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76)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176화(176/388)
176화. 내가 바로 말리그다 (2)
‘선생님! 쟤가 괴롭혀요!’
이는 어린아이나 할 소리였다.
고학년만 돼도 안다.
고자질은 보복만 부를 뿐.
헛된 일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고자질을 했다.
윤중선이 괴롭힌다고.
저놈 좀 혼내 달라고.
물론 의미 없는 행동일 수 있었다.
그는 내과 소속이니까.
하지만 인계장에 적혀 있었다.
여자 친구가 외과 계열에 있다고.
아니나 다를까.
일반외과 치프인 유진태한테 ‘윤중선’이라는 이름만 말했을 뿐인데.
그의 여자 친구가 불려 갔다.
✻ ✻ ✻
생각보다 의사-의사 커플은 많다.
물론 선민의식 같은 건 아니었다.
끼리끼리 만나야 한다는 의식의 발로라기보다, 그냥 얼굴을 맞대다 보니 사랑이 움튼 케이스가 많다고 해야 맞았다.
그만큼 얼굴을 자주 보고.
같이 날밤을 새운다는 건, 호르몬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그런 면에서 윤중선은 특이한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내과 계열도 아니고.
무려 외과 계열의 여자 친구를 두고 있으니까.
그건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만남은 아니었다.
그냥 노력의 산물이었다.
신입생이던 정지혜를 점 찍었고.
‘밥 사 주기 신공’을 통해 친해졌다.
결국, 사랑을 쟁취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본 이들은 윤중선과 정지혜를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불렀다.
로미오는 내과를.
줄리엣은 외과를 지원했으니까.
왜 그렇게 부르냐고?
뭐, 재밌지 않던가.
그리고 오늘은 줄리엣인 정지혜를 만나는 날이었다.
윤중선은 세수도 하고.
눈곱도 뗐으며.
이도 닦았다.
평소엔 하지 못하는 개인 정비였다.
그는 누런 목 때가 서린 가운마저 벗어 던졌다.
그러고선 세탁실에서 막 찾아온, 뽀송뽀송한 흰 가운을 입었다.
그 나름의 단장이었다.
그렇게 개인 정비를 마친 윤중선은, 지하 식당가로 향했다.
일주일 만에 만나는 정지혜.
구내식당을 갈 순 없었다.
잠시 후.
돈가스집에 들어간 윤중선이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여기.”
반갑게 건넨 인사와 달리 정지혜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의아함도 잠시.
윤중선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 누가 갈궜어? 요새 갈구는 거 많이 줄었다며.”
“아니, 그냥.”
“왜, 뭔데?”
“그냥 기분이 좀 그래.”
짧은 대답.
윤중선은 말을 삼켰다.
더 추궁했다간 경을 칠 게 분명했다.
그가 입을 다물자, 어색한 침묵이 자리한다.
돈가스를 썰어 주며 야채도 먹으라고 잔소리하는 어머니들의 목소리만 울릴 뿐.
정적이 계속된다.
답답한 마음이 든 윤중선이 정지혜를 살폈다.
거칠어진 피부.
대충 묶은 포니테일 머리.
피곤해 보이는 얼굴까지.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내일 모래도 힘든 게 병원 생활.
매일 같이 힘든데 왜 저러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제 행태를 돌아본다.
혹시 나 때문인가?
내가 뭘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땐.
“미안해.”
사과부터 하는 게 장땡이었다.
그간 효과를 톡톡히 본 만큼, 자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지혜가 반응했다.
“뭐가 미안한데?”
“어?”
“뭐가 미안하냐고.”
“⋯⋯그냥 다.”
“⋯⋯.”
“내가 다 잘못했어.”
솔직히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냥 말했다.
정지혜의 눈매가 좁아졌다.
“잘못한 걸 알긴 아는구나.”
“그, 그럼. 나도 알지, 미안해.”
“그래? 근데 왜 그랬어?”
“⋯⋯.”
“이진혁한테 왜 그랬냐고.”
“⋯⋯!”
뜬금없는 말리그 얘기.
윤중선의 표정이 굳었다.
이진혁 때문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윤중선이 말을 절었다.
“왜, 왜 그랬냐니.”
“내가 모를 줄 알아? 오빠가 엄청 갈군다며.”
“내, 내가 아니라 위에서 갈구는 거야.”
“내가 들은 거랑 다른데?”
“⋯⋯.”
“내가 유방 외과 소속인 건 알고 있는 거지?”
“아, 아니, 지혜야 그게.”
“요즘 무슨 말을 듣는 줄 알아? 뻔히 사정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
단단히 화가 난 정지혜.
그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말투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
어째서?
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놈이 고자질했어? 하⋯⋯.’
말리그가 말리그답게 행동하고 있었다.
✻ ✻ ✻
잃을 게 없는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이 있을까.
이진혁은 잃을 게 없었다.
아신대 출신도 아니고.
인맥에 얽혀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내과에 지원할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그랬으리라.
그래서 고자질했으리라.
치사한 놈.
거지 같은 놈.
죽일 놈.
정지혜한테 한참을 쩔쩔맸던 윤중선은 분노가 치밀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곧 그의 눈에 이진혁이 들어온다.
차팅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절로 콧바람이 일고, 발정 난 암소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당장 다가가 으르렁거렸다.
“너 이 새끼⋯⋯.”
“죄송합니다.”
“⋯⋯!”
“시정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허리를 굽힌다.
사실 그 모습은 다른 인턴과 다를 바 없었다.
학습 효과가 생긴 인턴들은 레지던트의 표정만 봐도 사과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하지만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이다.
얼음장을 깨고 입수한 것처럼 심장이 차게 식는다.
정신이 번쩍 든다.
곧 그가 주위를 살폈다.
최재성.
찐따처럼 말을 저는 놈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뿐이랴.
아신 병원 여신이라 불리는 이태희도 보고 있었다.
여기서 더 지랄하면.
‘지혜한테 들어간다.’
여자 친구의 귀에 들어갈 게 분명했다.
이진혁이 고자질을 하지 않더라도, 소문이 빠른 병원 특성상 그럴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윤중선이 몸을 떨었다.
✻ ✻ ✻
일 보 전진을 위한 이 보 후퇴.
이진혁을 내버려 뒀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치프인 권문영에게 고하지 않았던가.
저만 믿으시라고.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해서 행동 방침을 바꿨다.
뒤에서 몰래 괴롭히는 방식을 택했다.
앞에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계속 뺑뺑이를 돌렸다.
물리적인 거리로 인해 생긴 이동 시간은 강력했고.
술기에 자신 있다던 이진혁은 계속 펑크를 냈다. 그리고 그때마다 후배들이 나섰다.
그 자신은 R3.
인턴을 혼낼 R1과 R2는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이진혁의 행태가 고약했다.
직접 뭐라고 한 적도 없었건만, 그 자신을 찾아와 허리를 숙였다.
“선생님, 제가 좀 더 분발하겠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지 마, 하지 마요.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데요.”
“아닙니다.”
평소라면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한다고.
입으로 일하냐고 일갈해야 했지만, 윤중선은 떨떠름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이러다 정지혜의 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만하라고 해도.
진짜 한 번만 더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계속 허리를 굽혔고.
그날 저녁 문자가 왔다.
[오빠계속이럴거야?]띄어쓰기가 없다.
맞춤법을 모를 리 없건만 화가 단단히 났다는 그녀만의 신호다.
윤중선이 서둘러 답장했다.
[나 요새 아무것도 안 해.] [내가모를줄알아?] [아니, 그게 아니라⋯⋯.]한참 변명을 해야 했다.
하지만 윤중선은 이진혁을 엿먹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한정된 TO.
위로 올라가려면 끌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끌어당기고.
밀어 올리고.
성공의 필수 요소였다.
✻ ✻ ✻
파편화된 개인은 때로는 집단의 행보에 동참하지 않을 때도 있다.
‘나는 집단 이지매에 동참하지 않았어!’라는 생각은 죄책감을 덜어 주니까.
아니, 어쩌면 그 자신이 무서워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분원으로 쫓겨난 이들이 여럿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난 아무 잘못도 없어’라고 말하는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최재율.
최근 들어 윤중선을 대신해 자신을 괴롭히는 놈이었다.
“위에서 시켜서 그런 거예요, 알죠?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말 했다는 것도 보고하면 안 돼요.”
“그럼요, 감사합니다.”
진혁이 고개를 숙였지만, 최재율은 불안한 듯 연신 당부했다.
“너무 귀담아 두지 말아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나도 어쩔 수 없다고요.”
“그보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시 윤중선 선생님 오더 때문인가요?”
“그, 그건⋯⋯.”
최재율은 침묵했다.
하지만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윤중선이 시켜서 그런 거라고.
그 모습에 진혁이 마음을 달리 먹었다.
생각보다 끈질긴 윤중선.
다른 방법도 동원해야 했다.
“일단 라운딩이나 돌죠.”
“예.”
최재율이 재빨리 자리를 피하자, 진혁도 움직였다.
지금은 저렇게 말하고 떠났지만, 사람들이 볼 때면 호통치고 야단칠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프리라운딩을 돌았다.
빠르게 움직였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다.
병동은 크고 넓었으며, 멀리 떨어져 있었다.
통합 외과가 인턴을 데디케이트하게 돌렸다면, 내과는 그러지 않았기에 생긴 문제.
아니, 다른 인턴들은 구역을 정해 줬지만, 그 자신은 정해 주지 않았기에 생긴 문제였다.
그렇게 한참 병동을 돌던 진혁이 환자 앞에 멈춰 섰다.
윤중선이 주치의로 있는 환자였다.
차트를 살피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진혁이 입을 열었다.
“환자분, 원래 빈혈이 있다고 적혀 있는데요,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젊을 때부터 빈혈이 좀 심했어요.”
“그래요?”
“네, 근데 최근 들어 어지럼증이 심해졌어요. 배도 아프고, 몸도 쑤시고. 그냥 다 별로예요. 이거 왜 그런 거죠? 응급실에서 내과로 가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환자가 말꼬리를 흐렸다.
입원한 지 3일째.
원인을 몰라 답답한 모양이었다.
“잠시만요.”
으레 하는 말을 한 진혁이 다시 차트를 살폈다.
루틴 검사 중 하나인 흉부 엑스레이 촬영.
폐울혈이 확인됐다.
하지만 경증이다.
물론 초음파 검사도 진행했다.
허나 이 또한 정상이다.
상부 위장관 내시경은 또 어떠한가.
정상이다.
한데, 환자는 아파한다.
어지럼증을 호소한다.
바이탈 또한 좋지 않았다.
왜?
어째서?
회진 전에 프리라운딩을 끝내야 했지만, 진혁이 청진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선 이곳저곳을 청진했다.
폐음과 심음은 정상.
장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증상은 있는데, 원인은 모르는 상황.
청진기를 내려놓은 진혁이 다시 차트를 살폈다.
혈색소 8.1 g/dL.
헤마토크리트 24.3%.
MCV 62.5 fL.
백혈구 수 17,100/㎣
호중구 88.7%.
망상 적혈구 2.1%
망상 적혈구(Reticulocyte, 갓 생성된 적혈구) 수치가 들어온다.
2.1%
전체 적혈구 중 갓 생성된 적혈구의 비율이 높았다.
정상수치인 2.0%를 조금 넘기는 수준이었지만.
“빈혈이 있으셨던 거죠?”
“아까 말씀드렸는데⋯⋯. 원래 심했어요.”
“예.”
짧은 대답 후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내과는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자신 있는 건 있었다.
조그만 단서도 놓치지 않고 환자 한 명 한 명한테 최선을 다하는 것.
그 자신이 항상 해 오던 일이었다.
진혁이 곧장 주치의인 윤중선한테 전화를 걸었다.
시비를 걸 생각보다는, 환자가 걱정돼서 하는 행동이었다.
딸깍.
“선생님, 이진혁입니다.”
[바쁘니까 끊어요.]뚜욱.
프리라운딩으로 정신없는 시간대.
그럴 수 있었다.
그러니 나중에 얘기해도 됐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교수들.
그리고 윤중선.
회진 때 보고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딸깍.
“선생님, 이진혁입니다.”
[아, 왜요.]“그게⋯⋯.”
빠르게 노티했지만, 윤중선은 들은 척도 안 했다.
[Hemolytic anemia(용혈 빈혈, 적혈구가 정상적인 수명보다 더 빠르게 파괴되어 생기는 빈혈)인가 보죠.]“그래도 이런 경우라면 블리딩(출혈)을 의심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히스토리 테이킹 안 했어요? 원래 빈혈이 있는 환자라고요.]“그래도 검사해 보고 싶습니다. 블리딩 포인트(출혈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을 넘은 의견 개진.
지정의인 교수가 회진 때나 할 말을 하고 있으니, 윤중선이 폭발했다.
[야! 너 어디야! 어!]“81병동입니다.”
[거기서 기다려!]“예.”
뚜욱.
전화를 끊은 진혁이 바로 펜을 들었다.
차트로 조지는 행동.
다시 시작해야 했다.
✻ ✻ ✻
흥분한 윤중선은 막무가내였다.
그 순간만큼은 여자 친구인 정지혜도 떠오르지 않았는지 계속 몰아붙였다.
“너 이 새끼! 내가 오냐오냐하니까 만만해?! 어!”
“아닙니다.”
“그럼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어! 너는 인턴이야, 인턴! 고작 인턴이라고!”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이 새끼야!”
비상구로 끌고 가 개지랄하는 윤중선.
진혁은 묵묵히 들었다.
어차피 곧 회진 시간이니까.
잠시 후.
컨퍼런스 끝에 회진이 시작됐고.
진혁이 지적했던 환자 앞에 교수가 멈춰 섰다.
차트를 확인한 교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누가 썼지?”
“제가 썼습니다.”
“으음?”
이진혁이 나서자, 교수의 표정이 똥 씹은 얼굴로 변했다.
검사를 요청했는데, 윤중선이 거부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하필 그 상대가 이진혁이었다.
잠시 잠깐 고민하던 교수가 말했다.
“Colonoscopy(대장 내시경) 진행하지.”
얼핏 진혁의 말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꼬투리를 단단히 잡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에네마(관장)가 시작됐고.
어느새 관장 전문가가 된 진혁이 이를 맡았다.
대장 내시경 검사 또한 빠르게 진행됐다.
그 결과, 상방 직장 벽에 0.4cm 크기의 천공이 발견됐다.
미세 출혈이 시작되는 곳이자, 환자를 괴롭히는 병환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윤중선은 개처럼 털렸다.
검사를 거부했다는 기록을 남겼다는 이유.
이진혁한테 또 당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교수실을 나온 그가 비상구로 가 소리쳤다.
“말리그 새끼가 진짜⋯⋯. 끄으윽.”
말리그는 상대하는 게 아니라는 말.
괜히 내려오는 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