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71)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171화(171/388)
171화. 할 수 없는 일 (10)
휴가 중에 들어오라고 하는 회사.
그 이유야 뻔했다.
회유와 협박을 하기 위함이다.
그게 아니라면 들어오라고 할 리 없었다.
아이와 아내가 입원해 있지 않던가!
해서 녹음기를 건네려 했다.
하지만.
‘이걸로 될까?’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녹음은 보신책일 뿐.
최소한의 방어권 행사일 뿐이었다.
설사 녹음한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를 공개한 순간 직장을 잃을 테고, 내부 고발자로 낙인찍힐 테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절로 쓴웃음이 났다.
생명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때때로 그 자신은 닳고 닳은 의사처럼 모든 걸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과한 우려일지도 모른다.
아니, 과한 우려이길 바랬다.
뭐, 대비는 해야겠지만 말이다.
곧, 인턴 휴게실에 들러 사물함을 뒤적거린 진혁이 초소형 녹음기를 챙겨 들었다.
의료 소송 건에 휘말렸을 때 이현아가 선물해 준 녹음기였다.
다시 안정호 앞에 선 진혁이 그의 행색을 살폈다.
수심이 그득한 눈빛.
그늘진 얼굴.
축 늘어진 어깨.
중증 환자를 둔 보호자라면 누구나 그렇듯 안정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마음고생이 심한 것이다.
곧, 그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의아함도 잠시.
조금 전에 온 게 분명한 문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봐, 안 과장, 잘 생각해.] [3시에 들어와야 해.] [꼭 들어와! 어!] [일이 이렇게 된 건 유감이야.]혹시나 오지 않을까 싶어 보낸 문자.
이를 확인하고 있자니 열불이 터졌다.
좋게좋게 생각하자고,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냐며 마음을 다잡았던 자신이 한심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제조사와 판매사들의 사과는 없었다.
변명만 있었다.
쉽게 인증해 준 정부 탓이라며 국회에 출석해 한참을 떠들던 외국계 기업의 대표.
외국계 기업을 총알받이로 세워 놓고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았던 대기업.
제대로 된 보상도 없었으며.
올바른 사과도 없었고.
오롯이 가습기 살균제를 쓴 이들만 고통받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독한 고통이었다.
산소통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환자.
그 환자를 지켜보는 보호자.
가습기 살균제를 들이붓던 제 손을 잘라 버리고 싶다며 평생을 죄책감에 살아가야 했고.
자살한 이도 숱하게 많았다.
영수증을 찾지 못해 배상받지 못한 이도 수두룩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짧은 탄식을 내뱉은 진혁이 녹음기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그러자 안정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녹음기는 왜⋯⋯.”
“선택하셔야 합니다.”
“⋯⋯?”
“회유하려고 들 겁니다. 거액을 제시하면서 가습기 살균제를 쓴 적이 없다고 발표하라고 시킬 겁니다.”
“⋯⋯.”
“회사 편이 돼서 시키는 대로 따르든가, 끝까지 싸우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
설명 끝에 이어진 건 침묵.
진혁이 안정호를 직시했다.
깊은 숨을 내쉰 그가 입을 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
“한순간에 여론이 뒤바뀔 겁니다. 검증 결과가 나오려면 한참 걸릴 테고, 뭐, 어쩌면 검증 시도조차 중단될지 모릅니다. 저쪽에서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잠시 숨을 고른 진혁이 말을 이어 갔다.
“수현이처럼 아픈 환자들이 계속 나올 겁니다.”
“선생님도 곤란하시겠죠.”
“네.”
짧은 대답을 끝으로 진혁이 말을 아꼈다.
물론 더 길게 설명할 수도 있었다.
그 자신도 곤란해진다고.
병원장님은 직을 걸었고.
여러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 산소통을 등에 짊어지고 살아야 할 피해자의 고통과 그 자신의 치를 홍역을 비교해 본다면 그 자신의 입장을 설파하는 건 못 할 짓이었다.
한참 고심하던 안정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싸우겠습니다.”
“힘든 일이 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합니다.”
“⋯⋯.”
“수아가, 수아가 많이 아픕니다.”
“⋯⋯.”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자책하고 있습니다. 수아 때문에라도 반드시 원인 규명을 해야 합니다.”
“가습기 살균제 때문이라는 게 밝혀지면⋯⋯.”
“압니다, 자책하고 또 후회하겠죠. 하지만, 그건 나중 일입니다.”
안정호의 대답에 진혁이 침묵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고민하던 진혁이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이현아는 정신없이 바빴다.
이진혁을 돕기 위해선 전문가 인터뷰도 따야 했고.
다른 PD들도 움직여야 했다.
특히 보도국의 논조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아, 선배! 쫌! 도와줘요! 네~~~!?!”
[이야, 천하의 이현아가 앓는 소리도 하고, 웬일이냐! 어!]“웬일이긴요! 저 원래 그렇게 콧대 안 높았어요. 좀 도와주세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선배 찬스 써 보겠어요! 네!?”
[뭐, 나도 돕고 싶긴 한데⋯⋯. 뭐, 이미 검증해 보기로 한 거 아니었어?]“아! 진짜 이러기예요!”
[어효, 무서워라.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고!]“오케이! 선배 그럼 부탁 좀 할게요!”
뚜욱.
전화를 끊은 이현아가 다시 인트라넷의 조직도를 뒤적거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
제대로 보여 줄 기세였다.
그 모습에 정아름이 고개를 저었다.
“사랑에 빠지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더니, 선배 진짜 왜 그래요.”
“뭐? 내가 뭐!”
“밥 한번 먹은 적 없는 사람한테 전화 돌리는 건, 좀 아니잖아요.”
“확실하게 하고 싶을 뿐이야. 『외과의사 24시』의 명운이 달린 일이라고.”
“네네, 그러시겠죠.”
“이게 콱! 죽을래!”
이현아가 도끼눈을 뜨자 정아름이 기막혀했다.
스타 의사이자, 주연이나 다름없는 이진혁의 명운이 프로그램과 직결되는 건 맞았다.
하지만 이건.
‘사감이야, 사감. 사감이 듬뿍 들어 있다고.’
정도를 넘고 있었다.
그렇게 정아름이 한참 혀를 차고 있을 때.
이진혁의 전화를 받은 이현아가 핸드백을 들쳐 멨다.
아신 병원으로 당장 달려가려는 것이다.
✻ ✻ ✻
시간을 뺄 수 없어 치프인 황선웅에게 부탁했고.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뻔히 알고 있는 마당.
외면할 순 없으니 하는 처사였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자, 진혁이 급조한 계획을 설명했다.
“⋯⋯그런 이유로 녹음을 할 겁니다.”
“잠깐! 잠깐만요!”
“⋯⋯?”
“너무 임팩트가 없어요. 초원복집 사건 몰라요? 선거 개입은 묻히고 불법 녹음에만 열을 올렸다고요.”
“뭐, 프레임을 그렇게 잡을 수도 있겠죠.”
너무도 빠른 인정.
고개를 갸웃거린 이현아가 뭐라 말을 꺼내려던 찰나.
장혁준이 나섰다.
“초원복집 사건이 뭔데요?”
“복집에서 밥 먹으면서, 부정 선거를 기획했던 일이 있어요.”
“엥? 누가요?”
“당시 여당에서요. 근데 다 묻혔죠.”
“⋯⋯?”
“부정 선거를 대놓고 기획했는데, 불법 녹음이라고 프레임을 잡고 언론에서 십자포화를 쏟아 냈거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장혁준의 반문에 진혁은 답하지 않았다.
그게 언론의 힘이었으니까.
곧, 진혁이 주변을 아울렀다.
“초원복집 사건을 직접 언급합시다.”
“직접요?”
“회사에 가기 전에 미리 촬영하는 거죠. 협박을 받을 거 같다. 겁이 난다. 그래서 녹음을 할 거다. 근데 언론에서 초원복집 사건 때처럼 불법 녹음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뭐, 이렇게 말하는 거죠.”
“그다음에는요?”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기자 회견을 할 겁니다.”
진혁의 설명에 다들 눈을 크게 떴다.
또다시 그의 희생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이현아가 일어섰다.
“안 돼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보이잖아요!”
“뭐, 공격이 빗발치겠죠. 온갖 비난이 쏟아질 겁니다.”
“또 감수하겠다는 거잖아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요!”
“의사니까요.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배워 왔으니까요.”
“하⋯⋯.”
“극적 반전이 있어야 상대를 완전히 끝낼 수 있어서 그래요.”
“그래도 이건⋯⋯.”
진혁을 말리려던 이현아가 말을 삼켰다.
단호한 눈빛.
힘이 실린 말투.
자신감 있는 태도.
모든 걸 그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뜻이 확고해 보였다.
이현아가 나직이 한숨을 쉬자, 진혁이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일단, 이 PD님은 촬영 좀 해 주세요. 그리고 장 선생은⋯⋯.”
✻ ✻ ✻
진혁의 계획대로 촬영을 마친 안정호는 택시를 잡았다.
일단 천호역까지 간 뒤, 5호선을 타고 여의도역까지 갈 생각이었다.
택시 기사가 뭐라 말을 걸어왔지만, 대꾸할 기운이 없었다.
곧, 그의 눈에 사람들이 보였다.
땅만 보며 걸어가는 사람들.
다 사연이 있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삶의 무게에 찌들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다니는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다 보니, 수천, 수만 가지의 잡념이 떠오르며 마음을 어지럽혔다.
잠실역까지 개통한 뒤, 천호역까지 연장 공사를 하고 있는 8호선 공사 현장도.
땀 흘리며 일하는 누군가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신이 우려가 기우이기를.
괜한 우려이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여의도 본사.
그리고 회의실.
어떻게 도착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다시 건물 밖이었다.
안정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은 마천루와 같은 고층 빌딩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고, 담당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릴 뿐이었다.
– 안정호 씨, 회사를 위한 일입니다.
– 가족 같은 회사 아닙니까!
– 치료비는 전부 지원하겠습니다.
– 허허, 왜라니요. 가습기 살균제만 파는 것도 아니고 다른 제품까지 팔고 있지 않습니까. 매출 타격이 큽니다.
–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네!
–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말이 많습니다. 해사 행위를 한 게 아닙니까!
회유와 협박만 듣고 나왔고.
아무런 사과도 들을 수 없었다.
개발실에서 제품 테스트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그런 거 같다고.
미안하다고.
그런 말 따윈 없었다.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뒤덮인 고층 빌딩 사이로 보이는 저 조그만 파란 하늘이, 인간사의 단면을 보여 주는 거 같았다.
✻ ✻ ✻
며칠 후.
예정된 기자 회견이 취소됐다.
기자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이들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보호자이자 피해자인 안정호가 단독 기자 회견을 했기 때문이다.
– 우리 가족은 가습기 살균제를 쓴 적이 없습니다!!
진혁의 계획대로 움직인 행동이었지만, 전후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 소식은 원내로 퍼져 나갔다.
“와, 무슨 일이 이렇게 돌아가냐.”
“내 말이, 운영회의도 잘 넘겼다 싶었는데, 완전 반전이잖아, 반전.”
“야야, 내과 계열은 지금 축제 분위기란다.”
“축제? 왜? 이거 땜에?”
“뭐, 살판난 거지. 이사장님이 가만히 있으시겠냐고. 당장 병원장님부터 잘릴 거라고 난리도 아니더라.”
오지호가 직을 걸었다는 건 이미 파다하게 퍼진 상황.
안정호의 갑작스러운 기자 회견으로 외과 계열이 몰락할 거라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안 그래도 적자가 예상되는 올해.
오지호가 아니라면 구조조정을 하고도 남았을 실적이었다.
그렇게 병원이 수선스러운 가운데.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일이 커졌다.
아신 병원 측에서 내보낸 보도 자료와 기업 측에서 내보낸 보도 자료를 두고 진검 승부를 겨루던 언론들이 합심해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특종! 가습기 살균제를 쓴 적 없다고 밝혀!] [가습기 살균제 괴담으로 밝혀져!] [날조와 선동에 휩싸인 병원, 왜 이러나!]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들. 고소 의사 밝혀!] [천문학적인 손해 배상! 이진혁은 끝났다!]너무 많은 기업이 연루되어 있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
신문을 살핀 진혁이 쓰게 웃었다.
곧, 그가 『영닥터』에 들어갔다.
장혁준이 여론전에 힘을 쏟았던 『영닥터』는 개판 5분 전이었다.
[이진혁이 병X 됐네. ㅋㅋㅋ]└ 레알. 닭 쫓던 개가 새된 듯.
└ 지붕 쳐다본다는 말이겠지. 너 의대 나온 거 맞냐?
└ 닥쳐 ㅋㅋㅋ 이진혁이랑 놀아라.
└ 근데 일이 어떻게 이렇게 꼬이냐.
└ 내 말이. 하필 피해자가 가습기 살균제를 쓴 적이 없다고 밝혀버리냐.
└ 지금 신문 보도 봤냐. 난리 났다, 난리 났어.
그 자신을 조롱하고.
희롱하는 글들만 그득한 댓글.
진혁이 다른 글을 살폈다.
그러자 의혹을 제기하는 글도 보인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냐? 이제 와서 왜 기자 회견을 한 건데?]└ 뭐가 이상한데?
└ 아니, 밝힐 거면 진즉 밝히지 왜 지금 밝히냐고. 혹시 돈 주고 회유한 거 아니냐? 보호자가 그 회사 다닌다며.
└ 이거 고소각이다 ㅋㅋㅋ
└ 천리안은 캡처 안 되거든?
└ 꿀잼각이다. 그냥 팝콘이나 먹어.
└ 팝콘은 먹어봤냐.
진혁은 계속해 글을 살폈다.
뭐, 의혹을 제기하는 이는 소수.
대부분 언론에 잡아먹힌 뒤였다.
어쩌면 당연했다.
검증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사태가 계속 커지고 또 커졌다.
진혁이 움직인 건 치료비 명목으로 거액의 돈이 입금된 뒤였다.
이젠 가습기 제조사와 판매사들을 때려잡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