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292)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292화(292/388)
292화. 차세대 EMR (2)
“으으. 둘 다 괴물이네, 괴물.”
담배를 태우기 위해 둑방길까지 올라온 서운태가 넋두리를 했다.
자신만만한 태도는 사라진 지 오래.
목소리에도 맥아리가 없었다. 바로 옆에선 부장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혁 선생도 그렇지만. 그 뭐야. 우용만 과장도 장난 아니야.”
“아후. 그 양반이 더 문제죠.”
“돈 돈 돈. 아주 지겹다. 지겨워.”
“나까마도 그렇고. 업계 용어에 익숙한데. 간접미투입 얘기를 하는 거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관리그룹에서 나온 줄 알았다니까요.”
서운태의 넋두리에 부장이 담배를 뻐끔거렸다.
“기술 영업하는 놈들도 데리고 왔어야 해. 처음부터 말려들었다고.”
“하, 얕보다가 된통 당한 느낌이라. 이젠 어쩌죠?”
“뭘 어쩌긴 어째. 그냥 끌려가야지. 수주품의 올리면 끝이야, 끝. 우린 손 떼는 거라고.”
“그야 그렇긴 한데.”
“왜? 적자 날까 봐?”
“네, 부실 PJT로 찍힐까 봐요.”
적자 수주를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다는 말.
IMF가 터진 후엔 어떻게든 가득률을 높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지금은 수익성도 관리하고 있었다.
담배를 꼬나문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남을 수도 있어. 흑자일 수도 있다고.”
“네?”
“이진혁 선생 말이야. 아주 꼼꼼해. 대충 넘기는 것도 없고. 디테일하다고. 그게 차라리 나아. 나중에 요구 사항 주고 수정하는 거보다 좋다고.”
“……”
“이런 스타일은 처음이긴 한데. 뭐, 좋잖아? 설계 단계부터 저러는 거.”
부장이 담배를 내버린 채 움직이자, 서운태가 그 뒤를 따랐다.
* * *
점점 뼈에 살이 붙고.
알차게 변해 간다.
포장지도.
포장지 안 내용물도.
보잘것없던 최초의 모습과 계속 달라진다.
병동 내과계, 외과계, 특수계.
외래 내과계, 외과계, 특수계.
인공 신장, 가정 간호, 중앙 공급.
주사실, 수술실.
간호 행정.
그리고 진료 협력까지.
온갖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며 회의했고.
그때마다 이진혁은 회의를 주재했다.
이에.
‘미친놈이다, 미친놈.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나온 거야.’
서운태는 기가 막혀 미칠 노릇이었다.
자기보다 어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주니어가 분명한데, 시스템에 빠삭한 이유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또다시 쉬는 시간이 되자, 서운태가 간호사를 붙잡았다.
“저, 커피 한잔하실래요?”
“아, 네. 뭐.”
자연스럽게 자판기로 발걸음을 옮기며 서운태가 물었다.
“저, 근데. 이진혁 선생님이요.”
“네네.”
“원래 저런가요?”
“네?”
“아니, 너무 빠삭한 거 같아서요. 고작 레지던트인데. 다들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뭐랄까. 괴리감이 든다고 할까요.”
서운태가 일부러 눈을 뻐끔거렸다.
순진한 척하는 거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간호사의 대답은 물론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뇨, 보통은 저렇게 못 하죠.”
“근데, 어떻게 저럴 수 있죠?”
“저야, 모르죠.”
“모른다고요?”
“네. 뭐, 별수 있나요.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괜히 따지고 들면 피곤해요.”
“그, 그래요?”
“네.”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한 간호사가 쌩하니 가 버리자, 서운태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괜히 따지고 들면 피곤하다니.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말밖에 안 됐다.
“허, 참.”
서운태가 급하게 커피를 들이켠 뒤, 담뱃갑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 * *
각종 진료과.
원무, 보험, 운영과까지.
수많은 이들이 서식 용어를 정리했고.
테이블 정의서와 화면 정의서를 만들었다.
물론.
“OCS(처방 전달 시스템)에서 EMR로 처방 정보를 연계하고, 거꾸로 EMR에서 OCS로 알레르기 정보를 연계한다는 건데요”
“네네.”
“인터페이스도 실시간으로 돼야겠지만, 제대로 된 매핑 데이터를 가져와야 하는 거 아시죠? 키값은 뭐로 잡으실 거예요?”
“일단 환자 번호로 할 예정입니다.”
진혁은 계속 끼어들었다.
마음이 급했지만.
때로는 돌다리도 두들기고 가는 게 빠른 법.
자신을 바라보는 서운태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지만, 단순한 호기심이라 여겼다.
다시 한참 진행된 회의.
진혁이 손을 들었다.
“기록 조회는 외래, 병동, 응급, 의사 처방 순으로 구성하면 좋겠는데요.”
“뭐, 순서야 그렇게 하면 되는데. 타임라인은 몇 년이나 할까요?”
“수진 이력 표시는 2년으로 하고. 그 이상은 필요할 때 펼칠 수 있게 하죠.”
“그럼 RFP(제안요청서)랑 달라지는데요.”
“뭐, 추가 사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미처 잊고 있던 기능이나 불편했던 사항을 계속 새롭게 담는다.
아직 착수 단계.
실제 개발은 진행되지 않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
그런 의미에서.
“그림판에서 형광펜 쓰듯이, 그런 기능을 추가했으면 하는데요.”
추가로 아이디어도 냈다.
* * *
가만히 듣고 있던 서운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업 대표로서 역할은 끝났지만, 해외 영업도 해야 했기에 팔로업하고 있던 그가 물었다.
“형광펜 기능이, 그러니까 색칠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거죠?”
“네, 차트를 보다가 하이라이트를 줄 수 있었으면 하는데요.”
서운태가 고개를 돌려 개발자를 바라봤다.
“가능할까요?”
“그런 기능은 없는데. 외산 솔루션을 써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다는데요?”
서운태의 반문에 진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자사 솔루션이든, 외부 솔루션이든. 상관없습니다. 필요하면 도입하면 되죠.”
“으음.”
“셀링 포인트를 저렴한 인건비로만 가져가실 건 아니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레퍼런스입니다. 레퍼런스. 여기서 제대로 구축하면 영업이 훨씬 수월해질 텐데요.”
“흠.”
“구축 후 정량적인 효과를 계산해서 들이밀면 되죠. 미국 애들, 숫자로 따지는 거 좋아합니다.”
해외 영업 또한 쉬워질 거라는 말.
닥터 리안 사건을 무마하는 조건으로 뒤늦게 이득을 취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라는 말까지 이진혁이 했다.
그 모습에 서운태도.
다른 개발자도.
다들 말이 없었다.
앳된 나이와 하는 말이 매핑되지 않았다.
* * *
저렴하게 인력을 갈아 넣는 거.
그게 구축사업(SI)의 속성이자 본질이다.
하지만.
“서머리(Summary) 형태로 디스플레이 되게 바꾸고. 사용자 친화적이고. 하이라이트도 줄 수 있고. 그럼 충분히 셀링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요.”
이진혁의 생각은 달랐다.
마치 EMR 솔루션을 만드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
고객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실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운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근데 왜 이렇게, 신경 쓰시는 겁니까?”
“네?”
“저, 이 정도면 거의. 뭐. 아신 병원도 좋고. 우리 아신 IT도 좋은 일 같긴 한데……. 이걸 왜 이렇게까지 전부…….”
직장인답지 않다는 말.
진혁의 대답은 심플했다.
“뭐,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진짜, 그 이유 때문입니까?”
“고작은 아니죠. 헬기도 선물 받았으니까요. 그보다 가계도 기능도 넣었으면 좋겠는데요.”
진혁이 가계도 기능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자, 서운태가 떨떠름해 했다.
“환자 중심으로 5계층을 그려 달라는 거죠?”
“네, 나중에 미국에서 셀링할 때 좋을 겁니다. 가족력을 직관적으로 볼 수 있죠.”
“음.”
“구성원 간 간격은 유지하고. 상하 이동은 빼고. 일괄로 정리할 수 있게 기능 넣고요.”
“네네.”
“개인마다 선호하는 단축키가 다르니까. 단축키는 개별 설정 가능했으면 하고. 뭐.”
한참 계속된 설명.
통합 뷰어에서 직접 수정할 수 있게도 바꾸고.
영상 EMR에서 스캔할 때 수진 이력을 추가할 수 있게도 바꾸고.
OCS와 EMR 간 연계 시 팝업 화면도 넣자는 말을 했다.
거기에 더해.
“병동에서 지원대기실로 처방 내려 달라는 요청이 많은데. 그것도 넣으시죠.”
“어머, 그래도 돼요?”
“그럼요. 필요한 건 다 넣어야죠.”
다른 이들의 가려운 부분까지 긁어 준다.
간호사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무과도 도와주는 걸 보며 서운태가 기막혀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할 이진혁이 아니었다.
“원무는 1일 차 때 환자 정보가 넘어오지 않아서 고생하는데요. 서식 불러오기 기능 넣어 주시고.”
“네네.”
“기준 정보 잘못 매칭된 거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힘든데. 수술 코드명이 없으면 새로 등록하게끔 해 주셔야 하고요.”
또다시 시작된 설명.
서운태가 눈을 뻐끔거렸다.
물론 연기는 아니었다.
이진혁은 뭐랄까.
괴물, 그래.
괴물이 틀림없었다.
* * *
야심한 밤.
평소라면 술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야 했을 서운태가 야근하고 있었다.
아신 병원에서 넘어온 자료.
미국 병원 사례를 정리한 방대한 보고서를 훑었다.
‘뭐야, 왜 없어?’
딸깍. 딸깍.
한참을 훑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건 이진혁이 제안했던 내용이 미국에서도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거.
셀링 포인트로 충분히 먹힐 거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듯, 오히려 미국보다 선진화된 EMR을 만들고 있었다.
“하……. 이 인간 대체 정체가 뭐야.”
문제는 그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된다는 거.
아무리 천재라지만.
이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한번 보고 다 따라 할 수 있다고 했지, 이런 상품 기획 능력까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물론 아예 없는 것만 창조해 낸 건 또 아니었다.
한 달간 계속됐던 병원 투어.
그중 괜찮은 건 보고서에 넣었고 이번 차세대에 녹여 넣고 있었다.
“진료과별로 이미지 그룹을 추가해 달라고 한 건 다른 병원도 하고 있긴 한데. 음…….”
서운태가 불과 세 시간 전에 끝난 회의를 회상했다.
– 자주 쓰는 이미지도 그룹을 지정해서 불러올 수 있도록 하자는 거죠.
– 치과를 예로 들면 치아 사진을 올려놓고. 안과를 예로 들면 안구 사진을 올려놓는 걸 말하는 겁니다.
– 물론 추가, 수정, 삭제할 수 있도록 기능을 세분화해야 하고요.
거기서 그쳤다면 그냥 고개만 끄덕였을 터.
한데.
“메신저까지 넣어 달라고 했지. 그래야 잘 팔릴 거라고.”
그룹웨어 기능까지 넣어 달라고 했다.
조직도만 보였던 인트라넷.
서로 메신저를 할 수 있게, 소통할 수 있게 바꾸자고 한 것이다.
애송이 취급 따윈 버린 지 오래.
오히려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누구냐, 너.”
혼잣말을 중얼거린 서운태가 초록 창을 켰다.
미래인, 타임머신, 외계인.
기타 등등.
그 스스로도 미친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검색을 하는 서운태였다.
* * *
저니맵을 그리기 위한 담당 간호사와 의사가 지정됐고.
디자인팀이 따로 붙어 그들을 인터뷰하고 어떻게 일하는지 보는 과정까지 진행됐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외래, 병동, 응급실별 케이스를 선정하고.
그 케이스에 맞게 샘플을 뽑아내는 과정까지 거쳤다.
이 모든 게 개발 전에 이뤄진 일.
2주 만에 해결된 일이다.
그러니.
“허허, 생각보다 좋은데?”
TF장인 진료부원장이 고개를 주억거린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갈아엎고, 수정하고, 고치고, 다시 제안하고.
포장물과 내용물을 완전히 바꾼 제안서.
퍼펙트했다.
물론.
“솔직히 하던 일도 계속하라고 해서 짜증 났는데. 이 선생님, 진짜 최고예요.”
“이 선생. 고마워, 로딩이 확 줄었어.”
“난 처음부터 믿고 있었다니까.”
뭐, 이런 류의 칭찬도 들을 수 있었다.
마도를 막내나 다름없는 자신이 서고 있었지만, 시기 질투보다 좋아라 하는 것이다.
그만큼 일이 많아지는 걸 반기는 이는 없기 때문.
그렇게 정신없이 현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
서운태가 찾아왔다.
“저, 음.”
“편하게 말씀하세요.”
“혹시…….”
“네네.”
“이런 말 하면, 미친놈 같긴 한데요.”
“네.”
“혹시 상태창이라고 소리쳐 보시겠어요?”
“네??”
진혁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쳐다보자, 서운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 그가 따져 물었다.
“아니, 조금 이상해서요.”
“…….”
“주니어인데, 시스템을 너무 잘 아는 것도 그렇고. 마치 차세대를 구축해 본 것처럼 굴고. 조금, 그게.”
“…….”
“디자인팀한테도 물어봤는데. UI/UX. 사용자 경험. 이런 건 보통 의사들이 모르는 단어라고 하더라고요.”
그 자신의 행태가 이상하다는 말.
진혁이 헛웃음을 켰다.
살다 보니 이런 말까지 듣는다는.
뭐, 그런 느낌이랄까.
서운태가 입술까지 깨물며 제 앞을 떠날 거 같지 않자, 진혁이 재차 손을 내저었다.
“애니메이션 좋아하시나 봐요.”
“아, 뭐. 그렇긴 한데. 일단 해 보시겠어요?”
“음.”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애원하는 서운태.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태창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않던가.
아니, 그보다.
‘김윤택 선배가 저런 걸 요구하긴 했었는데…….’
애니 덕후인 김윤택과 똑같은 만화를 본 게 틀림없었다.
* * *
어느새 이현아의 부친은 퇴원한 상황.
뒤늦게 집에 돌아온 진혁이 이현아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물론 대화 주제는 한정적이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항상 집에 올 땐 털어 버리고 와야 한다던 아버지의 가르침.
힘든 거나 어려웠던 일.
기분 나쁜 건 절대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 영업 대표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어머, 그래요? 그래서 했어요?”
“아뇨. 그냥 웃고 말았죠.”
“에이, 그냥 해 보지. 뭘 또 그랬어요. 그 사람 집요한 거 같다면서요.”
“애들 장난 같아서요.”
“그래도 재밌을 거 같은데. 한번 해 봐요. 혹시 알아요? 이상한 능력이 있을지?”
환자를 살리는 데 도움 될 거라는 함의.
그냥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지만, 전화를 끊은 진혁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울 앞에 섰다.
어차피 회귀도 말도 안 되는 일.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의 발로.
곧.
“상태창!!”
개미만 한 목소리로 진혁이 소리쳤고 그 결과는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평생 이불킥을 할 만한 행동.
진혁의 얼굴이 시벌겋게 달아올랐다.
* * *
침대에 누은 진혁이 이불킥을 연신 하고 있을 때.
강릉 분원에 파견 나가 있던 최재성도 똑같이 거울을 보며 외치고 있었다.
“상,,,태,,창!”
그의 눈가에 눈물이 그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