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75)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275화(275/388)
275화. 채식은 위험해 (10)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기술의 발전은 서양에서 동양으로 흐른다.
찬란했던 동양의 위대함.
하지만 힘을 잃은 지 수 세기가 지났다.
산업혁명 이후 힘의 균형이 넘어간 지 한참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학의 발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조국인 미국.
매년 수천, 수만 건의 포스터가 발간되고.
최신 학술 지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한국으로 전파된다.
의료계의 미국 추종!
예나 지금이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핫. 크하하핫.”
이변이 일어났다.
동양인 의사를 가리켜 손재주 하나는 뛰어나니 좋겠다며 비웃는 일이 쌔고 쌨거늘.
이진혁이 일을 낸 것이다.
그러니 외과 계열의 회생만 생각하던 오지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하핫. 하하. 크하하하하.”
경망스러운 웃음.
병원장의 품위 따윈 없었다.
그저 웃고 또 웃을 뿐인 것이다.
복지부와 협상하며 받은 스트레스.
묵은 때가 다 내려간 느낌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병원장.
사회지도층 중 하나.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큭큭. 킥킥킥.”
경망스러운 웃음.
억지로 참으니 기괴한 소리가 난다.
결국, 씰룩거리는 볼살을 쭈욱 잡아당긴 오지호가 그대로 인터넷 뉴스를 클릭했다.
[미국 심장협회는 5년마다 가이드라인을 개정합니다. 이번 일은 이례적인 것으로…….] [이번 가이드라인엔 최신 임상 데이터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아신 병원에서 발표한…….] [미국심장학회(ACC)와 미국심장협회(AHA)는 순환기 계열의 양대 학회로 심폐소생술교류위원회(ILCOR)와 협의하여 이번 개정 사항을 반영하기로 했으며…….] [정진석, 김상혁, 이진혁 선생은 ICEM(세계응급의학회 학술대회)에 초청 연사로 선정됐으며…….]쏟아지는 기사.
치사량만큼의 행복감이 밀려든다.
오르가슴.
아아, 이건 오르가슴이었다.
행복감에 허우적거리며 코를 벌렁거리고.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붙잡아도 콩닥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한참 기사를 클릭하며 행복감을 만끽하던 오지호가 벌떡 일어났다.
[ㅋㅋㅋㅋ] 폭탄을 보내 부재일의 속을 뒤집어 놨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좀 더 행복을 만끽하기 위한 행보.
그래, 그 행보를 시작할 때였다.
* * *
서관 최상층 병원장실.
화장을 고치던 비서가 벌떡 일어났지만, 오지호는 아빠 미소와 함께 손사래를 쳤다.
“아아. 일 봐요. 일 봐.”
“어디 가시는지 알려 주시면 일정에 반영하겠습니다.”
“허어! 됐어요, 됐어!”
“네?”
“나도 어딜 갈지 모른다고. 홍홍.”
나도 모른다는 말.
이게 무슨 줏대 없는 말이냐고 할 틈도 없이 오지호가 쌩하니 사라지자,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보다.
“앗! 병원장님! 30분 후에 미팅 있으신데요!”
촐랑거리며 사라지는 오지호를 막아야 했다.
하지만 냉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린다.
있을 수 없는 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릇 윗분들이라 함은 아침 7시부터 저녁까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여야 했거늘.
또 시작이었다.
* * *
서관 1층에 도착한 오지호.
외래 환자와 보호자로 가득 찬 로비.
서울역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인파가 정신없이 움직인다.
서관과 본관, 그리고 신관과 별관.
동관과 암 센터까지.
거대한 규모만큼 내원객은 많았고, 여기가 기차역인지 병원 로비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기쁨.
아신 병원을 믿고 찾아 주는 환자와 보호자가 이만큼 많다는 것 또한 밀도 있는 충족감을 가져다준다.
“흐으으읍.”
오지호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물론 돈 냄새를 맡은 건 아니었다.
이건 신뢰의 냄새였다.
전면 파업이라는 혹독한 세파에 굴하지 않고 망망대해를 밝혔던 등대.
그 등대의 선장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하핫.”
저도 모르게 나온 웃음.
냉큼 얼굴을 굳힌다.
페르소나.
그래.
이젠 사회적 가면을 쓸 차례였다.
하지만 외적 인격이 내면의 소리까지 전부 감출 순 없는 법.
위엄찬 얼굴과 표정.
반면 발걸음에선 일종의 경망스러움이 묻어난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자신은 병원장.
사회적 체면만 고려하면 될 뿐,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일단 ER로 가 볼까.’
곧장 응급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실 이번 쾌거는 이진혁 혼자 이뤄 낸 게 아니었다.
그가 초안을 잡았다지만, 검증 작업을 한 건 임상 연구센터와 응급실.
병원장답게 격려도 해 주고.
금일봉도 척 하니 건네줘야 했다.
다 같이 고생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발걸음을 재촉하던 사이.
“병원장님, 축하드립니다.”
앞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안 그래도 입이 근질근질거렸던 오지호가 반색했다.
“아아, 정 교수. 그래요. 하하. 내가 오늘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황산마그네슘은 완전히 제외됐다지요?”
“암요, 암요. 하하. 이게 참. 그동안 효과도 없는 약물을 쓰고 있었다는 게 밝혀졌으니, 아주 좋습니다. 하하.”
“이건 뭐, 쾌거입니다. 안 그래도 1분 1초가 아쉬운데. CPR을 할 때 고려 사항 하나가 사라진 게 아닙니까.”
처음엔 모든 유형에.
나중엔 다형성 심실빈맥 환자한테.
지금은 성인 환자는 아예 안 쓰는 거로 확정된 황산마그네슘.
CPR 알고리즘이 변경됐다.
그것도 한국인 의사들로 인해.
오지호가 함박웃음을 짓자, 정인배가 서둘러 말했다.
“임상 연구센터도 그렇고. ER도 그렇고. 참, 고생이 많았습니다. 특히…….”
“특히?”
“우리 이진혁 선생이 기획했다지요? 이게 참, 뭐랄까요. 하하. 흥복입니다, 흥복.”
“뭘, 이런 거로……. 하핫.”
겸양의 말과 다르게 오지호의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그만큼 즐거운 일.
선거에서 당선됐을 때보다 기뻤다.
그리고 그때, 한참 그의 기분을 맞추던 정인배가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저희도 연구를 하려고 합니다만.”
“아아, 그렇습니까?”
“예. 아스피린의 경우 저용량에 대한 기준이 미국과 유럽이 다르지 않습니까. 혈전 생성 억제 목적으로 최적 용량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허허, 추진합시다. 추진해 보세요!”
“앗, 감사합니다! 병원장님!!”
정인배가 기쁨에 넘실거리며 사라졌지만, 오지호는 그저 흐뭇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윗분들의 기분을 살피는 것.
비서한테 보고해도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 또한 직장인의 기본 소양.
정인배 또한 봉직의로서 직장인답게 행동했을 뿐이다.
* * *
또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일부러 발에 힘을 주고.
구두 굽 소리도 힘차게 내본다.
누구라도 말을 걸어 줬으면 하는 바람.
말을 건다면 당장이라도 한바탕 자랑을 쏟아 낼 기세였다.
하지만 다들.
“으윽, 안녕하십니까.”
“헙! 병원장님.”
“안녕하세요, 병원장님.”
인사만 하고 사라진다.
못 볼 사람을 봤다는 행태.
다들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외로워진다더니.
제 꼴이 딱 그 꼴이었다.
아니, 대체 왜 모른단 말인가.
‘식사하셨습니까’라는 말만 해 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게 윗사람.
사회생활이 영글지 못한 이들 천지였다.
“에잉. 쯧쯧.”
혀를 찼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또 아니었다.
좁디좁은 TO를 뚫고 들어온 이들.
보상 심리에 허우적거릴 수도 있었고, ‘내가 바로 의사야!’라는 자부심에 저런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뭐가 됐든 의사의 고개가 뻣뻣한 건 진짜 알아줘야 했다.
그렇게 다시 걸음을 재촉하던 찰나.
누군가가 앞을 막아섰다.
임상 연구센터 소속 박찬영 교수였다.
“아아, 박 교수.”
“감축드립니다! 병원장님!”
“허허,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에이, 참. 이진혁 선생을 서포트해 주신 분이 바로 병원장님 아니십니까.”
“허허.”
“임상 연구센터에 지시를 내린 것도 병원장님이시지요.”
훅 들어온 팩트 폭행.
오지호의 입꼬리가 춤을 춘다.
사실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어! 인마! 나도 숟가락 하나 정도는 올렸어!
하지만 사회적 위치와 그 자신이 쓴 가면이 경망스러운 행동을 막아 세울 뿐이다.
뒤늦게 표정을 관리하자, 박찬영이 말을 이어 갔다.
“아트로핀이 완전히 제외됐더군요. 서맥이나 방실결절 차단에 주로 썼는데, 완전히 새로운 발견입니다.”
“허허. PEA(무맥성 전기 활동)에 쓰는 것도 의미 없다고 밝혀냈으니, 뭐 당연하지요.”
“권장 사항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가이드라인에서 완전히 빠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미국, 아니 전 세계가 한국에서 밝혀낸 임상 가이드라인을 따른다는 게……. 참, 감격스럽습니다.”
“암요, 암요. 그렇지요.”
오지호가 다시 헤벌쭉 웃었다.
미국에서 최신 임상 지견이라 받아들인 이번 발표.
유럽도 당연히 뒤따를 터.
아니, 어디 유럽뿐이겠는가.
인도부터 중국.
다른 나라의 학회 또한 미국에서 발표한 CPR 가이드라인을 준용하여 개정할 게 분명했다.
관례적으로 사용하던 아트로핀이 아예 효과가 없다는 걸 밝혀냈으니.
쾌거 중의 쾌거인 것이다.
오지호가 다시 한참 자랑을 늘어놓고, 어깨에 힘을 주자, 박찬영 교수가 말했다.
“요새 오메가3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아, 그렇습니까.”
“용량, 정제된 성분의 비율, 대조약 선정까지. 어려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래서 말인데…….”
박찬영이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말꼬리를 흐린다.
돈 먹는 하마.
그게 바로 임상 연구센터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IMF로 가장 먼저 예산이 삭감된 게 R&D 비용이라는 것만 고려해도 알 수 있는 일.
못 들어줄 게 뭐가 있나 싶었던 오지호가 박찬영의 어깨를 쳤다.
“아아, 일단 바로 진행하세요! 하하.”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 병원장입니다!”
“감,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말을 수차례 하며 사라지는 박찬영.
오지호가 이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 * *
곧바로 도착한 ER.
박영진과 한참 대화를 나눴고.
금일봉도 하사했다.
그뿐이랴.
만나는 이들을 전부 치하했다.
이머전시 상황에서도 연구 일지를 기록하고.
그 효과까지 분석한 이들.
음과 양으로 도운 이들이 수없이 많았고.
알게 모르게 고생한 이들 천지였다.
그렇게 근무하는 의사들을 전부 치하하고 대화를 나눈 오지호가 물었다.
“우리 김상혁 선생은 어딨습니까?”
“지금 군의관으로 복무 중입니다.”
“허허, 그렇습니까. 이번 출장은 갈 수 있답니까?”
“일단 국방부에 협조 공문을 보내 보려고 합니다.”
“뭐, 필요하면 복지부를 통해서 압박도 넣읍시다.”
한참 계속된 대화.
박영진을 치하한 오지호는 ER을 빠져나와 이번엔 임상 연구센터로 향했다.
그사이 비서한테 문자도 왔고.
전화도 왔다.
하지만 대참자를 지정할 뿐.
움직이진 않는다.
오랜만의 나들이.
이 정도는 만끽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렇게 서관에서 다시 동관으로 가는 길.
다시 수없이 많은 인사가 쏟아진다.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움직이는 이들.
‘허허, 수고가 많아요.’라는 말을 남겼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말을 걸어 주면 좋을 텐데.
병원장이라고 어렵게만 여기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
결국, 동관까지 아무도 말을 걸어 주지 않자 이번엔 오지호가 움직였다.
그냥 아무나 붙잡은 것이다.
당하는 사람으로선 청천벽력 같은 일.
상대는 병원장.
절로 몸짓을 공손하게 만들고.
손을 가지런히 모아야 했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런 상대였다.
하지만.
“김우진 선생?”
졸지에 오지호한테 붙잡힌 레지던트 1년 차.
김우진은 얼음이 된 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예. 병원장님.”
“몇 년 차지?”
“1년 차입니다.”
“아아. 그래. 소식은 들었나?”
“네?”
“크음, 큼. 소식을…….”
“……?”
“소식 못 들었나? 크음, 큼.”
오지호가 한참 헛기침을 했다.
붙잡긴 제 손으로 붙잡았지만,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는 일.
연차가 아직 적다지만 빨리 말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
“…….”
“…….”
“…….”
침묵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1년 차이기에 뉴스 따위를 볼 시간이 없는 게 분명했다고.
이어지는 건 또다시 어색한 침묵.
김우진은 김우진대로 뭘 말해야 할지 몰랐고.
오지호 또한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싶어 침묵했다.
결국, 침묵을 깬 건 김우진이었다.
“죄송합니다, 병원장님!”
“음?”
“저, 잘못했습니다!!”
“아니, 내가 뭘…….”
황당하다는 듯 김우진을 바라본다.
갑자기 죄송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흐윽. 제가…….”
어린 양이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윗분이 불러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는 건 잘못한 게 있어서 생긴 일.
김우진의 오해가 부른 참사.
아니, 호들갑에 제 본분을 잊은 오지호가 벌인 참사였다.
그러니.
“끄으으으응.”
오지호가 뒷골을 잡고 쌩하니 도주했다.
이러다 1년 차를 울린 병원장.
아니, 갑질 병원장으로 소문이 날 판이었다.
* * *
금세 도착한 임상 연구센터.
다들 축하 인사를 건넸다.
“칼슘 또한 제외됐다지요. 한 번에 세 건이나 반영되다니, 이게 참, 대단한 일입니다.”
“하하. 그런 일을 여러분이 하신 겁니다.”
“조직 괴사, 재관류, 허혈성 손상. CPR 알고리즘에서의 칼슘 투약은 독이나 다름없다는 게 밝혀진 것 아닙니까.”
“암요, 그렇고말고요. 합병증만 유발시키고 아무 쓰잘데기 없다는 게 밝혀진 게지요.”
“이게 다…….”
한참 계속된 칭찬.
이어진 건 투자 요구였다.
물론 기분이 좋았던 오지호는 도장을 쾅쾅 찍어 댔고 한바탕 웃어 댔다.
그렇게 한참 후 돌아온 병원장실.
장장 4시간이나 돌아다니며 오후 일정을 펑크 낸 오지호가 입맛을 다셨다.
[ㅋㅋㅋㅋ] 문자를 한 번 더 보내 볼까라는 아쉬움.간신히 제 마음을 억누른다.
차기 선거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블러핑 때문에 가만히 있는 부재일.
그를 더 건드려 봐야 좋을 건 없었다.
하지만 그때.
비서가 묘한 눈짓을 했다.
“으음?”
“저, 그게…….”
“……?”
“저…….”
병원장실을 가리키며 눈짓하는 비서.
그 함의를 깨달은 오지호가 즉각 움직였다.
코트도 챙기지 않은 채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우용만이었다.
부산스러워진 밖의 움직임을 눈치챈 그가 병원장실에 홀로 앉아 있다가 튀어나왔다.
“병원장님!! 대체 오늘만 몇 억을 쓰신 겁니까!!”
“아니, 그게…….”
“잠깐 면담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아아, 누가 그랬던가?
해피 엔딩의 반대말은 새드 엔딩이라고.
옛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