 순간,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그래.
대가로 바치는 건 나의 생명이다.
* * *
「골계로군. ‘우리’와 같은 규격의 신격을 얻은 인간은 <온 것들> 이후 네놈이 처음이다.」
흥미롭다는 듯, 차원을 살피던 아쉬론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심장부에 뚫린 구멍, 그 한가운데서 회전하는 십자 형태의 신물(神物)을 확인한 것이다.
이 신물은 인간의 몸으로 신격을 품었다는 증거, 즉 초월자의 상징이었다.
「창세신의 힘을 그 정도까지 받았다면 짐의 천년설옥에서 빠져나온 기행도 이해가 되는구나.」
「그건 내 힘이 아니었어.」
「이 또한 기쁜 일이다. 네놈이 의지하는 게 이 하찮은 차원이라면, 이 차원째로 네놈을 압제해주면 될 일이니!」
동등한 조건에서 싸워주겠다는 자신감일까.
창백하고 역겹고 메스꺼운 본체의 두개골에서 아쉬론의 인간형 형체가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면에 절도 있는 동작으로 착지하였다. 뒤에 시립한 본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아수라를 다루는 내 힘의 모습과 닮았다.
「…….」
「…….」
차분하게 뛰는 심장.
온몸을 전율하는 신격의 교차.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아수라와 아쉬론의 본체가 격돌했다.
퍼어어어엉───!
아수라의 두 번째 팔이 아쉬론의 가슴팍을 쥐어뜯고…… 그 반격으로 아쉬론의 거미발이 아수라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아수라가 튕겨 나간 일순.
아쉬론이 전신으로 토해낸 수백의 거미줄이 아수라를 휘감아 들어 올리고는 좌우로 내리찍었다.
「자가 차원으로 힘을 증폭해도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느냐!」
아쉬론의 본체의 전면(全面)이 혐오스럽게 찢어졌다.
찢어지는 단면으로 추악한 송곳니들이 드러났다. 거미의 이빨. 그 끝에서 독액이 흘러내렸다.
수백 개가 넘는 그 거미의 주둥이로부터 독 연기가 검푸른 해일로 아수라에게 쏟아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 그렇게 믿고 있단 말이지.
이 차원은 단순히 내 힘을 증폭한 차원이 아니다. 아쉽게도 그건 정말 부차적 조건에 불과해.
이건 내 친구들의 힘을 증폭하는 공간이다.
“시공섬(時空殲).”
그 순간, 통상적 경우보다 몇 배는 크고 거대한 균열이 수평선에 그어졌다.
유리창이 깨지듯, 쨍, 그 균열이 크게 깨어지며 그 위에 위치한 모든 것을 다른 공간으로 추방했다.
독액의 파도, 그리고 아쉬론의 무수한 다리와 상반신의 몸뚱이가 절단되었다.
“취중사 비기, 천앵살(千鶯虄).”
환상의 화살로 엮어진 방대한 마력이 청백의 빛을 흩뿌리며 아쉬론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어……?”
“음……?”
두 사람이 내 곁에 서기 무섭게, 눈앞에 드러난 현실에 눈이 커다래졌다.
아쉬론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는데, 그 중심부에서 회전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역십자…….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렘과 미리아의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아쉬론이 홍소를 흘렸다.
「그러하다. 나 아쉬론도 본래 너희와 같은 필멸자였다. 허나 창세 질서의 불합리성을 깨닫고 위대한 심연의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신격을 취했지.」
그러는 동안에도 아쉬론의 맹공은 계속돼, 아수라를 크게 전개해 그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
「신의 힘을 가지고 이 세계를 지배하고 또 격리하여, 이 땅의 인간들에게 힘의 규율을 가르쳤다. ‘우리’와 같은 초월에 이를 수 있도록!」
크게 뛰어오른 렘이 아수라와 아쉬론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사격 각도를 확보하며 외쳤다.
“이런 미친놈이!”
활시위에 얹어지기 무섭게 발사된 화살은 무려 열세 발.
극미량의 마력만 넣었는데도 천앵살에 필적하는 크기의 화살로 엮어진다.
그 화살은 옛 귀족들조차도 막아내기 버거울 게 분명하나, 상대는 옛 신.
“인간을 그렇게 잔혹하게 살육하고 또 사육한 네가 우리랑 같은 인간이었다고?”
화살들은 독액의 안개를 뚫지 못하고 허공에서 부패ㆍ산화했다.
「너희들의 길은 위선의 죄악으로 얼룩졌으니, 실로 패역하다! 이미 다섯 절대신이 모여 신세계의 섭리를 논하고 있으니 너희가 아무리 발악한들 무의미하노니!」
그러면서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렘을 죽이려 하였으나, 거대한 창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바트의 용골창.
용의 위엄으로 번들거리는 그 창이 출력해낸 검강이 아쉬론의 거미발 두 개를 잘랐으나 세 번째 거미발에서 가로막혔다.
「진실로 무력하구나, 허나 한탄하지 말라. 그 헐벗은 골육으로 낼 수 있는 힘이란 본래 그리 무력한 법이니!」
수십 번의 육중한 공방 끝에 바트가 멀리 튕겨 나갈 때, 차원을 찢는 바람칼이 아쉬론에게로 쇄도해 들었다.
「──!」
그때, 나는 아수라를 이끌고 아쉬론과 다시 한번 격돌했다.
아수라의 아홉 팔과 아쉬론의 거미발이 서로를 붙든 채 힘겨루기에 들어가자 아쉬론이 말했다.
「그래! 나와 싸울 생각이면 이놈처럼 기꺼이 이 싸움의 대가로 생명을 포기하라!」
동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혹스러운 시선이 내게로 꽂히는 게 느껴졌다.
아쉬론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말하지 않았나 보군? 창세의 힘은 항상 그렇지. 자살의 사역을 희생의 섭리로 성역화하고 위대한 가치처럼 논하지!」
「…….」
「그걸 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세계의 법을 정하는 건 강자(强者)다!」
아쉬론의 거미줄에 의해 아수라의 팔 한쪽이 잘려 나갔다. 그와 똑같은 격통이 내 몸에 일었다.
「모든 질서(秩序)를 설정(設定)하고 통제(統制)하는 것 또한 강자! 초월에 이룰 자격이 있는 것 또한 강자!」
그걸 막아내기 위해 미리아가 달려왔으나, 아쉬론의 거미발에 무력하게 튕겨 나가 땅을 굴렀다.
「그런데 어찌하여 창세의 규율은 강자는 무조건 약자를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는가!」
아쉬론의 거미줄이 아수라의 팔 여덟 개를 일시에 붙들고.
「창세의 질서에 미래 따위는 없다!」
각기 방향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가능성도 없고!」
눈앞이 희노랗게 물드는 격통.
「합리성 또한 없으니!」
아수라의 첫 번째 팔과 세 번째 팔이 광입자를 무수히 흩뿌리며 뜯겨져 나갔다.
「세계에게 선택받은 강자를 탄압하고 규탄하는 그릇된 질서에 매몰된 네놈은!」
이어서 다섯 번째 팔과 일곱 번째 팔도.
「단지!」
나를 급히 도우려던 바트는 아쉬론이 토해낸 독액 때문에 접근이 차단되었다.
「약자를 돕는 데서 오는 자기만족에 도취된 것에 불과해!」
모든 팔이 뽑혀 나가자 정신에 이성을 잇는 줄 하나가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팔이 뜯겨져 나간 아수라가 고통스레 포효할 때, 아쉬론이 그 무력한 아수라를 내던졌다.
아수라와 연동된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지면을 튕기듯 굴렀고, 아쉬론에게 천앵살을 조준하던 렘을 덮치고 말았다.
「창세의 세계에는 가능성이라곤 없다. 마땅히 알라, 창세가 먼저 ‘우리’를 등졌기에 ‘우리’ 또한 창세의 세계를 저버린 것을!」
아쉬론이 그 육중한 몸으로 더러운 점액을 뚝뚝 흘리며 다가왔다.
웃음이 나왔다.
그 손아귀에 아수라가, 내가 붙잡혀 이내 죽음이 목전까지 짓쳐들어왔건만.
「창세의 세계에 가능성이 없다고……. 그럼 네 앞에 있는 나는 도대체 뭐냐……?」
그 일순, 다시 한번 허공이 구물거리더니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차원이 갈라졌다.
시공섬(時空殲).
쉬르팽을 이용한 극의, 하지만 미리아가 사용하는 것보다 더욱 강대하고 맹렬했다.
이는 육신에 용령을 깃들인 ‘리스타’가 시전하는 ‘진짜’ 시공섬이므로.
「───?!」
아쉬론의 손이 잘려 나간 반동으로 허공에서 급강하하는 내 몸을, 부드러운 담배 연기가 휘감는다.
화룡의 무녀, 프리데.
용으로 승천하기 이전, 마녀의 정장을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빛으로 구현되었기에 그 몸이 은은히 빛났다.
「난 고아였어, 이 개자식아.」
그 안개로부터 나를 낚아채려고 아쉬론이 즉각 다른 손을 내뻗는다.
「선택받은 강자는 무슨. 하루를 겨우 먹고 살고 언제 죽는지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찬란한 빛줄기가 그 손을 정확히 꿰뚫었다.
손뿐인가, 그 너머의 가슴팍의 3할 가까이를 완벽하게 집어삼키며 날아가는 빛의 화살, ‘원조 천앵살’.
궁성 키에스의 손에서 세르웨본이 발출의 반동으로 떨리는 것이 보인다.
「그때 네가 욕한 창세의 질서가 내게 찾아왔다.」
학장 아주머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고아로 살다가 죽었을 것이고.
「내가 만든 이 차원은 날 강화하기 위한 게 아니야…….」
그날 리스타가 찾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프리데와 키에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마탑의 심술궂은 늙은이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거야, 분명히.
「내가 이 차원을 통해 네게 보이는 건 가능성…….」
아쉬론이 양쪽에서 동시에 내뻗은 거미발.
철컹, 쇳소리와 함께 양손에 수갑을 찬 거한이 비현실적인 괴력으로 그걸 움켜잡더니 역으로 내던졌다.
데몬 슬레이어, 카셀 링칸.
「나라는 미숙한 인간을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줘서 완성시켜 준───!」
파바바바바바박!
고위 옛것들조차도 비명을 내지르던 수천 발의 화살이 아쉬론의 등판에 꽂히더니 폭발했다.
「──이 세계의 가능성이다!」
화차의 개발자, 수석땜장이 닐스 블란츠의 신기전(神機箭).
「지금 그 눈에 똑똑히 새겨라, 아쉬론!」
그리고 화차가 쏟아내는 화살 위의 창공에서 불벼락을 토해내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적룡 알라키쉬였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법대학에서 만난 친구들, 그리피온을 위시한 수인 전사들, 천화일룡 셀리네 같은 사소한 인연들까지도 모두 빛으로 구현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아수라(阿修羅)!」
과거와 미래, 전생과 현생을 잇는 모든 인연의 실타래가 지금 이 자리, 이 차원에서 이어진다.
그것이 나의 차원.
그것이 내가 가진 모든 걸 바쳐서 만들어낸 이 세계.
「내 삶의 아수라 실혼경이다!」
* * *
“미친, 실화야? 이거 맞지? 선조님 맞지?”
렘은 그 존경하는 선조와 만나게 된 것이 너무나도 영광인 모양이었다.
“화룡의 무녀 프리데라니.”
비슷한 이유로 발렌시디스와 바트는 각각 프리데와 리스타에게 경의를 표했다.
과거의 자신을 아련한 미소로 바라보던 미리아가 결국 곁으로 다가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미리아.」
“이게 네 선택이란 거지? 300년 전이랑 달라진 게 없네…… 난 이제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해?”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진짜로 가족을 꾸리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때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지도 미지수였다.
「카렌덴의 아수라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없구나! 벌레 수십 마리가 모인다고 그것이 신(神)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아쉬론이 격노를 토해내며 모든 거미발을 한곳에 모으자, 차원이 전율하기 시작했다.
「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스스로의 압도적인 힘!」
모든 것이 구불거리고.
차원의 외벽이 녹아내리며 그 너머 창세의 내우주가 노출되었다.
「이걸로 마땅히 알게 될지니! 열등한 약자들은 몇 명 모여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단 진리를!」
그것은 삼천세계를 집어삼켜 부패시키는 심연의 격랑. 그 힘을 마음대로 호령하는 옛 왕의 신위(神威).
「신격을 봉인하기 위해선 저 신물을 노려야 해.」
내 삶의 백년여정에.
지금 여기서 종지부를 찍으리니.
「다들, 도와줘.」
가장 먼저 달려 나간 건 바트와 프리데였다.
“가라, 레인!”
용골창이 날카롭고도 거대하게 토해낸 검강과 화염의 숨결이 심연의 폭풍에 제동을 걸고.
“크, 선조님과 같이 싸울 수 있게 해준 기회를 줘서 고마워!”
렘과 키에스가 등을 맞대고 동시에 쏜 천앵살이 서로 교차하며 심연의 혈(穴)을 뚫는다.
「이 모두가!」
온 천지를 새까맣게 물들이는 거미줄을 발렌시디스의 차원 바람칼이 잠재우고.
「부질없는 저항인 것을!」
그 모든 역겨운 점액질 너머.
아쉬론의 본체가 내지르는 다섯 쌍의 거미발을 데몬 슬레이어가 붙잡아 표적을 고정시켰다.
“가!”
그 순간.
차원이 X자로 일렁인다.
리스타와 미리아가 일시에 휘두른 참격, 이중 시공섬.
“린!”
찢어지는 차원의 균열 속으로 거미발이 빨려 들어가고.
그 너머 아쉬론의 가슴팍에 X자 절단면을 만들어 신물(神物)을 노출시키며.
급속도로 재생하는 육신이 그 신물을 감추려고 하지만.
「!」
수백 발씩 떨어지는 신기전의 화살이 살점이 달라붙는 걸 방해하고.
받아라, 아쉬론…….
그리고 그때 알라키쉬는.
나를 등에 태운 채 그 모든 포화를, 사방팔방에서 날아드는 거미줄과 독액의 안개를 회피하여.
아쉬론의 심장부까지 나를 옮겨주었다.
이게 내가 평생 동안 받았고.
또 나를 키워준.
이 세계의 가능성(可能性).
알라키쉬의 등을 박차고 뛰어내리는 내게로 달려드는 초미세 거미줄들.
그리피온, 바를젠, 셀리네.
그 전사들이 팔을, 다리를, 육신을 꿰뚫리면서까지 그 거미줄들을 막아주고.
그러니 다시.
이 세계에 돌려줘야 할 빛.
릴리안의 화염, 위베르의 바람, 노라의 물이 마지막 길을 열어내는 동시에, 로건이 나를 있는 힘껏 앞으로 던져준다.
나는 기도한다.
그리고 그 인연의 빛이.
내 아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아이들이 다음 세대에게 똑같이 전해줄 수 있도록.
그 순간, 화염이 허공에서 불타오르며 석장의 형상을 갖춘다.
알라키쉬의 사환장.
그걸 붙잡고, 힘껏 정면으로 내찔렀다. 아쉬론의 신물에 닿을 때까지, 똑바로.
그러니 지금 여기서.
너라는 악몽을 내 손으로 끝낸다.
딱.
그 파열음의 순간을 기려.
아쉬론의 신물 내부, 즉 신격의 최심부로 접속할 수 있었다.
「잘 봤냐, 아쉬론! 나 혼자만의 힘이었으면 여기, 네 앞까지 오지도 못했을걸!」
마침내 보인다.
왕이 되기 전의 아쉬론이.
영혼의 근원.
「무의미하다고? 미래가 없다고? 개소리 집어치워! 이게 바로 인연의 힘이다! 돌고 돌아서 영원을 만들어내는 창세의 힘이다!」
그 내부에서의 혈투는.
리스타에게 배운 봉술로 아쉬론의 심장에 석장을 박아넣기까지, 수백 합을 주고받았던 치열한 백병전의 과정은.
지금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넌…… 너희들은…… 자신이 영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틀렸어……!」
다만 그때.
심장이 터질 듯 숨을 껄떡거리면서도 품었던 마음가짐만큼은 확실히 기억난다.
「진정 영원한 것은 마음……!」
그 아름다운 인연이 날 길렀고.
그 찬란한 만남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으며.
그 슬픈 이별들이 지금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빛은 사라지지 않고 다음 시대로, 또 그다음 시대로 이어져 세계를 밝힌다.
그것이 내가 깨우친 진리.
그리고 창세의 섭리다.
「영원을 살아본 적도 없는, 그 빈약하기 짝이 없는 지각으로 지금 감히 짐 앞에서 진리를 논하려 하는가!」
아무것도 헛되지 않았어.
<온 것들>로부터 시작되어 이 땅을 밝혀온 빛은.
학장 아주머니를, 리스타를, 알라키쉬를, 그 무수한 인연들을 통해 전해져와 지금 내 안에서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희생으로 신념을 잇는 건 감정에 호소하는 악수에 불과하다! 이 몽매한 것아!」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네 앞에 서 있노라고.
「희생하는 거라고? 헛소리를! 이건 그저 받았던 걸 돌려주는 것뿐이야!」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렇게 외치고 마음가짐만큼은, 지금도 분명히 기억난다.
「이 하등한 귀축이────!」
팔을 쳐내며, 몸을 빙글 돌려 역으로 내찌른 석장이 그 심장을 꿰뚫자마자 원소 전개를 활성화.
광(光).
그 원소의 고리들이 하나로 묶이며 눈부신 무지갯빛 고리를 엮어내고, 지금 그 힘을 발휘한다.
「───Gu, Gu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
그 고리에서 빙그르 회전하는 문자들은 창명시편의 글귀. 광서법진의 봉인식과 창명시편의 힘을 하나로 통합한다.
챠르르르르르릉, 파바바바박!
수십, 수백 겹의 광명의 사슬들이 차원의 사면에서 솟구쳐 아쉬론의 육신의 혈들을 꿰뚫었다.
그 사슬은 빛의 사슬.
허나 얼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창명시편의 문자열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창세의 힘을 극도로 증강시킨 봉인이다.
「Ke, ketas, 네, 네놈이…….」
그 사슬들에 꿰뚫린 즉시.
내 심장을 꿰뚫기 직전이었던 거미줄의 힘이.
그리고 아쉬론의 육신을 초고속으로 수복하던 재생의 힘이 사라졌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계속 사슬들이 나타나 아쉬론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짐은 세계를 삼키는 자……!」
거기에 저항하듯.
사슬을 붙잡으려고 움직이던 손들조차 머지않아 움직임이 멎었다.
「네가, 네놈이 그토록 소중하게…… 쌓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그날……!」
아쉬론의 인간체의 입에서 새까만 액체가 왈칵 쏟아졌다.
신혈(神血)이었다.
그 피를 쏟아내면서도 아쉬론은 입가를 미소로 일그러뜨리며 소름 끼치는 홍소를 터뜨렸다.
「내, 반드시 다시 깨어나…… 모든 걸 삼킬지니…… 이는 경고가 아니라 예언이다……!」
챠르르르르륵.
사슬이 휘감기는 소리와 함께 아쉬론의 육신이 허공으로 들려 올려가 고정됐다.
「두려움 속에서 평생의 밤을 지새워라! 필멸의 삶이 끝나고 땅에 묻히는 그날까지! 영원토록!」
그와 동시에 본체로부터 분리돼 나왔던 인간체가 점액질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 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쉬론의 본체의 얼굴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사슬에 매달린 채 봉인된 것이다.
끝났다…….
끝냈어…….
지면에 털썩 꿇어앉은 채, 멍하니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산 인연들은 나에게로 황급히 뛰어오고 있는 반면.
먼저 죽은 인연들은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 내 길을 다 이루었구나.
그러면 나도 이제.
저쪽으로…….
* * *
「아직 네 때가 차지 않았다.」
탁.
검은 안개가 지배하는 공간 어딘가에서, 지팡이가 이마를 밀치는 느낌이 들었다.
「신격을 가진 너는 죽었으나 인간성을 지닌 너는 살아남았다. 가라. 네 삶에서, 네 삶으로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남았으니.」
내 삶에 해야 할 일이라니.
아직 뭐가 남아 있단 말인지요.
「네 아이들, 나는 잘하지 못했지만 너는 후회 없이 행했으면 한다. 많이 아껴줘라. 그래서 사랑을 알게 해주어라.」
* * *
다시 눈을 뜨면서 핏물 섞인 숨 덩어리를 뱉어내자, 사방에서 눈물을 흘리던 병사들에게서 환성이 터졌다.
날 끌어안고 있던 미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마구 떨어지더니, 날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그걸 내려다보던 발렌시디스와 렘에게 도와달라고 말했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이딴 죽는 척 장난질이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
“이 쓰레기 놈의 이야기는 우화로 만들어서 거짓말을 못 하게 하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역시 이런 상황에 나를 도와주는 건 바트뿐이었다. 개자식들.
그날, 무수한 인명이 죽은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고 심연의 군세는 격파되었다.
남동자 알큐타는 하얀 진룡 두 마리의 희생으로 봉인되었다.
후신경 자윤은 페이쿼리어 셋을 죽인 뒤에야 기력이 다했는데, 그때 누런 진룡 요슈하르가 수명을 떼어낸 힘으로 봉인하였다.
진룡의 혼으로 봉인되었으니 그 봉인의 막강함은 말할 것도 없다.
샤르’카스가 일찍 봉인을 깨고 나온 건 왕이 깨어났기 때문이나, 왕은 이제 내가 만든 차원 속에서 다시 영겁의 잠을 잘 것이다.
그날의 싸움은 거미 군주를 조기에 저지한 쾌거였다.
그래, 미래인들에게는 단순한 쾌거라고 서술할 수 있겠으나 현대인이 보기에는 그날 잃어버린 인명이 너무나도 많았다.
난 그날 내가 한 행동이 과연 정답이었는지, 이걸 기록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조금도, 알지 못한다.
* * *
수룡 예리세리카는 옛 왕에게 입은 상처가 너무나도 깊어서, 이제 육체를 유지할 수 없었다.
예리세리카는 백룡 군단(이제 군단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숫자가 적어진)을 최후의 하얀 진룡인 미른가디아에게 인계했다.
이후 예리세리카의 몸은 이제 세계수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세계수를 휘감은 수룡의 육신에 벌써 새파랗게 이끼가 덮였다.
“제가 과연 올바른 일을 한 걸까요?”
전 세계적인 장례식이 끝난 뒤였다.
미르와 넨을 다시 만날 겸 아키의 등을 타고(!) 이데아 반도, 세계수의 호수에 들렀다.
“정말 세간 어디서 도는 말처럼, 아쉬론을 이길 수 있다는 과신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게 아닐까요.”
혼잣말하듯 물었다.
위령비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름이 적혀 있었으며, 거기에는 노라와 위베르를 비롯해 내가 아는 이름도 적지 않았다.
“아키 언니! 넨이 이렇게나 성장한 걸 보세요! 넨도 뿔이 나려 하고 있다고요!”
아키는 반가움에 날뛰는 넨을 진정시키느라 애써야 했다.
그 백도령 샤르’카스를 쓰러뜨렸다는 아키는 부쩍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말을 완벽하게 구사해서가 아니라, 분위기가.
반면 내가 죽음을 각오했던 걸 유일하게 눈치챈 미르는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정말 그냥 봉인식을 매만지기만 했으면 인명피해가 없이 끝나진 않았을까요? 전…… 정말 이기적인 개자식 같습니다. 이딴 놈이 어떻게 대현자겠어요. 신격을 잃고 평범한 마법사가 된 게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제 주제에는 이게 딱 맞아요.”
수룡은 이제 ‘순백의 꿈’에서조차 아주 짧은 시간만 나타날 수 있기에, 미르의 교육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봄바람의 아이야.]그렇기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건만.
[나는 올바르게 살려 노력했다. 선을 행하며 모든 이들이 더불어서 화목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다음 순간, 호수 위로 문자열이 파랗게 떠오르는 게 아닌가.
[그건 이타심도 아니었고 배려심에서 비롯된 행동도 아니었다. 나의 지극한 이기심이었지.]“무슨……?
[돌이켜보면 그 모든 행동이, 카렌덴께서 날 뒤에 남겨두셨던 일이 훌륭한 판단이었다고, 날 이렇게 살려두신 게 전혀 헛되지 않았다고, 세상에 내 삶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던 같구나.]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반박을 해야겠다고만 생각했다.
당신이 이기적인 거라면 이 세상에 이타적인 존재는 단 한 명도 없다고.
[우리는 미약하여, 본래 사랑을 알지 못한다. 너와 내가 그랬듯 편애를 통해서 그 편린을 조금씩 알게 되어 갈 뿐이니.]“……?”
[네가 옳은 일을 했는지 아닌지는 미래(未來)가 가르쳐줄 것이다. 너와 나도 볼 수 없는, 저 머나먼 날의 미래가.]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리가 없건만, 예리세리카가 그 상냥한 미소를 지은 것만 느낌이 들었다.
호수는 잔잔한 파문이 한번 인 뒤 고요해졌다.
그 이후로는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예리세리카 님…….”
나의 세 번째 ‘미래’가 나를 새하얀 속눈썹 사이로 걱정스레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룡께서는 이제 의식을 오래 유지하실 수 없음. 세계수로 의식의 파편을 옮기는 일을 진행 중.”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세 번째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바로 저 뒤쪽에서.
첫 번째 ‘미래’와 두 번째 ‘미래’가 떠들썩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래(未來)가 알려준다, 라…….
자조와 기대감 뒤섞인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세 번째 ‘미래’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고 첫 번째와 두 번째 ‘미래’에게로 돌아갔다.
그날 그 ‘미래’들과 함께하고 있자니, 어느 순간 모든 슬픔을 잊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많이 아껴주어라. 그 아이들이, 사랑을 알 수 있도록.
이 미래의 답을 살아서 볼 수는 없겠지만.
이 아이들이 언젠가 어른이 되고.
이 아이들을 이 세계에 남겨두고 떠나야 할 언젠가.
아, 그때 정말 잘했구나…….
이날을 돌이키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소박한 꿈을 품었다.
정말로, 소박한, 단 하나의…….
<외전. 거미 군주 토벌전, 완(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