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55)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255화(255/388)
255화. 강릉 분원 (8)
뜬금없는 삼자의 개입.
정신이 번쩍 들고.
취기마저 사라진다.
이건 뭐랄까.
그래.
물벼락을 맞은 느낌이다.
김현수 앞에서 넋두리를 늘어놓다니.
노회한 의사이자, 회귀자인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타교생이라는 이유로.
혹은 말리그라는 이유로.
숱한 충돌이 있었고.
때로는 무식하게.
때로는 현명하게 이겨 냈다.
한데 지금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보다 한참 어린 김현수를 앞에 두고 넋두리나 늘어놓고 있다니.
회피하고 싶은 문제라지만,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게.
모든 선택과 행동은 오롯이 자신이 짊어지는 것.
인간적인 고민을 털어놓고 한가하게 술을 마실 상황이 아니었다.
나직이 입술을 깨문 진혁이 곧바로 물을 들이켰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물을 마시고 또 마신다.
술을 깨기 위한 행동.
알코올을 희석하는 행위다.
그 모습이 이상했던 걸까.
아니면 민망함의 발로일까.
버튼을 대신 눌러 주겠다며 말을 걸어왔던 30대 초반의 여자가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죄송해요.”
말속에 담긴 함의와 달리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목소리.
오히려 그 유명한 이진혁도 이런 면이 있구나 싶어 하는 눈치였기에, 진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직시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피곤기 가득한 표정.
머리끈으로 대충 묶은 머리 스타일과 추레한 옷은 일견 고시생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닙니다. 제 목소리가 너무 컸는데요.”
“아뇨, 제가 엿들은 건데요, 뭘.”
“그럼, 못 들은 걸로 해 주시죠. 일종의 해프닝 같은 겁니다.”
진혁이 긴장의 끈을 풀지 않고 딱딱한 태도를 유지했다.
예전과 달리 유명해진 상황.
유명하지 않고 돈만 많았으면 좋겠다는 모 연예인의 말처럼,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사생활이란 게 없어진 것이다.
“아, 저는 박연수라고 해요.”
하지만 뜬금없이 끼어든 박연수가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더니 제 정체를 밝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의사형제』를 쓰고 있어요. 강릉 아신에서 촬영 중인데, 드라마 작가예요, 작가.”
“아…….”
“왜요, 너무 어려서 좀 그렇죠? 호호.”
박연수가 싱긋거렸지만, 너무도 개연성 없는 상황에 진혁과 김현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 *
『의사형제』
형과 동생 모두 의사라는 거.
공전의 히트를 친 작품이라는 거밖에 기억나는 게 없었다.
주인공과 메인 조연이 둘 다 흉부외과 의사가 아니었다면, 기억도 못 할 드라마.
강릉 아신에서 촬영했다는 거 외에는 줄거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뭐, 김현수는 대충 아는 거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진혁이 침묵하자, 박연수가 의자를 끌고 와 냉큼 합석했다.
“제가 주제넘게 오지랖 좀 부리려고요. 잠깐이면 돼요.”
“…….”
“아, 진짜예요. 진짜. 도움이 될 거라니까요.”
“음…….”
진혁이 침음성을 토해 내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아 했다.
오히려 젓가락과 술잔까지 가져오며 싱긋 웃기까지 했다.
“너무 당황스럽죠? 저, 사실 여기 자주 와요.”
“…….”
“취재도 어렵고. 인터뷰도 잘 안 해 주고. 뭐, 원작이 있긴 한데, 영상화는 각색이 필수라서요. 현장감을 살리려면 의료진이 많이 찾는 이곳이 딱이죠.”
“취재차 오셨다는 건데, 그래도 이건 좀 당황스러운데요.”
“에이, 소문 못 들으셨구나. 저 여기서 합석도 자주 해요.”
그녀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진혁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처음 보는 사이.
이런 얘기를 나눌 만큼 깊은 사이가 아니었다.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박연수가 선수 쳤다.
“범죄로 소중한 가족을 잃고, 일상생활이 파괴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뭔지 아세요?”
“…….”
“그건 고통보다 지나치게 낮은 형량이에요.”
“……!”
“아, 그렇다고 무조건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건 아니에요. 미국만 봐도 그래요. 툭하면 사형이나 종신형을 때리지만, 범죄율이 줄지 않는걸요.”
엄벌주의가 만능은 아니라는 말.
반대로 온정적 처벌 또한 2차 가해나 다름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사실 모든 일이 그렇듯 적당한 게 중요했다.
물론 그 적당함을 찾는 게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진혁이 침묵을 지키자, 박연수가 말을 이어 갔다.
“그런 면에서 나서고 싶으신데……. 아니, 나서야 하는데, 부담되시는 거죠? 앗, 제가 엿 들은 건 술로 사죄드릴게요.”
무어라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연거푸 소주를 들이켜는 박연수.
벌주를 마신 그녀가 싱긋거렸다.
추레한 외견과 다른 상큼한 미소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고.
진혁은 그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찰나의 시간 끝에 도달한 결론은 간단했다.
꽉 막힌 대본, 그리고 고갈된 소재에 허덕이던 그녀가 새로운 소재를 찾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드라마 소재로 쓰겠다는 건가. 하…….’
뻔히 그 의도가 짐작됐지만, 진혁이 불쾌한 얼굴로 되물었다.
“뭔가 재밌어 보이시는데요.”
“아……. 그건 아닌데요. 큼, 큼. 에잇.”
다시 홀로 자작을 한 박연수가 냉큼 말을 이어 갔다.
“사실, 꽉 막혀 있었어요. 오죽하면 제가 여기서 염탐까지 하겠어요. 이러다 쪽대본으로 넘어갈 판이죠.”
“그래서요.”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예요. 교수님들이나 다른 선생님들이 술 먹으러 오는 데라 소스나 얻을까 해서 왔는데, 마침 딱 이렇게 만났고. 제가 버튼을 눌러 드린다는 거죠.”
“…….”
“직접 나서시는 것보다, 드라마에서 다루는 게 훨씬 좋으실 거예요.”
역시나 드라마 속 소재로 활용하겠다는 말.
진혁은 한참 침묵을 지켜야 했다.
* * *
박연수가 신이 나 조잘거렸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배경음처럼 흘러간다.
진혁은 물을 한 번 더 마신 다음 냉정하게 그 효과를 가늠했다.
히트를 친 드라마였지만, 원 역사와 달라진 촬영 시기가 먼저 마음에 걸렸다.
끝도 없는 파업으로 의사에 대한 반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시기.
필승 공식 중 하나라는 의학 드라마도 힘을 쓰지 못 할지도 몰랐다.
애써 방영했지만, 파급력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박연수의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저는 이진혁 선생님이 직접 나서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젓가락을 들더니, 훠훠 저어 보이는 박연수.
진혁이 애써 의아함을 감추며 말을 돌렸다.
“작위(직접적인 행동)에 의한 책임감 문제로 고민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아뇨. 지금 그 문제가 아니에요.”
“……?”
“혹시 알아요? 그 가해자 가족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지?”
“아…….”
진혁이 짧게 탄식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다.
황색 언론이나 다름없는 신문사들이 어떤 일을 벌일지 진즉 예측했고.
곤욕스러운 일이 연거푸 벌어질 거라고만 생각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집단 린치에 의한 사회적 죽음.
뭐, 아이까지 영향을 받는다면 혹시 자살할 수도 있었다.
그래.
최악을 가정하는 건 결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회피하고 싶은 마음의 발로일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진혁이 침묵하자, 박연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가해자 가족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언론은 전부 이진혁 선생님을 탓할 거예요.”
“그럼, 드라마는 다르다는 겁니까?”
“다르죠. 시청률도 잘 나오고, 뭐, 뉴스보다 파급력도 클 거고요.”
“…….”
“가해자 가족이나 피해자는 드라마 속 인물이 될 테니, 우려하던 일도 없겠죠.”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박연수.
진혁이 가능성을 다시 한번 타진했다.
함덕춘 기자는 이걸로 만족할까?
펠로우인 성태선도 수용할까?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일단 그들의 의견도 물어봐야 하는 거다.
그렇다면 먼저 확인할 게 있었다.
“시청률이 잘 나온다고 했는데, 지금 얼마나 나오는 겁니까?”
“막 30%가 넘었어요. 지금 4화까지 방영된 상태고요.”
“그래요?”
뭔가 마땅치 않은 대답.
박연수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지금 그거 의외라는 표정이신데요.”
“그게 아니라, 음. 지금 한창 파업 중이라서요.”
“아, 의사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긴 했죠.”
“…….”
“그래도 의학 드라마는 터미놀로지(Terminology, 전문 용어)를 배우기도 어렵고. 인터뷰도 힘들어서, 잘만 쓰면 대박이라고요. 게다가.”
“……?”
“이복형제 간의 갈등, 출생의 비밀, 자살과 복수, 병원 내 비리. 폐암에 걸리는 주인공. 교통사고로 인한 기억상실증까지. 클리셰 범벅인데 이 정도는 껌이죠.”
순식간에 줄거리를 읊는 박연수.
진혁이 침음성을 뱉으며 응대했다.
그래, 이 정도면 잘 나올 만도 했다.
의학 드라마의 탈을 쓴 막장 드라마가 아니던가.
K-드라마의 시작은 그 역사가 뿌리 깊었다.
* * *
며칠 후.
진혁은 ER에서 일하고 있었다.
분원장과 면담을 통해 쇼부를 봤기 때문.
사실 파견처를 정할 때 우여곡절이 많았다.
아직 레지던트 2년 차였기에, 일반외과를 찾은 환자를 직접 집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뛰어난 술기 능력과 응환에 대한 대응력은 GS보다 ER이 더 어울렸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뿐.
반대가 극심했다.
물론 그 이유는 단 하나.
성태선이 진혁을 불편해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차피 돌아갈 인력.
분원의 응급의학과장은 붙박이인 성태선의 처지를 더 중요시했고.
제 욕심을 숨긴 채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니까 끝없이 밀려드는 환자.
그로 인한 로딩의 해소가 중요치 않았다면 속절없이 김무성과 떨어져서 근무할 뻔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ER 근무는 본원과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서울로 가겠다는 환자에 대한 처치.
그러니까 활력 징후 유지를 위한 처치가 더 중요시됐다는 게 다를 뿐.
업무는 똑같았다.
여느 때와 같이 빠르게 액팅을 마친 다음.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성태선을 응시했다.
어떠한 재촉도 하지 않고.
뭐라고 하지도 않는 성태선.
그냥 저렇게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그 행동은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무언의 압박을 견디며 다시 일주일이 지났을 때.
성태선과 함덕춘 기자가 찾아오자, 진혁이 박연수 작가를 호출했다.
이젠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때.
환자의 상태 또한 명백히 호전됐기에,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 * *
뜬금없는 박연수의 등장.
진혁이 상황을 설명하자 유가족 중 한 명인 함덕춘 기자가 불같이 화를 냈다.
“기다려 달라고 해서 기다렸습니다. 근데 고작 이런 결정인 겁니까.”
박연수 작가가 나서려고 했지만, 진혁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고선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제가 듣기로, 보호자가 직접 장례식장도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서 참으라는 겁니까?”
“무릎 꿇고 정말 죄송하다고,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고 한참 울고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함덕춘이 눈을 부라리자, 진혁이 쓰게 웃었다.
“기자님이 원하시는 건 사회 변혁입니까. 아니면 복수입니까. 제가 보기엔 복수가 하고 싶으신 거 같습니다만.”
“저는 복수를 원합니다. 우리, 아니 내가 아팠던 거만큼 가해자의 가족도 다치고 아프길 바랍니다.”
똑같이 당하길 원한다는 말.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런 이유로 나서려던 건 아니었기 때문.
피해자가 입은 상처에 걸맞은 적절한 판결.
그래. 그 판결이면 된다고 여겼다.
진혁이 성태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 생각이 궁금합니다.”
진혁의 질문에 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성태선을 보며 진혁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방영을 하고 그 반향을 지켜봤으면 합니다. 연좌제가 왜 없어졌겠습니까. 죄는 미워하더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나중에 효과가 없으면, 아니 또 솜방망이 같은 처벌이 이뤄지면 어떻게 할 거지?”
“그땐 제가 나서겠습니다. 기자님이 원하시는 대로 공론화도 하고, 인터뷰도 하겠습니다.”
일단은 지켜보자는 말.
한참 말이 없던 성태선이 메마른 입을 천천히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