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39)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139화(139/388)
139화. 안녕, ER (11)
“환자들이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도, 간호사 쌤들이랑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다 괜찮아. 다 괜찮다고.”
“…….”
“근데 진짜 기분 나쁜 건 뭔지 알아? 뭐라고 말도 못 할 만큼 내 실력이 형편없다는 거야. 여자 의사에 대한 편견을 논할 자격도 없다고.”
소주를 들이켠 이태희가 말을 이어 갔다.
“죽어라 했는데 실력이 늘지 않아. 그냥 제자리에 멈춘 거 같다고…….”
“열심히 하고 있잖아.”
“그래도 똑같아……. 정말 똑같다고.”
이태희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사실 그녀도 죽어라 노력하고 있었다.
오프 날이면 실습실을 찾아 술기 연습을 했고.
틈날 때마다 전공 서적을 읽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허망하게 죽은 소아 환자를 향한 다짐이 창피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렇게 시작된 한탄은 한참 계속됐다.
계속된 자기 부정.
결국, 진혁이 혀를 찼다.
‘사춘기네, 사춘기. 뭐, 다들 이맘때쯤에 시작하는 건가.’
진혁이 다시 소주를 들이켜는 이태희를 직시했다.
『영닥터』에선 ‘아신 병원 여신’이라 불리는 그녀.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이태희의 인기는 대단했다.
당시엔 흔치 않은 여자 의사.
짧은 단발.
하얀 피부.
연예인 뺨치는 미모까지.
대중이 좋아할 만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욕심 부리고 있다.’
조급해 보였다.
등산으로 따지면 발아래만 쳐다보며 정상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야 하거늘.
벌써 산봉우리를 쳐다보고 있었고.
언제 올라가냐며.
아직 조금밖에 못 왔다며 한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조급증에 기인한 심리적 문제의 발아.
뭐, 따지고 보면 이태희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당장 김현수조차 벽을 느끼고 도주했고.
사회적 성공 때문에.
혹은 부모님의 권유로 의사가 된 많은 이들이 뒤늦은 사춘기로 마음고생을 할 시기였다.
이럴 때 해 줄 수 있는 말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애늙은이 같은 말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태희가 희게 웃었다.
“여전하네, 여전해.”
“뭐가.”
“그 노땅 같은 말투는 여전하다고.”
“그게 정답이니까. 지금은 괴롭다고 술 마실 때가 아니야. 최소한 4년, 아니 5년은 해 보고 말해야 한다고.”
이태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제 행동은 어리광이나 다름없다는 걸.
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진혁이 벌떡 일어났다.
* * *
아직 안주도 제대로 먹지 않았고.
미리 깔아 둔 소주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연유로 이태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모님, 여기 계산 좀 해 주세요.”
“어머, 벌써 가게?”
“네, 일이 있어서요. 소주도 다 계산해 주세요.”
“어머, 그럼 나야 좋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계산하는 이진혁.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은 채, 보여 줄 게 있으니 따라오라는 말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택시까지 탔다.
“이대로 들어가면 술 먹은 거 들킬 텐데?”
“왜? 걱정돼?”
“아니, 갑자기 병원을 가자고 하니까…….”
“임상실습실로 갈 거야.”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는 이진혁.
이태희도 말을 삼키며 그를 쳐다봤다.
말없이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진혁은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괜찮다는 태도.
대응하면 그만이라는 자신감.
그 어떤 심리적 고뇌도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 능력을 믿고 저러는 걸까?
아니, 아니었다.
그냥 이진혁은 원래 저랬다.
사실 처음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고뭉치라고 생각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손이 많이 가는 동기라고 엄마한테 털어 놨을 정도니, 말 다 했다.
하지만 같이 근무하는 동안 제 판단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이진혁은 부당한 압력에 영리하게 받아칠 줄도 알았고.
보수적인 아신 병원이 정해 놓은 선도 아슬아슬하게 지킬 줄 아는 동기였다.
그뿐이랴.
처음 만났을 때 보여 준 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한 권태로움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왜 이렇게 섭섭하지.’
기분이 조금 그랬고.
그래서 그냥 말하고 싶었다.
왜 더 공감해 주지 않냐고.
왜 묵묵히 들어 주지 않냐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사실 그건 그거대로 웃기는 일이었다.
이성적 호감을 숨긴 채 접근하는 이들이 싫어 모교 병원을 버리고 아신 병원까지 온 자신이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왜 자꾸 이진혁에게 기대는 건지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됐다.
게다가.
‘나이도 나보다 어린데…….’
한 살 어린 고등학교 후배지 않던가.
이진혁과 말을 놓으면 다른 인턴과 족보가 꼬인다는 생각에 반발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내가 왜 이러지…….’
힘든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진혁을 찾아 술이나 먹자고 하고 있었으니.
그녀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울 뿐이었다.
* * *
외과임상실습실.
홀로 작업 중이던 장혁준이 다가와 킁킁거렸다.
“와, 냄새가 나는데. 뭐지, 이 익숙한 냄새는.”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아니, 그보다 이거 소주 냄새 같은데. 와, 잠깐 집에 갔다 온다더니. 둘이서 술 먹고 온 거예요?”
“잠깐 반주 좀 했어요.”
“와, 뭐죠. 이 당당함은!!”
장혁준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일탈은 그 자신의 몫이어야 하거늘.
범생이들이 이럴 줄 몰랐던 만큼 충격이 컸다.
“과장님께 말씀드릴 건 아니죠?”
“와, 나도 같이 먹었어야죠!!”
“역시…….”
“아니, 역시는 무슨 역시에요!! 대체 날 어떻게 보는 거예요!”
“어떻게 보긴요. 의리 있는 오렌지족으로 보고 있죠.”
“와!!”
장혁준이 한참 난장을 부렸다.
의리 있는 오렌지족의 정의가 뭐냐고 따지는 그를 보며, 진혁이 화제를 돌렸다.
“아직도 페모럴 쉬스(Femoral sheath) 제거하는 거 연습하고 있어요?”
“혼자서 하려니까 진도가 안 나가서요.”
“그래서 데려왔잖아요.”
진혁이 이태희를 가리키자, 장혁준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술 마시면서 영업한 거예요?”
“아뇨.”
“그럼 뭔데요?”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바로 시작하죠.”
짧은 대답 후 진혁이 움직였다.
먼저 장갑을 낀 뒤, 모형에 꽂혀 있던 드레싱을 제거했다.
그러고는 쉬스(Sheath)가 삽입된 부위를 살피는 척 고개를 움직인다.
물론, 장혁준도 가만있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바로 사진을 찍었다.
찰칵.
찰칵.
요란한 촬영음 속에 진혁의 목소리가 울렸다.
“쉬스(Sheath)를 제거하기 전에 먼저 헤마토마(Hematoma, 혈종)부터 확인해야 해요.”
“왜요?”
“다른 사람 실수를 덮어쓸 수도 있으니까요.”
“……?”
“안 그래도 헤마토마가 생기기 쉬운데, 인턴이 제거했다고 하면 두 배로 욕먹는다는 말이에요. 녹음기 켜 둔 거 맞죠?”
“그럼요.”
살짝 고개를 주억거린 진혁이 빠르게 손을 놀렸다.
포비돈 용액으로 환부를 소독한 뒤 곧장 쉬스를 빼냈다.
그와 동시에 테이블 위에 놓인 Hemostasis pad를 환부에 올려 지혈하는 척을 했다.
있는 힘껏 누르는 거다.
“보통 10분은 눌러야 해요.”
“그냥 그렇게만 적으면 돼요?”
“Tip이라고 박스 친 다음에 Pulse가 느껴지는 부분을 정확히 눌러야 한다고 쓰면 되겠네요.”
“그건 왜요?”
“그래야 힘이 적게 들고 지혈도 잘되거든요. 아, 천자한 부위(Puncture site)가 아니라 몸쪽(Proximal)에 가까운 부위를 눌러야 해요. 10분 지났다고 가정하죠.”
바로 손을 뗀 진혁이 테이블 위에 있는 A4 용지에 스케치를 시작했다.
슥슥.
삭삭.
천자한 부위보다 안쪽을 누르고 있는 손가락.
그리고 피부밑 혈관까지.
엉성한 진혁의 솜씨에 장혁준이 웃었다.
“한번 보면 다 따라 할 줄 안다더니, 그림은 왜 이렇게 못 그리는데요.”
“뭐, 그건 모르겠네요.”
“와, 그 모른다는 말 좀 하지 말아요. 지금 IM(내과)부터 시작해서 다른 과들이 검증하겠다고 다들 벼르고 있다고요.”
“GS는 그런 말 없던데요?”
“뭐, 그야…….”
“빨리 작업이나 하죠. 이게…….”
진혁이 한참 설명을 이어 갔다.
환자에게 기침을 시켜 블리딩(출혈)이 완전히 멎었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는 말.
아스피린이나 와파린을 복용했는지 체크하고.
쉬스(Sheath)의 구경이 크면 더 오래 지혈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열심히 필기하는 장혁준.
그리고 또 다른 스케치를 하는 이진혁.
그들을 이태희가 지켜보고 있었다.
* * *
처음엔 술기 연습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녹음, 사진 촬영.
삽화 스케치까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그보다.
“NS(신경외과)나 CV(심장내과)에서 하는 걸 왜 지금 연습하는 거야? 이건 ER에서 하지 않는 술기잖아.”
다른 과에 가면 하는 술기를 미리부터 연습하는 게 제일 이상했다.
이태희의 표정을 확인한 장혁준이 웃었다.
“인계장에 적힌 다른 과 술기들을 하나씩 따라 하는 거예요. 사진 촬영도 하고요.”
“왜? 다른 과에서 검증 들어올까 봐? 오프 때마다 둘이서 연습한 거야?”
“하나도 못 듣고 왔어요?”
“뭘 못 들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이태희.
순간 진혁의 표정까지 확인한 장혁준이 말을 돌렸다.
“능력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노력하는 2호 동지! 어때요! 캬. 멋있죠?”
“…….”
“우리 2호 동지가 이 정도라고요.”
장혁준의 말에 이태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간 칼같이 사라지던 이진혁과 장혁준.
둘이 뭘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건만, 아니었다.
특히나 충격으로 다가온 건 장혁준의 행태였다.
틈만 나면 여자 친구 얘기만 하던 장혁준도 엄청 진지하게 임하고 있지 않던가.
그에 비하면 자신은.
‘진짜 어리광이었구나. 어리광이었어.’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황.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진혁이 다시 움직였다.
먼저 인계장을 훑은 뒤 책을 빠르게 뒤진다.
오래전에 했던 술기는 기억나지 않았기에 하는 일.
그렇게 두어 번 연습하고는 다시 촬영.
1시간, 2시간, 3시간.
이태희는 말없이 둘을 살폈다.
아니,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뚫어져라 진혁의 움직임을 관찰했다고 해야 맞았다.
* * *
한참 후 듣게 된 일의 전말.
이태희의 눈이 커졌다.
“책을 집필한다고?”
“아, 지금까지 뭘 들은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장혁준의 계속된 설명.
이태희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턴이 인턴을 위한 책을 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같이 해 보는 게 어떨까 해서. 옆에서 보다 보면 실력이 빨리 늘지 않을까?”
이진혁도 합류를 권유해 왔다.
한참 말이 없던 이태희가 입을 열었다.
“옆에서 하는 걸 지켜보다 보면 실력이 빠르게 늘 거라는 거지? 책 만드는 데 손이 부족하기도 하고.”
“뭐, 싫으면 말고.”
“할게. 근데 기왕 하는 거 비디오카메라로도 찍어 보는 게 어떨까?”
“캠으로 찍어 보자고?”
“어, 아무래도 사진보다 영상을 보는 게 더 직관적이니까.”
“흠.”
“뭐, 불법 제본도 걱정된다며. 동영상을 CD로 담아서 같이 파는 것도 좋을 거 같아서.”
생각지도 못한 제안.
어떻게 작업할지 논의가 시작됐고.
R&R마저 다시 정립됐다.
이진혁 : 술기 시연, 『영닥터』 Q&A 답변.
장혁준 : 사진 촬영, 사례 수집 및 보조.
이태희 : 동영상 촬영 및 보조.
물론 진통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진짜 지분은 필요 없다고?”
“어, 어차피 옆에서 보면서 배우는 게 중요하니까. 난 괜찮아.”
“뭐, 그러든가.”
진혁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장혁준이 갑자기 이태희를 껴안았다.
“누님!! 캬아아아!! 그럼 제 지분 안 나눠 줘도 되는 거죠?”
“뭐래! 그건 가져갈 거야.”
“으잉? 필요 없다면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10%는 너무 많아.”
“와, 그런 게 어딨어요!!”
한참 이어진 투덕거림.
이태희의 생각도 이현아와 비슷했고.
진혁의 지분은 93%로 정리됐다.
* * *
[사건 발생 당일]천리안에 누군가 동호회를 만들었다.
『이진혁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모임』
이른바 <이진요>.
육선재의 사주를 받은 이가 시샵.
목표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자랑하는 이진혁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