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75)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175화(175/388)
175화. 내가 바로 말리그다 (1)
레지던트들은 말없이 진혁을 응시했다.
보고 또 보고, 계속 바라봤다.
이에, 진혁도 가만있지 않았다.
덩달아 그들을 응시했다.
한 명, 한 명.
가운에 적힌 이름을 살피고.
인계장에 적힌 내용을 떠올렸다.
그러다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모든 내과 계열이 자리한 상황.
횡대로 길게 늘어서 있기에 가능한 고갯짓이었다.
그러자 레지던트의 반응이 변한다.
누군가는 말리그와 상대하는 게 싫다는 듯 시선을 피했고.
누군가는 피곤해 죽겠다며 귀찮아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눈을 부라렸다.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저들은 하나처럼 보였지만, 하나가 아니다.
군집처럼 보이기 위해 뭉쳐 있지만, 파편화된 개인일 뿐이다.
진혁의 시선이 추려진다.
눈을 부라리던 이들만 따로 살폈다.
그 숫자는 10명.
그들 또한 갈렸다.
그 자신으로 유발된 윗분들의 짜증과 호통.
부정적인 감정의 편린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이들은 내리 갈궈서라도,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돌려주고자 했고.
야욕을 부리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의 틈을 확인한 순간, 대응 방침이 정해졌다.
정당방위.
그리고 각개 격파.
일단 맞아 준 뒤에 한 명씩 조진다.
여기는 적지 한복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결심을 굳힐 때.
권문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일반내과 치프였다.
“Y2K 바이러스가 뭐지?”
“⋯⋯.”
“다들 모르나?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 바로 대답하도록.”
“⋯⋯.”
“대답 안 해!”
그의 역정에, 인턴 중 한 명이 대답했다.
“밀레니엄 버그를 뜻합니다.”
“더 자세히.”
“2000년이 되는 순간 기존 시스템을 전부 셧다운시켜 버리는 무서운 바이러스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그만.”
권문영이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러곤 고개를 돌렸다.
“Y2K 때문에 항공기도 추락할지 모른다는 설이 있다. 그만큼 위험한 바이러스지.”
“갑자기 왠 컴퓨터 얘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주위에도 바이러스가 있다.”
“그라운드 룰을 어기고 기존 질서를 흐트려 놓는 놈이 바이러스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나서지 않는다. 개인은 드러내지 않는다.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계속되는 엄포.
졸지에 바이러스가 된 진혁이 눈을 빛냈다.
✻ ✻ ✻
회진과 컨퍼런스.자신을 달가워하는 이는 없었다.
먼저 시비를 걸었던 일은 선택적 기억 상실로 잊어버린 이들.
그들은 피해를 본 일만 기억했고.
다들 불편해하기만 했다.
– 인턴은 인턴답게.
본분에 충실하자는 말조차, 그 자신을 향한 공격일 뿐.
적진 한복판에 있다는 걸 실감할 뿐이다.
졸지에 R1 임상 권한마저 박탈당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일단 맞아 줘야 했다.
그게 계획이니까.
그렇게 액팅하던 중.
전화가 왔다.
딸깍.
“네, 이진혁입니다.”
[이 선생님, 111병동인데요. 28호실 ABGA 있어요.]“지금 51병동인데, 마무리만 하고 가겠습니다.”
[아뇨, 바로 검사 나가야 해서요. 주치의 선생님 오더예요.]“알겠습니다.”
뚜욱.
진혁은 하던 일을 급하게 마무리했다.
51병동 일을 전부 끝내려면 30분이 더 필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곤 곧장, 본관 7층에 있는 111병동으로 향했다.
51병동은 서관 3층에 있는 상황.
일단 구름다리를 건너야 했고.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스테이션에 도착하기 무섭게, 진혁이 말했다.
“방금 전화하신 분이죠? ABGA 키트 좀 주세요.”
조미혜라는 이름의 간호사가 바로 카트를 뒤적거렸다.
“여기요.”
“기왕 온 김에 한 번에 하려고 하는데요, 다른 건은요? 다른 건도 있으면 주세요.”
“아직 오더 나온 게 없어서요.”
“음.”
“저희도 최대한 모았다가 콜하고 싶었는데요, 뭐, 일이 이렇게 됐네요.”
“아, 네.”
짧은 대답 뒤, 병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이션으로 돌아온 진혁을 향해 조미혜가 말했다.
“검사실은 제가 가 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주세요, 제가 검사 돌릴게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진혁이 51병동으로 향했다.
아직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딸깍.
“네, 인턴 이진혁입니다.”
[이 선생님, 여기 83병동인데요. 컬쳐(Blood Culture, 혈액 배양 검사) 있어요.]“조금 이따 갈게요.”
[10분 내로 해야 한다고 해서요.]“누가요?”
[누구긴 누구예요, 주치의 선생님이죠.]“알겠습니다.”
뚜욱.
전화를 끊은 진혁은 행로를 바꿔야 했다.
51병동이 아니라 83병동으로.
사실 유치한 일이었다.
술기로 시비를 걸 수 없어서 하는 장난질이 분명하지 않은가.
83병동은 신관에 있었기에, 또다시 5분이라는 이동 시간을 허비했다.
곧바로 51병동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다시 전화가 왔고.
이번엔 다른 병동으로 향했다.
53병동, 57병동.
83병동, 89병동.
111병동.
방대한 내과 계열은 신관과 본관. 그리고 서관까지 흩어져 있었고.
아무리 빨리 가도 이동하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일 때.
동맥혈 검사를 맡겼던 조미혜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 선생님⋯⋯.]“네, 말씀하세요.”
[ABGA 다시 해 주셔야 할 거 같아요. 검사 돌렸는데 Fault 났어요.]“아⋯⋯.”
[죄송해요, 제가 일하다가 깜빡해서⋯⋯.]거짓말이었다.
검사실에 대신 가 주겠다 하더니.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진혁이 숨을 고르며 되물었다.
“죄송한데 몇 년 차시죠?”
[그건 왜요?]“아뇨, 아닙니다.”
그대로 전화를 끊은 진혁이 조미혜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수간호사한테 사주를 받은 게 틀림없는 상황.
간호사까지 살생부에 올렸다.
그 와중에 다시 전화가 왔다.
[선생님, 81병동인데, 다시 와 주셔야 할 거 같아요. 피그테일(Pig Tail) 있어요.]“네? 조금 전엔 없다고 하셨잖아요.”
[1분 전에 오더 났어요.]“조금 이따 가겠습니다.”
[안 돼요, 급하단 말이에요. 응급이에요, 응급.]“알겠습니다.”
급하지 않은 일이 어딨을까.
진혁이 또다시 명단을 업데이트했다.
✻ ✻ ✻
상대는 영리했다.
직접 오더하지 않았다.
레지던트는 간호사에게.
간호사는 다시 자신에게 전화하는 구조를 유지했다.
거기에 더해, 오더를 드문드문 내렸다.
이동 시간을 잡아먹고.
뺑뺑이를 돌리려는 수작질이었다.
결국, 펑크가 났다.
당장 R3인 윤중선이 진혁을 호출했다.
그가 눈을 부라렸다.
“이진혁 선생.”
“예, 선생님.”
“유명해졌다고 대충하기로 한 겁니까?”
“아닙니다.”
“그럼 왜 계속 로딩이 걸리죠?”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환자한테 죄송해야죠. MRI랑 CT 펑크 난 게 벌써 세 건이에요, 세 건.”
“⋯⋯.”
“예약 시간까지 퍼미션(동의서)을 못 받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죄송합니다.”
“말만 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고요, 킵을 서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뺑뺑이를 돌다 퍼미션을 놓친 상황.
결국, 정해진 시간에 검사를 받지 못했고.
스케줄이 줄줄이 밀렸다.
할 말이 없던 진혁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기분 나빠하진 않았다.
이 또한 예상했던 일.
윤중선이라는 이름을 살생부에 적을 뿐이다.
“기본에 충실하자고요!”
“죄송합니다.”
“아, 진짜.”
그렇게 진하게 얻어맞은 진혁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일단 동기들을 동원했다.
성형외과에 갈 수 없게 됐다며 흑화된 김현수는 제외.
장혁준과 이태희.
그리고 최재성에게 부탁했다.
퍼미션만 받아 달라고.
ABGA 같은 건 처리 좀 해 달라고.
정당방위가 성립되려면 실컷 얻어맞아야 했지만, 환자를 생각해선 적당한 조율이 필요했다.
허나 상대의 대응이 변했다.
[선생님, 여기 63병동인데요. 파라(Abdominal Paracentesis, 복수천자) 있어요.]“네네.”
[이 선생님, 왜 안 오시는데요! 여기 C라인 이리게이션 있어요.]“갑니다, 가요.”
장혁준과 이태희, 그리고 최재성이 하기 어려운 일들을 쏟아 내기 시작한 것이다.
헬퍼를 차단하는 행위였다.
✻ ✻ ✻
어느덧 저녁 7시.
김치찌개를 흡입하던 윤중선이 치프인 권문영에게 고했다.
“이진혁이 그놈, 아주 죽을 맛일 겁니다.”
“뭐, 잔재주를 부렸다며.”
“그렇게 엄포를 놔도 도와주는 놈들이 있더라고요.”
“이름이 뭔데.”
“이태희랑 장혁준, 그리고 찐따 같은 놈 하나 있습니다. 왜 그, 말 더듬는 놈이요. 이진혁이랑 친한 놈들입니다.”
“그놈들도 조져. 정신없이 굴려서 도와줄 생각도 못 하게 하라고.”
“그럼요, 그래야지요.”
윤중선이 히죽거렸다.
물론 사감은 없었다.
그냥 권문영한테 잘 보이고 싶을 뿐이었다.
개업하지 않는 이상 그와 평생을 함께해야 했으니까.
2년 선배라는 건 그런 존재였다.
돈가스를 먹던 권문영이 물었다.
“이진혁이, 그 새끼 지금 뭐 하고 있냐?”
“에네마(Enema, 관장)하고 있을걸요?”
“그래?”
“네, 에네마 콜도 몰아주라고 했거든요. 지금쯤 토하고 있을 겁니다.”
윤중선의 대답에 권문영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또한 윗선의 오더를 받은 상황.
저 대신 손에 피를 묻히는 후배가 그토록 이뻐 보일 수 없었다.
“중선아, 계속 이렇게만 해. 계속 같이 가야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충성, 충성!”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윤중선의 인사.
권문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돈가스를 입에 욱여넣었다.
✻ ✻ ✻
그 시각, 진혁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에네마(Enema).
이른바 관장.
인턴이 하지 않는 병원도 많았지만, 아신 병원은 인턴 잡이었다.
뭐, 술기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냄새가 고약할 뿐이었다.
곧바로 관장기를 통해 관장액을 주사했다.
하지만 잘 들어가지 않는다.
이럴 때 해야 하는 건 위치 변경.
샤워한 지 한참 된 게 분명한 환자가 코끝을 찌르는 냄새를 풍겼지만, 숨을 참고 빠르게 손을 놀렸다.
하지만 관장액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거기에 더해, 대변마저 같이 쏟아져 나왔다.
“아⋯⋯.”
침음성을 내뱉은 진혁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작업을 마무리했다.
민망해하는 환자.
병실을 뒤덮는 똥 냄새.
빠른 뒤처리만이 살길이었다.
그렇게 처치를 끝낸 진혁이 화장실에 달려가 손을 씻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아무리 씻어도 냄새는 빠지지 않는다.
장갑을 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기 무섭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 선생님, 55병동인데요, 핑거 에네마(Finger enema) 있어요.]“알겠습니다.”
쓰게 웃은 그가 곧바로 움직였다.
그렇게 도착한 병실.
다시 진혁이 심호흡했다.
이번엔 손가락으로 딱딱하게 굳은 변을 긁어 내야 했다.
베드 위에 비닐을 세팅한 진혁이 말했다.
“환자분, 왼편으로 누워 보시겠어요.”
“이렇게요?”
“무릎은 더 굽히세요.”
“네.”
환자가 자세를 잡자, 진혁이 심호흡을 했다.
엉덩이는 살짝 침대 밖으로 나오게 한 상황.
대변이 쏟아져도 쓰레기통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한 뒤, 라텍스 장갑을 착용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보통은 두 개를 착용하지만, 하나를 더 낀다.
물론 그렇다고 냄새가 배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른손 검지에 젤을 바른 다음 그대로 집어넣었다.
직장까지 들어갈 정도로 깊게.
곧, 딱딱한 분변이 느껴진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광부가 금광석을 채굴하듯.
변을 긁어낸다.
조금씩.
다시 조금씩.
그리고 어느 순간.
변이 쏟아져 나왔다.
입구를 굳게 막고 있던 숙변을 제거했으니, 당연한 일.
만반의 대비를 다 했건만 똥물을 뒤집어쓴 진혁이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치졸하게 나오는 이상, 그 자신도 치졸해져야 했다.
✻ ✻ ✻
며칠 후, 소문이 돌았다.
이진혁이 내과에 발리고 있다고.
탈탈 털리고 있다고.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이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괜찮냐, 누가 그러냐, 어떤 새끼냐.
내가 죽여 버리겠다.
당장 이름부터 말해라.
정당방위가 성립됐다는 생각에 진혁이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의의 육모방망이도 가끔은 치졸해져야 했다.
잘 가라 윤중선.
인계장대로라면 윤중선은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