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1)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21화(21/388)
21화. 새로운 시작 (1)
단상 위에 올려진 뽑기 박스.
장혁준이 목청을 드높였다.
“신이시여! 부처님이시여!”
그 모습에 김현수가 어이없어했다.
“너 교회 다니잖아!”
“주일에 이미 기도했거든?”
“그래서 부처님한테도 빈다고?”
“원래 여럿한테 빌수록 좋은 법이다.”
“아서라, 아서. 그러다 천벌 받는다.”
“꺼져. 내일 출국인데 기분 좋게 좀 가자.”
“ER(응급의학과)이나 걸려라. 퉤.”
못마땅하다는 김현수의 반응.
장혁준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금 질투하냐?”
“질투는 무슨.”
“질투네! 질투! 그러니까 너도 연애하라니까!”
“됐어. PS(성형외과) 가려면 일만 해야 돼.”
“왜? 엄마가 연애하지 말래?”
“야!”
“언제까지 마마보이로 살래.”
“아!! 쫌!!”
얼굴이 붉어진 김현수가 발끈했지만,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당분간 여자를 돌같이 봐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장혁준이 혀를 찼다.
“그러다 후회한다.”
“남이사.”
“평생 혼자 산다니까?”
“나도 때 되면 할 거거든?”
“그게 언제냐니까!”
“아. 됐어!”
장혁준을 상대하기 싫은 김현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이태희가 들어왔다.
일부러 옆자리에 앉았건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뽑기 박스만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김현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데 어떻게 연애를 하냐고!’
사실, 어머니의 채근과 성형외과에 가야 한다는 절대명제 앞에서도 그녀에게 마음을 뺏긴 지 오래였다.
지금처럼 그녀가 눈에 들어올 때면 짝사랑에 빠진 여느 사람처럼 가슴이 쿵쾅거렸고 얼굴마저 붉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태희의 반응이 문제였다.
‘철벽 그 자체라고!!’
그때, 김현수의 시선을 확인한 장혁준이 나섰다.
“태희 누나! 우리 현수 좀 챙겨 줘요. 이러다 혼자 살겠어요.”
“뭐?”
“그래도 우리 2차 교육받으면서 좀 친해졌잖아요. 조금만 더 마음을 열어 달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불쌍하지도 않냐고요.”
“뭐래? 인생은 원래 혼자 사는 거야!”
이태희의 단호한 반응.
장혁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포기해라, 현수야.’
그때, 단상에 서 있던 사내가 소리쳤다.
“장혁준 선생님! 나오세요!”
시끄럽게 떠드는 사이.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 * *
뽑기를 마치고 돌아온 장혁준.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에 쥔 가느다란 종이가 제 운명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라한테도 빌었어야 했나.”
짧은 혼잣말에 담긴 함의.
안 그래도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김현수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왜 뭔데?”
“첫턴부터 ER.”
“뭐? 푸하하하.”
김현수가 포복절도했지만, 장혁준은 반응하지 않았다.
첫턴에 단연코 피해야 할 과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응급의학과였기 때문이다.
온갖 환자가 몰려드는 ER(응급의학과).
경증 환자는 가볍게 처치하고 돌려보내면 그만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다른 과를 콜해야 했고.
그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이제 어쩌냐.”
“뭐가.”
“노티(보고)할 때 애먹을 텐데.”
“그렇겠지.”
“새벽에 전화하면 엄청 까칠하다더라.”
“아. 몰라.”
“그러니까 마음을 곱게 썼어야지.”
“아! 모른다고!!”
공수가 뒤바뀐 상황.
김현수는 한참 장혁준을 놀렸다.
그러다가 제 이름이 불리자.
허겁지겁 단상에 올라가 박스에 손을 넣었다.
‘제, 제발!!’
그렇게 자리에 돌아와 턴표(월별 근무표)를 확인한 김현수가 기함했다.
“으아아악. 나는 왜 ER인데!!”
거기에 더해.
뒤이어 뽑기를 하고 돌아온 이태희조차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첫턴 ER인데?”
순간 김현수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모든 게 낯설고 어렵기만 한 첫턴.
그녀와 함께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 그래도 희망은 있는 건가.’
하지만, 표정이 밝아진 김현수와 달리 장혁준은 여전히 울상이었다.
“하와이에서 안 돌아올 거야.”
“뭐래. 그럼 누락이거든?”
“아, 몰라~! 모른다고!! 안 돌아와! 안 돌아온다고!”
“그러다 인턴 재수한다.”
“여차하면 개업하면 돼.”
“돈은?”
“엄마한테 빌려야지.”
장혁준이 금수저답게 말하고 있을 때.
이태희가 뽑기를 마치고 돌아온 진혁의 옆구리를 쳤다.
“넌 뭔데.”
“?”
“우리도 깠잖아. 너도 까야지.”
“안 궁금했는데.”
“와!! 너 진짜!!”
이태희가 미간을 찌푸리자.
진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저도 첫턴은 ER이에요.”
운명의 장난일까.
14조 10명 중 4명이 짝턴(과를 같이 도는 인턴)이 됐다.
* * *
대수롭지 않다는 진혁의 반응.
이태희가 찜찜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짜 ER이야?”
“네.”
“우리 네 명이 짝턴이라고?”
“아마 더 뽑을걸요? ER 정원이 8명이잖아요.”
“으으윽. 전 안 돌아올 거니까 빼 줘요.”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각기 다른 심정을 토해 내는 이들을 보며 진혁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으이구, 귀엽네. 귀여워.’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던 걸까.
이태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응이 왜 그래?”
“?”
“싫어해야 정상인데 왜 좋아하냐고.”
“ER은 교대근무잖아요.”
“근데?”
“집에 꼬박꼬박 갈 수 있어서 좋은데요? 하루 일하고 하루 쉬고. 얼마나 좋아요?”
“그게 좋다고?”
“집에 갈 수 있잖아요. 부모님하고도 같이 있을 수 있고.”
“뭐야. 또 엄마야? 최악이야, 너.”
이태희가 혀를 차며 제 신세를 한탄했다.
“마마보이 둘에 금수저 하나. 정상인은 나밖에 없잖아? 이게 말이 돼?”
그 모습에 진혁도 혀를 찼다.
‘친목질이 싫다더니, 왜 이렇게 민감한데!’
그녀는 여전히 종잡을 수 없었다.
그뿐이랴.
이태희를 보며 웃는 김현수나, 개업하면 된다면서도 괴로워하는 장혁준이나 전부 똑같았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패딩을 입고 다니던 이들이 조금씩 겨울옷을 옷장에 집어넣기 시작했고, 점차 봄이 다가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날씨가 완연해졌다.
그렇게 다가온 인턴들의 첫 출근날.
응급실 레지던트인 오태상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장길만이 손을 까닥거렸다.
“일찍 왔네?”
“병아리들 보는 날인데 일찍 와야지.”
“병아리는 무슨. 사고나 안 쳤으면 좋겠다.”
“왜?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니, 그냥.”
“?”
“하…….”
장길만의 때아닌 한숨.
오태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보고 있던 서류를 확인했다.
[3월 ER 인턴]A조 : 이진혁, 장혁준, 이태희, 김현수.
B조 : 하창태, 김태현, 우민성, 박두찬.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명단이었지만, 이진혁이라는 이름 위에 동그라미를 잔뜩 그려 놓은 장길만이었다.
“뭐야 이진혁한테 관심이라도 있어?”
“관심은 무슨. 그냥 껄끄러워서.”
“껄끄럽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왜? 차출됐던 날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뭔데?”
“됐어.”
장길만이 말을 삼키자.
오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레지던트가 왜 인턴을 꺼려?’
“어쨌든 맘에 안 든다는 말이지?”
“아니. 그건 아니고.”
“뭘 그렇게 고민해? 그냥 조지면 그만인데.”
“뭐?”
“내가 조져 줄게.”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
“난 이진혁이 망둥이처럼 날뛸 때부터 별로였어. 이런 놈은 첫날부터 잡아야 한다고. 언론에 나가려고 뭔 짓을 할지 모르는 놈이야.”
강경한 오태상의 반응에 장길만이 말을 삼켰다.
인턴을 조심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던가.
* * *
잠시 후.
파란색 셔츠 위에 흰 가운을 걸친 진혁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인턴 이진혁입니다.”
진혁이 공손히 인사를 건넸지만.
장길만은 말이 없었고.
오태상은 그저 고개만 까닥거렸다.
‘뭐야, 다들 왜 이래.’
진혁이 의아한 속내를 애써 감추며 말없이 자리에 앉자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
.
.
속이 울렁이고 거북한 상황.
평범한 인턴이라면 기가 죽어 무슨 말이라도 꺼냈겠지만, 진혁은 침묵했다.
사실, 그랬다.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
여기서 무슨 말을 더할까.
사회성을 발휘해 넉살을 부린다 한들 쿠사리를 줄 터.
이럴 때는 침묵만이 답이었다.
‘장길만이야 그렇다고 쳐도, 저 사람은 누군데 저러지.’
하지만 곧, 의문조차 날려 버렸다.
어차피 실력으로 보여 주면 그만이었다.
3분, 5분, 10분.
침묵이 계속되자 오태상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탈탈 털어 주마.’
안 그래도 달갑지 않던 이진혁.
싹싹하게 나와도 퉁명스럽게 대답하려고 했건만, 침묵을 유지하는 그의 태도가 고까웠다.
그때 김현수가 들어오며 어색한 침묵을 깼다.
“선배님!! 저 현수입니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선배님이라는 말.
함께 기타 동아리를 했던 오태상이 앉아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인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뭐? 선배?”
오태상이 눈을 부라리자 현수가 당황했다.
“네?”
“야. 김현수. 너 여기가 학교야?”
“아, 아닙니다!”
“조용히 하고 앉아!”
“네, 선배님.”
“이 자식이 빠져 가지고!! 선배는 무슨 선배야! 선생님이라고 불러!”
“죄송합니다!”
김현수가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황급히 자리에 앉았다.
오태상이 까칠하게 나오는 이유는 몰랐지만, 이럴 때는 납작 엎드려야 한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시작된 침묵.
현수가 뿔테 안경을 매만지며 눈알을 굴렸다.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닌데. 일할 때는 까칠한 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오태상의 반응.
사실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교생 인턴이 그나마 비빌 수 있는 건 선배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영문도 모르고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곧이어, 장혁준이 들어섰다.
하와이의 따가운 햇빛을 온몸으로 느끼고 온 그는, 태닝한 것처럼 얼굴이 시커멨다.
“Hey yo! 선배님들! 혁준이가 왔습니다.”
뜬금없는 영어 인사.
오태상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변했지만, 장혁준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떠들어 댔다.
“하와이에서 산 초콜릿입니다.”
“!”
“이건 마카다미아 맛, 이건 코코넛 맛, 이건 찐한 초콜릿 맛입니다!”
“!!”
김현수가 열심히 눈짓했지만, 장혁준은 양손 가득 챙겨 온 초콜릿을 책상 위에 올리기 바빴다.
[Welcome Hawaii]라는 상표가 달린 초콜릿.그 의미와 다르게, 오태상이 으르렁거렸다.
“야. 장혁준!!”
“옙! yo man~!!”
“정신 안 차려!?”
“네?”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앉아라!”
“!”
“앉으라고!!!”
“넵!”
허겁지겁 자리에 앉은 장혁준이 옆에 앉은 김현수를 향해 눈짓했다.
미국 물을 먹은 걸 티 내려고 했건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의문도 잠시.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태희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오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는데, 경고하지만 여긴 학교가 아니다. 앞으로 호칭은 선생님으로 통일한다.”
“네!”
“넵!”
각 잡힌 반응.
오태상이 손을 휘저었다.
“오늘은 첫날이고 설명하는 자리니까 편의상 반말로 한다. 물론, 이 방을 나가는 순간부터 존대할 거고. 불만 있는 사람?”
불만이 있을 턱이 없었다.
분위기가 이런데 무슨 말을 더할까.
오태상이 장길만을 쳐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반갑다. 내 이름은 장길만이고 같은 A조다. A조 소속 레지던트들이 더 있지만, 우리가 교육을 맡았다. 다른 선생님들한텐 컨퍼런스 때 인사하고.”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됐고. 바로 시작한다.”
인사를 잘라 먹은 오태상이 곧장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스크린에 배치도가 띄워졌다.
응급실이라기보단 응급센터에 가까운 거대한 규모의 ER.
아신대 출신들은 PK(실습생) 때 이미 들렀던 곳이기에 무덤덤했지만, 진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역시 아신 병원이라 이건가.’
진혁의 반응을 뒤로하고.
오태상이 설명을 이어 갔다.
“긴급진료실은 신경 쓸 필요 없다. 너희는 여기. 그리고 여기. 그리고 여기 담당이다.”
오태상이 포인트로 짚은 곳은 긴급진료실을 제외한 모든 곳이었다.
본관 6층에 자리한 긴급진료실은 암 환자나 이식 환자처럼 면역력이 저하된 이들을 위한 곳이었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은 덤이었다.
“뭐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우린 24시간 근무 후 B조와 교대한다.”
“!”
“퇴근은 인계가 확실히 됐는지 확인받고 퇴근한다. 맡은 일을 다 못 했다? 그럼 집에 갈 수 없다.”
“!!”
오태상의 설명은 계속됐다.
조금만 아파도 응급실을 찾는 한국 사람들로 인해 응급실은 항상 붐볐고, 아신 병원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이 찾는 곳인 만큼 주의할 것도 많았고 배워야 할 것도 많은 것이다.
기나긴 설명 끝에.
오태상의 고개가 진혁을 향했다.
“튀지 마라. 쥐 죽은 듯이 공기처럼 있는 게 너희 역할이다. 김현수 선생!”
“네!”
“인턴을 뭐라고 부르지?”
“잡부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게 부르지?”
“인턴 잡(Job)이 대부분 잡일이라서 그렇습니다.”
“튀려고 하는 놈이 있으면 어떻게 되지?”
김현수에게 묻고 있었지만, 진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오태상.
그와 눈이 마주친 진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