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76)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276화(276/388)
276화. 세계응급의학회 (1)
누군가 말했다.
언로가 열린 광장의 시대에 세상이 시끄러운 건 당연한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세상은 시끌벅적했다.
누군간 면허 박탈은 절대 안 된다며 울부짖었고.
또 다른 누군간 이진혁이 이룬 쾌거에 대해 논했다.
그 와중에 갈등이 인 건 당연지사.
온라인도 오프라인도 아우성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무거운 침묵이 자리한 곳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서관 최상층.
병원장실이라 할 수 있었다.
거센 바람과 폭풍우.
그리고 눈보라가 한바탕 몰아친 곳.
오지호가 하품을 하며, 벽시계를 힐끔거렸다.
저녁 9시.
면담을 빙자한 잔소리 공격이 시작된 지 벌써 세 시간.
슬슬 배도 고파 왔다.
하지만 또다시 우용만이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자, 오지호가 맹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저리 기운이 넘칠까.
재정 문제라면 눈이 회까닥 뒤집혀 정력을 자랑하는 우용만다운 모습이었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한창때야, 한창때. 쯧쯧.’
저도 모르게 혀를 차던 오지호가 흠칫거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도끼눈을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우용만.
제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번엔 강하게 나갔다.
“크음, 큼. 거, 참…….”
불퉁한 표정을 과하게 지으며 헛기침을 한다.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함의가 그득한 표정.
문제는 고작 표정 따위에 굴할 우용만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결재 문서를 들고 온 사람이 10명이 넘었습니다. 가부가 안 정해졌는데, 일단 사인부터 하라고 하더군요.”
뻣뻣하게 세웠던 고개는 금세 숙어진다.
운영회의에 안건을 올리고, 타당성을 검토해야 했거늘.
병원장 전결로 뚝딱.
병원장 재량으로 처리 후 사후 승인을 득하려는 이들이 벌써 득실거리고 있었다.
구두 승인을 한 건 그 자신.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뭐, 일단 쓰고 나면 예산이 아깝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진행하려 들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다고 취소할 수도 없는 일.
오지호가 짙은 침음성을 토해 냈다.
“끄으으으응.”
이젠 그만하자는 신호.
통할 리 없는 개수작이었다.
“지난 3년간 누적 적자가 얼만지 아십니까. 158억입니다. 158억.”
“…….”
“게다가 이번 ICEM(세계응급의학회) 개최지는 뉴욕이라지요?”
“아아. 그렇지요. 우리 랭곤 선생. 아니, 최두일 선생이 온 곳이 아닙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초청 연사는 세 명인데, 왜 열 명이나 보내시는 겁니까! 항공료랑 숙박비, 그리고 경비까지. 만만치 않게 돈이 들어갈 겁니다!”
“같이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CPR 중에 알고리즘을 검증하는 거.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용만의 반박이 시작되자, 오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대꾸를 해 봐야 면담만 길어지는 상황.
차라리 딴생각을 하는 게 나았다.
‘그나저나 International Scholar Awards는 받을 수 있는 건가.’
박영진과 함께 ICEM(세계응급의학회)에 초청 연사로 나선 이진혁.
김칫국을 마시는 걸 수도 있었지만, 수상 가능성이 있었다.
심장학회뿐만 아니라 응급의학학회까지 영향을 줄 정도로 거대한 물줄기를 틀었기에 가능한 일.
아니, 어쩌면.
‘심장학회도 상을 줄지 모르겠는데…….’
상복이 터질지도 몰랐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리자,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병원장님!!!”
“아아, 듣고 있습니다. 듣고 있어.”
소리를 질러 칠공에서 피를 토하게 만든다는 무협지의 기술을 남용하는 우용만.
소싯적에 김용이 남긴 역작을 꽤나 읽어 봤던 오지호가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은거 고수에게 자비를 구하는 필부의 표정.
그 나름의 필살기다.
하지만.
“안 통합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거 같지 않은 우용만은 안경을 치켜 쓸 뿐이다.
그렇게 끝도 모르고 계속될 거 같았던 면담은 전화가 와서야 멈췄다.
광명의 순간은 항상 불시에 찾아오는 법이었다.
* * *
동방예의지국.
동쪽에 있는 예의를 잘 지키는 나라라는 말.
별로 좋은 말은 아니었다.
건국 후 다른 나라를 한 번도 침공해 본 적이 없다는 자랑스러운 역사는 곧.
침공만 당했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기껍게 느껴진다.
윗사람 앞에서 통화하는 건 결례.
우용만이 자리를 옮기자, 오지호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 나 좀 살려 줘!!] [뭔 일 있어요?] [용만이가 흐윽.] [5분 후에 전화 줄게요. 애가 아프다고 할게요!] [사랑행♡♡♡♡♡]순식간에 세워진 탈출 계획.
와이프한테 문자를 보낸 오지호가 음흉하게 웃었다.
아들이 아프다는데.
제가 뭘 어쩌겠는가.
일단 자리를 피하고 봐야 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은 우용만이 갑자기 달려와 손을 붙잡는다.
“됐습니다! 됐어요!”
“음?”
“대박입니다! 대박!!”
“……?”
“크윽!!”
좋아 죽겠다는 얼굴.
오지호가 맹한 얼굴로 우용만을 내려봤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덜컥 겁이 났다.
* * *
『엄마! 흉부외과에 가고 싶어요!』의 출판을 맡은 안병수.
건물주이자, 장혁준 부친의 친구이자, 취미로 출판 사업을 하는 그의 제안은 간단했다.
아신 병원에서 기획하는 다른 엄마 시리즈의 출판을 미국에서도 함께 하자는 거.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그리고 다시 일본까지 전 세계에 출판하자는 거였다.
오지호가 당장 떨떠름해 했다.
“그게 되겠습니까?”
“되게 만들어야지요.”
“음?”
“지금 해리슨(해리슨 내과학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 얼마에 팔리는지 아십니까? 23만 원입니다.”
“그건 해리슨이니까 그런 게지요.”
“우리 엄마 시리즈도 그렇게 만들면 그만입니다.”
“…….”
오지호가 반박하려다 말고 말을 삼켰다.
교과서 중의 교과서.
표준 전과.
혹은 내과의 전부라고 불리는 해리슨 내과학.
말도 안 되는 가격인 23만 원에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 시리즈도 해리슨처럼 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수학의 정석 같은 입지를 구축한 게 해리슨 아니던가.
게다가.
‘전 세계에서 팔리는 책인데…….’
의사라면 꼭 봐야 하는 책 중 하나.
그게 해리슨이 가진 위상이었다.
하지만.
“해리슨은 너무 방대합니다. 두껍기도 하고. 그래서 장식품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크음, 큼. 그야…….”
“데커레이션 케이크라고도 부르죠. 저기 좀 보십쇼. 병원장님도 꽂아 두기만 하셨지요.”
“필드에서 찾아보기엔 좀…….”
“바로 그겁니다!”
너무 두껍기도 하고 실용성도 떨어진다는 지적.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우용만이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
이어진 건 엄마 시리즈의 칭찬.
인터넷으로 Q&A도 볼 수 있었고.
술기 동영상을 찾아볼 수도 있었다.
그뿐이랴.
업데이트까지 하고 있었다.
수정 사항을 계속 공지하고 직접 고칠 수 있게 홈페이지를 통해 파일까지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래서 손해 아니냐고?
아니었다.
생각보다 재구매율도 높았고.
인턴뿐만 아니라 레지던트 1년 차도 많이 구매하고 있었다.
두껍고, 지루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고, 어렵기만 하고, 사진도 없고, 빽빽한 글로 가득 찬 기존 서적과 다르다는 게 셀링 포인트였다.
이미 미국에서도 잘 팔리고 있다는 말.
그건.
“일단 수상을 해야겠지요. 하핫. 다른 상도 받아야 할 텐데…….”
마케팅으로 귀결됐다.
모든 엄마 시리즈에 이진혁의 이름을 집어넣는 것.
그리고 이진혁이 더 유명해지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해리슨처럼 엄마 시리즈가 전 세계에 팔리게 된다면 적자 따위를 메꾸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나비의 날갯짓은 태풍이 된다더니.
나비가 날갯짓해야 하는 시기가 오고 있었다.
* * *
며칠 후.
또 다른 낭보가 전해졌다.
섬망 환자를 대상으로 투약했던 할로페리돌.
필드에선 할돌이라 줄여 부르는 약이 섬망에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이 또한 3년 전에 뿌린 씨앗.
당장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할로페리돌 25mg을 8시간마다 정맥주사 했던 환자와 위약을 투약했던 환자 간에 유의미한 차이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부작용으로 과잉 진정, QTC 간격이 연장되는 게 밝혀졌습니다. 할로페리돌 사용에 따른 사망률 감소, 인공호흡기 이용 기간 감소 등 유의미한 지표는 없었으며…….] [이번 실험을 주도한 박영진 과장에 따르면, 비약물적인 예방 대책만이 섬망 환자 치료에 있어 유일한 해결책…….]또다시 이진혁이 개입했던 일.
이를 확인한 우용만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른바 서동요 전법.
서동이 서동요를 지어 선화 공주와 결혼한 것처럼 먼저 홍보자료를 마구잡이로 배포했다.
[천재 의사 이진혁의 쾌거!] [미국에서도 수상 가능성 높아!] [International Scholar Awards 수상 예감!]뭐, 이런 류의 홍보 기사를 쏟아 낸 것이다.
외과 계열 입장에선 배신자 소리를 들어도 시원치 않을 판국.
면허 박탈은 안 된다는 외침이 묻힐 정도로 홍보자료를 쏟아 냈고.
이를 받아쓰는 언론은 열광했다.
파업 얘기만 하는 의료계의 외침보다 소구력이 있는 이진혁.
날개 돋친 듯 신문이 팔려 나갔다.
우용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국의 유명한 타블로이드지에도 기사를 실었다.
아직 동양의 신비가 살아 있던 서양.
한번 보면 다 따라 할 수 있는 젊은 의사는 신비한 존재였다.
기존 투약 알고리즘을 벌써 네 건이나 논파했으니.
살아있는 증거 또한 있었다.
그렇게 아직 ICEM(세계응급의학회)이 개최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International Scholar Awards 수상 가능성이 언급되고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마저 증폭되기 시작했다.
유명해지니까 유명해진다.
이른바 서동요 전법이 본격적으로 발동된 것이다.
아, 효과가 있었냐고?
괜히 전두환이 3S(Sex, Screen, Sports) 정책을 밀어붙인 게 아니었다.
대중이 가진 특성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았다.
* * *
우용만이 엄마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는 건, 진혁도 진즉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일이 커지자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쉽게 풀어 설명하는 미래의 의학 서적과 다르게 불친절한 서책이 그득한 시대.
잘만 하면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팔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필요한 건 그만한 명성.
하지만 문제는.
‘수상이 쉬운 게 아닌데…….’
그 자신이 동양인이라는 거였다.
게다가.
‘First Author(1저자)로 이름을 올린 것도 아닌데…….’
여러 가지로 걱정되는 점이 많았다.
그 자신이 기획하고 발제한 건 맞지만, 쉽사리 상을 줄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
오히려 박영진이 받거나 곧 있으면 펠로우로 병원에 복귀할 김상혁이 수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왜 머리를 밀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거.
의사 면허 박탈을 입법하는데 머리를 민 건 반대하는 게 아니냐는 말에 입을 꾹 닫을 수 있다는 거였다.
그렇게 며칠 후.
진혁은 곧장 출국길에 올랐다.
미국으로 향한 것이다.
인터넷도 안 되는 비행기에서 메일을 쓰고 있자, 김상혁이 물었다.
“뭐야? 메일은 갑자기 왜? 그것도 일기 같은데?”
“아, 이게 일기가 아니라요.”
“그럼, 뭔데?”
“병원장님이 일일 출장 업무 일지를 보내 달라고 하셔서요.”
“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다고 하셔서요.”
“아…….”
따라오고 싶지만, 따라올 수 없기에 벌인 일.
진혁이 쓰게 웃으며 글을 써 내려가자, 김상혁이 혀를 내둘렀다.
* * *
오지호가 당장 진혁이 보낸 메일을 열었다.
비행기에선 인터넷이 될 리 없으니.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보냈을 터.
그 자신의 요청대로 생생한 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병원장님, 사고는 치지 말고 돌아오라고 하셔서 항상 몸가짐을 조심히 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첫날에는 뉴욕 시내도 구경하고, 선배님들을 모시고 맛집도 다녀왔습니다. 울프강 스테이크는 명성만큼 맛있었습니다.] [ICEM(세계응급의학회)은 응급의학 분야 최고 권위 학회인데, 2,500여 명이 넘는 의사가 참가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20대 중반의 젊은이가 느낄만한 감상.
진혁이 억지로 쥐어짜 내며 쓴 보고서였지만, 오지호는 기분이 좋아 헤벌레했다.
크고 넓은 세상을 보고 돌아오는 거.
그거 하나만으로도 견문을 넓힐 수 있다고 여겼다.
“하하. 그래. 암, 그렇고말고.”
오지호가 손뼉을 치며 좋아할 때, 곧바로 또 다른 메일이 들어왔다.
[엄마 시리즈의 출판 전에 사전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이게 이런 방식인 줄은 몰랐습니다.]“음?”
[타블로이드지로 유명한 뉴욕포스트지에 제 이름과 사진이……. 하……. 한번 보면 다 따라 할 수 있는 의사가 입국했다고 난리입니다.] [큰일입니다. 병원장님. 사고 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시비를 거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저보고 옐로우몽키라는데요?] [하……. 잠깐 엿 좀 먹여 줘야 할 거 같습니다.]갑자기 끊긴 메일.
한 시간마다 메일을 보내라고 재촉했던 오지호가 눈을 뻐끔거렸다.
옐로우몽키.
동양인을 비하하는 발언.
그 말을 들은 이진혁이 어떻게 나갔을 진 안 봐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