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84)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284화(284/388)
284화. 세계응급의학회 (9)
붕대는 세게 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혈액 순환 장애.
림프액 순환 장애.
신경 압박에 의한 마비까지 초래한다.
그런 이유로 붕대법을 할 때는 이렇게까지 느슨하게 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살살 감아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미션이라는 거.
젤리처럼 물렁거리는 마네킹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에, 속도를 늦출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 조심스레 하거나 감점을 감수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빠르게 손을 놀리고 또 놀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오른팔과 왼팔.
그리고 오른발과 왼발을 순식간에 끝낸다.
쉽지 않은 일.
그간의 경험과 노련함.
절차 기억으로 찍어 눌렀다.
남은 건 두상.
붕대법의 종류가 많았지만, 회귀붕대법으로 진행했다.
먼저 머리를 두 번 말아 준 다음, 이마에서 꺾어 정수리로.
다시 뒷머리에서 이마를 사선으로 왔다 갔다 했다.
문제는.
“허허. 저렇게 속도가 빠른데 힘 조절이 완벽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또한 완벽하다는 거.
과하게 힘을 줄 경우 마네킹이 찌그러질 수도 있었는데.
그럴 기미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 * *
마지막 미션은 딸기에서 씨앗을 빼내는 문제.
촘촘히 박힌 씨앗을 빼내고.
그 와중에 딸기도 으스러트리면 안 되는 어려운 미션이었다.
‘집중력을 테스트하는 건가? 뭐, 응급실만큼 집중하기 힘든 곳도 없지.’
혀를 내두르는 것도 잠시.
뒤늦게 기억을 떠올린 진혁이 밝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장혁준이 2년 전에 냈던 문제와 동일했다.
뭐, 순대와 내장.
바나나로도 연습했던 기억이 있었으니.
뭘 못 하겠는가.
같이 연습했던 추억.
그 기억만 떠올리면 됐다.
그러니 바로 손을 놀려야 했지만, 진혁은 핀셋을 잡지 않은 채 닥터 리안을 기다렸다.
그 모습에 좌중이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허허. 지금 닥터 리안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까?”
“아까 시작할 때도 일부러 늦게 시작한 거 같은데요.”
“끄응. 상대방한텐 모욕이 될 수도 있는데. 실력이야 충분한데 인성이 조금. 허허.”
“뭐, 확실하게 하고 싶은 모양이지요.”
각양각색의 반응이 터져 나온다.
누군간 놀랍다는 듯 혀를 내둘렀고.
누군간 눈살을 찌푸렸다.
공개적인 자리.
과한 투쟁감의 발로라고 여기는 이도 많은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닥터 리안이 핀셋을 들어 올리자, 진혁 또한 움직였다.
동시에 시작한 다섯 번째 미션.
섬세하면서도 빠르게.
씨앗을 빼고 또 뺀다.
어떠한 떨림도 없이.
정확하게 핀셋을 놀리는 일을 반복한다.
집중에 집중을 더하는 거?
그런 거 따윈 필요 없었다.
그냥 아무도 없는 것처럼.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손을 놀리고 또 놀릴 뿐이다.
그렇게 한참 손을 놀리다 보니.
절로 웃음이 나고.
흥겨움이 솟구쳤다.
도망가는 동료.
밀려드는 환자.
망해 가는 흉부외과.
끝이 안 보이는 통로라 여겼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군분투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런 학회에 와서 다른 이들과 컴페티션도 해 보고.
자신을 아끼는 수많은 동료와 부대끼고 있었다.
그뿐이랴.
아버지마저 일을 하시며 밝은 모습을 보여 주고 계시고, 어머니는 건강검진을 받고 있었다.
좋았다.
기뻤다.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그러니 절로 흥이 나고.
점점 속도가 빨라진다.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묘한 울림이 실리고.
포화가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홀로 웃는 것처럼 고요한 미소를 띤 채 손을 놀린다.
좋았다라는 말처럼 단순 명료하고 간단한 문장이 없었지만, 더 이상 표현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말 행복했다.
갑자기 왜 이런 감정을 느끼냐고?
회귀해 보면 안다.
이런 작은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그렇게 얼마나 손을 놀렸을까.
더 이상 빼낼 씨앗이 없다는 걸 깨달은 진혁이 조용히 핀셋을 내려놨다.
순식간에 10개의 딸기를 전부 클리어한 것이다.
닥터 리안은 고작 5개만 끝낸 상황.
상대를 완전히 압살해 버렸다.
* * *
매의 눈이 저런 걸까.
심사 위원이 엄격한 얼굴로 결과물을 확인했다.
“닥터 스미스. 첫 번째 미션은 인덱스에 봉합 결찰을 하는 미션이었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뭐, 너무 힘을 주면 조직 손상을 유발하니까 적당히 힘을 줘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걸 아는데, 이렇게 힘을 주면 어떻게 합니까?”
닥터 스미스가 할 말이 없다는 듯 계면쩍어했다.
나무 상자엔 20개의 인덱스만 남은 상황.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심사 위원이 또 다른 평가를 시작했다.
“눈을 가리고 원핸드 타이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뭐, 응급 상황이 꼭 응급실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어두운 곳에서, 혹은 조명이 없는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죠.”
“그것도 그렇지만 눈을 감으며 생기는 불안감.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딱딱한 심사평.
그 어느 과보다 집중력을 요하는 곳이 응급실.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미션에 담긴 함의를 설명하고.
주의를 주며.
점수를 매기는 일이 반복된다.
마지막 심사평의 대상은 진혁이었다.
“Dr. Lee. 딸기에서 시드를 분리해 냈는데. 이걸 왜 시켰다고 생각합니까?”
“손과 눈의 협응력을 테스트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뿐이 아닐 텐데요.”
“빠르게 처치하면서도 섬세한 손놀림을 유지해야 하니, 일종의 집중력 테스트겠죠.”
“맞습니다. 처치도 완벽하고. 실수도 없었고. 속도 또한 경탄할 정도로 빨랐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응급실에서 일하면 팀워크 또한 중요한데, 이번 일은 개인적으로 유감입니다.”
감점은 없었지만, 실망했다는 말.
그 함의는 분명했다.
“닥터 리안을 기다린 일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맞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해가 안 됩니다. 한국팀이 보여 준 퍼포먼스. 실력도 실력이지만, 팀워크 자체가 워낙 뛰어났습니다. 근데 대체 왜 그런 겁니까?”
다른 심사 위원마저 따져 묻자,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행동을 닥터 리안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고 있는 이들.
오해는 빠르게 풀수록 좋았다.
진혁이 조명 때문에 보이지 않는 관객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는 항상 의심과 불신에 시달려 왔습니다. 뭐,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능력.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납득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럼 그냥 했으면 됐습니다. 굳이 다른 이들에게 모욕감을 줄 필요는 없었죠. 그만큼 실력이 출중한 거. 우리가 다 봤습니다.”
“아뇨. 그래도 납득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죠?”
“한국에서도 그랬으니까요.”
단호한 대답.
심사 위원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자 진혁이 지난 몇 년간 있었던 일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무리 증명해도 믿어 주지 않는 이들.
의사란 족속의 특성일 수도 있었지만,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걸 쉽사리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말을 했다.
불신과 편견에 시달렸던 지난 일들을 덤덤히 풀어낸 것이다.
* * *
“이번 컴페티션은 만장일치로 Dr. Lee의 승리입니다!”
“이진혁 선생의 이름으로 기부금이 전달될 예정입니다!”
“아, 참고로 감점은 한 개도 없었으며. 모든 미션에서 완벽했다는 걸 밝힙니다.”
최종 결과는 당연히 우승.
개인전에서도 영예를 거머쥘 수 있었다.
얼굴이 빨개진 닥터 리안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게 보였지만, 그를 뒤따라가 놀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녹음기를 박영진에게 건넨 상황.
닥터 리안은 끝이었다.
곧바로 이어진 건 축하 인사.
그리고 감탄사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놀랐다.
대단하다.
호들갑이 대단했다.
실력이 깡패라고.
완전히 찍어 눌렀으니.
당연한 반응.
물론 선배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야야. 살살 좀 하지 그랬냐. 닥터 리안. 저 자식 화장실에서 울고 있겠다.”
“맞아. 너 그러다 감점받을 수도 있었어. 일부러 가만히 있을 때 반응이 장난 아니었다고.”
“뭐, 천재가 겪는 고통은 범인들은 모르는 거다. 이런 말을 누가 안 했으면 빵점이라고.”
우려 섞인 염려를 쏟아내는 이들.
그 자신에 대한 배려와 사랑.
얼마나 자신을 아끼는지 알 수 있었기에, 진혁이 밝게 웃으며 말을 삼켰다.
우리도 정원 늘리면 안 되냐고.
그래야 좀 더 편해지고.
외과 계열도 살아날 수 있지 않냐고.
뭐, 이런 말을 삼킨 것이다.
그냥 지금처럼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
언젠간 반드시.
아니, 꼭 이뤄 낼 목표 중 하나였다.
그래야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 * *
기조 강연과 특별 강연.
관심분과 및 우수논문 세션.
초청 연사 세션까지.
프로그램은 줄줄이 이어졌다.
물론 토픽 자체는 응급의학에 한정돼 있었다.
소생, 중독, 중환자, 영상, 응급 구조학.
환경, 신경, 소아, 외상 예방학까지.
응급 의료 연구부터.
방대한 주제를 담고 있었고.
트리플 보드를 할 생각이었던 진혁은 세션을 듣고 또 들었다.
하나같이 유명한 인사들의 강연.
때로는 메모도 했고.
때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도 했다.
물론 간간이 메일 보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이틀이 지나고.
박영진이 얼마 전에 개편한 응급실.
그러니까 혼잡도를 보여 주고.
대기 순서와 진료 상황까지 알려 주는 대시보드에 대한 발표를 마치자, 진혁이 그에게 다가갔다.
“고생하셨습니다. 과장님.”
“고생은 무슨. 그나저나 얘기는 들었나?”
“네?”
“닥터 리안 말이야. 중징계를 받았더군.”
“아…….”
“호스트한테 정식으로 사과까지 받았어. 다만, 조용히 덮자고 하더군.”
“뭐, 저야 상관없습니다.”
진혁이 덤덤한 어조로 대답하자, 박영진의 낯빛에 이채가 서렸다.
이럴 땐 천상 주니어다운 모습을 보이는 이진혁.
어떨 땐 제 주장대로 막 나갈 때도 있었으니.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 * *
박영진은 진혁을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미국 사회의 특성을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누군간 한국을 가리켜 학연과 지연이 판친다고 하지만, 미국은 더 심한 나라였다.
레퍼런스의 나라.
인맥과 혈연.
그리고 학맥으로 뭉쳐 있는 게 미국이었다.
레퍼런스가 없으면 채용도 힘들지만, 누군가의 추천이 있으면 쉽게 채용되는 커뮤니티의 사회.
그런 미국에서 닥터 리안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게 덮어질까.
아니,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소문이 날 것이고.
그는 완전히 끝장날 게 분명했다.
그런 의사를 반기는 환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또다시 시간이 뚝딱 흐르고.
CPR 알고리즘 변경에 대한 발표까지 마쳤다.
그렇게 마지막 날이 됐을 때.
오지호가 그토록 염원하던 시상식이 진행됐다.
“올해의 International scholar award는 공동 수상입니다! 박영진, 김상혁, 이진혁 선생님! 앞으로 나와 주시죠!!”
단독 수상은 아니었지만, 공동 수상.
세 가지 약물의 무용성을 밝히고 CPR 알고리즘을 바꾼 일이 이렇게 돌아왔다.
아름다운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