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9)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29화(29/388)
29화. 새로운 시작 (9)
인턴끼리의 거래는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
오프 날을 서로 바꾸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과를 돌아야 할 경우 자신의 과를 내주고 다른 과를 받아 오기도 한다.
거래가 성립됐으니 그 대가를 이행할 차례.
실습실로 자리를 옮기기 무섭게.
진혁이 설명을 이어 갔다.
“동맥압 때문에 플런저가 그대로 밀려 나온다고 배웠죠?”
“그렇죠.”
“밀려 나오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래요?”
“네, 니들이 가늘면 압력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지레 포기하지 말고, 플런저를 당겨 봐요.”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에 적는 삼인방.
진혁은 인턴이 할 수 있는 실수들.
그러니까 이론서와 실무가 다른 부분을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실패할까 봐 잔뜩 겁먹고 망설이고 있죠?”
“그렇죠.”
“오히려 빠르게 찔러야 덜 아프고 성공 확률도 높아요.”
“어느 정도로요?”
“지금 하는 것보다 한 두 배 정도?”
“그러다가 혈관을 뚫고 나가면요.”
“에이, 그 정도로 하면 안 되죠. 많이 하다 보면 감이 올 거예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열심히 필기하는 이들.
거래를 했지만, 그 모습이 기특하고 예뻐 보였다.
열심히 공부하는 후학들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건 그렇고 이태희 너는 왜 따라온 건데. 뭐, 그래도 열심히 하니까 좋은 건가.’
사실, 다들 ABGA를 익히는 데 진심이었다.
인턴이 가장 많이 하는 술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환자들의 역정을 감내하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실패한 거 같아도 완전히 니들을 빼지 말고 살짝만 뺀 다음에 다시 원을 그린다고 생각하고 돌려 봐요.”
“그거야 우리도 배웠는데 잘 안되던데요.”
“확신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확신이 없다?”
“네, 롤링(동맥이 도망가는 현상)이 일어난 곳 옆에 반드시 혈관이 있다고 생각하고 돌려 봐요.”
괜히 새로운 곳에 찔러 넣지 말라는 말.
한참 설명을 이어 가던 진혁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젠 연습할 차례였다.
“실습합시다.”
“실습도 한다고요?”
“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뭐 해요. 다들 손목 걷어요.”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얼마나 아픈지 직접 당해 봐야 더 잘할 수 있는 거예요. 하기 싫으면 말든가요.”
진혁이 준비해 둔 ABGA 키트를 꺼내 들자.
삼인방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순서를 정해 상대의 손목에 직접 ABGA를 하는 것이다.
곧, 고통에 겨운 고성과 샤우팅이 계속됐다.
“으아아악!”
“아악. 너 일부러 그랬지.”
“야! 장혁준! 너 진짜. 콱!”
그렇게 상대방의 손목에 네다섯 번의 바늘 자국을 남겼을 때.
장혁준이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AS 되는 거죠?”
“?”
“마스터 못 하면 될 때까지 알려 주는 거냐고요. 생각보다 어렵잖아요.”
“손님, AS는 안 됩니다.”
장난 같지만 단호한 거절.
당장 반발이 쏟아졌다.
“와. 진짜 냉혈한이다, 냉혈한.”
“이진혁, 너 진짜 그러기만 해!”
“우리도 콜해 주기로 했잖아요!!”
온갖 원성이 터져 나오자.
진혁이 뚱한 표정으로 이태희에게 물었다.
“그럼 반말 콜?”
“아…….”
“패스!”
진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장혁준을 바라봤다.
“콜을 대신해 줬는데 레지던트가 안 내려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아, 그건.”
“카운트 안 할 거예요?”
“카운트는 해야죠.”
“그럼 패스!”
“와!”
어깨를 으쓱거린 진혁이 짐을 챙겨 들었다.
하지만, 키트를 한 움큼 챙겨 든 이태희가 먼저 선수 쳤다.
“나 먼저 집에 갈게.”
“남아서 공부한다면서요.”
“부모님한테 해 보려고.”
“와. 이런 게 불효예요, 불효. 아침밥이 아니라.”
“아, 몰라.”
이태희가 쌩하니 먼저 가 버렸다.
아침밥을 차려 달라는 게 불효라더니.
내로남불이 따로 없었다.
* * *
근 30시간이나 비웠던 집.
아무도 보이지 않자.
진혁은 반사적으로 신발장을 살폈다.
등산화답지 않게 뒷굽이 해질 대로 해진 아버지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또 등산하러 가신 건가.’
잠시 주춤하다 싶었는데, 다시 산에 다니실 모양.
거기에 더해 어머니마저 보이지 않자 진혁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텅 비어 있는 집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장성한 자식이 품을 떠나는 게 이런 느낌인 건가.’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부모님도 같은 마음일까.
‘아니겠지.’
사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외아들을 뒷바라지하며 험한 세상살이를 하셨던 분들이었다.
부모님도 부모님만의 삶이 있었고.
나름의 생활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그래. 이것도 욕심인 거지. 나도 참.’
사람 욕심이 끝도 없다는 게 맞았다.
처음엔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다시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 * *
진혁이 공책을 편 뒤 해야 할 일을 적기 시작했다.
1. 레지던트 콜하기 : 차트로 조진다.
2. 레지던트 콜하기 : 장혁준/김현수 80번.
3. 컨퍼런스 : 논문으로 조진다.
차트로 조지는 건 출근해서 해야 할 일.
먼저 발표 자료부터 만들어야 했다.
사실 처음에는 논문을 쓸 생각이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증례를 수집하는 것도 힘들었고 케이스 연구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인턴이 쓴 논문을 학회에서 인정할 리 없었다.
그래서 택한 차선책.
그건 미국 의학계에서 발표한 논문을 뒤적거려 나름대로 주석을 붙이고, 컨퍼런스 때마다 발표하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반향이 없겠지만, 하다 보면 이를 수용하는 움직임이 있을 터.
예나 지금이나 한국 의료계는, 주류라 할 수 있는 미국을 좇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으아. 미치겠다, 미치겠어.’
진혁이 갑갑함을 토로했다.
느려 터진 인터넷 속도.
그 속도조차 감당치 못하는 구형 컴퓨터.
속이 문드러질 정도로 느리고 답답했다.
그러다 다시.
딸깍.
딸깍.
‘이대로는 안 되겠다.’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당장 전화부터 해야 했다.
곧,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펼쳐 놓고, 이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펄럭.
펄럭.
그러자.
[뛰는 ISDN 위에 나는 ADSL] [구리선은 가라! 광통신 ADSL이 왔다!] [월 3만 원에 무제한 초고속 인터넷으로!]초고속 인터넷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사실, 미래에는 초고속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린 ADSL.
지금 이게 최선이었다.
‘월급이 70만 원이니까 여기서 3만 원이 빠지고, 부모님 용돈도 드리면……. 아, 너무 빠듯한데.’
남은 돈을 계산해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인턴 월급이 너무 적기도 했지만, 집안의 가장이 실직한 지 벌써 1년.
IMF로 힘든 집안의 현실마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 직장도 구해 드려야 하는데…….’
한참 고심하던 진혁이 전화기를 들었다.
“네, 여기 풍납동 우성아파트인데요. ADSL 신청하려고 합니다.”
뚜욱.
전화를 끊은 진혁이 다시 공책을 폈다.
4. 돈 벌기.
5. 아버지 직장.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 * *
서너 시간은 잤을까.
잠시 잠이 들었던 진혁은, 설치 기사가 오자 억지로 눈을 떠야 했다.
설치가 끝나자, 곧장 PubMed에 접속했다.
97년 6월에 대중에게 공개된 펍메드.
미국 국립 의학 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뿐만 아니라 미국 의학계에서 발표한 수천수만 편의 논문들을 전부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딸깍.
딸깍.
구형 컴퓨터의 버벅거림은 여전했지만, 마우스 클릭질 몇 번에 빙긋 웃을 수 있었다.
원하던 자료를 찾았으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작업이었다.
타닥. 타다닥.
타닥. 타다닥.
논문을 국문으로 정리하고.
주석을 달며 발표 자료를 만들어 간다.
졸음도 잊은 채 자료 작성에 매진하며 공을 들였다.
인턴이 발표한다고 하면 일단 깔아뭉개고 보는 게 다반사.
만반의 준비를 다 해야 했다.
타닥. 타다닥.
타닥. 타다닥.
예상 Q&A까지 만들다 문득 든 생각.
‘저격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진혁이 발표할 자료의 제목을 다시 훑었다.
[혈흉 환자의 선제적 치료에 대한 증례]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보존적 치료를 택한 정진석.
컨퍼런스에서 이 자료를 발표하면 어떻게 될까.
‘CS에서 처치를 잘못했다는 건가?’
‘당장 수술하지 않은 걸 비난하는 거야?’
‘인턴 주제에 타과를 저격해?’
‘CS 과장님이 들으면 좋아하시겠군.’
감정적으로 쏟아질 비난과 질타가 예상됐다.
‘그냥 엎어야 하는 건가?’
사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미리 CS에 메일을 보내 발표 자료를 공유하고 그 취지를 설명하며 양해를 구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한동수가 마음에 걸렸다.
‘나를 잡으려고 별짓을 다 하겠지. 발목에 족쇄를 차는 꼴인가.’
거기에 더해.
조용히 살기로 했던 제 뜻과도 어긋나는 일이기도 했기에, 여러 상념이 휘몰아치듯 밀려들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의 의학 지식을 썩힌다면, 구할 수 있는 환자도 포기하는 꼴이 될 터.
환자를 위한 일이라면, 당장 하는 게 맞았다.
* * *
어느새 어둠이 내린 저녁 시간.
발표 자료를 완성한 진혁이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인명 검색을 하기 무섭게 한동수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진이었지만, 그의 성격을 알기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진짜 별종이란 말이지.’
타닥. 타다닥.
타닥. 타다닥.
[안녕하세요, 교수님. 인턴 이진혁입니다. 컨퍼런스 때 해당 자료를 발표할 생각입니다. 혹시 무리가 없을지요.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 미리 여쭙습니다. 발표 자료는…….]저격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뜻을 듬뿍 담은 뒤, 발신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문이 열리며 김명숙 여사가 소리쳤다.
“자는 줄 알았더니.”
“어!!? 언제 오셨어요?”
“아까 왔지. 밥부터 먹고 해.”
“벌써요?”
“벌써는 무슨! 시간이 몇 신데! 얼른 나와!”
“네!”
발신 버튼을 누른 진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모락모락 김이 나는 된장찌개.
여전히 싱거웠지만, 건강식이라고 생각하면 그만.
어머니가 손수 차려 준 집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잘 먹었습니다~!”
“더 먹지 그래.”
“아뇨, 배불러요. 제가 설거지할게요.”
“설거지는 무슨. 그건 그렇고 너 혹시 인터넷 신청했니? 베란다에 박스가 있던데.”
“네. 너무 느려서요.”
“그래? 한 달에 얼만데?”
“3만 원이요.”
“뭐!!”
타악.
김명숙 여사가 수저를 턱 하니 내려놓았다.
“얘가 진짜! 돈 아까운 줄도 모르고!”
“제가 낼 거예요. 저도 월급 받잖아요.”
“인턴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도요.”
“어차피 병원에만 있을 건데!”
불만이 가득한 어머니.
쓸데없는 데 돈을 낭비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진혁이 그녀를 달랠 회심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교수 되면 돈은 금방 모아요. 인터넷은 논문 검색하려면 꼭 필요한 거구요. 논문을 써야 교수가 되죠.”
“뭐? 교수?”
“네, 교수 되면 이 정도 돈이야 껌이죠, 껌.”
“우리 아들 교수님 되는 거야?”
“그럼요. 아신 병원 교수 이진혁! 좋죠?”
“좋다마다!”
김명숙 여사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자 진혁이 쐐기를 박았다.
아버지께는 온천욕을 하며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처음 듣는 말일 터였다.
“월급 받으면 용돈도 드릴 거예요.”
“뭐? 용돈?”
“네, 한 달에 20만 원이요. 얼마 안 되지만 필요하신 데 쓰세요.”
“정말? 20만 원이나?”
“네. 아빠도 따로 드릴 거예요.”
“아!”
순간, 김명숙 여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없이 어리기만 했던 아들이 어느새 용돈을 준다고 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20만 원이 뭐라고 참. 교수 월급도 적은데. 이제부터 제가 효도할게요.’
이젠 손으로 부채질까지 하는 어머니를 보고 있던 진혁마저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곧.
그녀가 내뱉은 엉뚱한 말에 진혁이 기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