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307)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307화(307/388)
307화. 바이스 레지던트 (3)
“스트레칭은 하고 계시죠?”
뜬금없는 질문.
박선정이 황당한 듯 반문했다.
“아니, 왜 대답이 그렇게 나와요?”
“의사도 손이 가장 중요해요.”
“…….”
“수전증이 오거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은퇴하죠. 저는 이렇게 하는데. 잠깐 보여 드릴까요?”
진혁이 깍지를 낀 다음 손목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사실 바이올리니스트 박선정이 아니냐고 대답할 수도 있었다.
처음엔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게 확실해진 상황.
신체적 특징만 봐도 그 자신이 아는 박선정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 와 맞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대화 단절만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뭐, 이 정도는 아실 거 같고.”
“…….”
“내재근(Intrinsic muscle of hand, 손 근육 중 하나)을 자극하려면 이렇게 해도 돼요.”
깍지를 낀 채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쫙 펼친 다음.
강하게 힘을 줬다가 늘어트리길 반복했다.
그러고선 다시 왼손을 쭉 내민 채.
손바닥을 역순으로 뒤집어.
반대 손가락으로 강하게 눌렀다.
손목 스트레칭 후 이어진 건 손가락 스트레칭.
마술사가 마술 전에 손을 풀 듯,
손가락을 위아래로 접었다 피고.
검지와 중지를 붙인 채.
약지와 엄지만 움직이길 반복했다.
손가락 관절염을 예방하는 스트레칭 중 하나.
이른바 손가락 벌리기였다.
중지와 약지.
다시 약지와 새끼손가락까지 손가락을 전부 움직이던 진혁이 웃었다.
“손목건초염, 손목터널증후군 환자한테도 좋은데, 이렇게도 해 보세요.”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그럼 이건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거.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잖아요.”
“그래요? 혹시 제가 모르는 것도 있나요? 평소엔 어떻게 하세요?”
“그건…….”
“저도 외과 의사라. 알려 주시면 참고할게요.”
“됐어요. 내가 누군지 모르죠? 그래서 시간 끄는 거. 다 알아요.”
퉁명스러운 반응.
박선정은 처음 들어왔을 때 보여 줬던 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에 진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왜 은퇴했나 했더니, 손에 문제가 있어서 은퇴했구나.’
스트레칭 시범을 보여 달라는 말에 이렇게 예민하게 나올 이유가 없었기에 내린 결론.
한데.
‘굳은살은 왜 남아 있지? 아직 연습하는 건가?’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연주는 축복이라며 60대까지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많은 시대.
손 때문에 은퇴했다면 굳은살이 남아 있는 건 또 이상한 일이었다.
* * *
이젠 고작 15분이 남은 상황.
집도의보다 늦게 들어갈 순 없었다.
‘시간이 없는데…….’
“등은 괜찮으세요?”
“네?”
“등이요, 등. 조금 불편해 보여서요.”
“갑자기 등은 왜요?”
“생각보다 바이올린이 무겁잖아요. 허리도, 어깨도, 전부 무리가 가죠. 자세도 안 좋고요.”
“…….”
“몸을 숙여야 하는데. 한쪽으로 기울이는 것도 그렇고. 뭐, 힘도 줘야 하고요. 그래서 디스크 환자도 많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요?”
“아까 보니까, 등도 굽어 있고. 왼쪽 어깨는 올라와 있어서요. 골반도 뒤틀려 있을 거 같은데…….”
“…….”
“잠깐, 골반 좀 볼게요.”
“됐어요.”
“잠깐이면 돼요.”
진혁이 서슴없이 손을 넣어 골반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왼쪽 골반이 뒤틀려 있었다.
오랜 연습의 상흔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훅 들어갔을까.
박선정이 꽥하니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진짜! 내가 누군지 모르죠!?”
“아뇨, 압니다.”
“아뇨. 알면 이렇게 시간만 끌 리 없어요. 내가 누군데요! 누군지 말해 봐요!”
“바이올린 전공. 이름은 박선정. 그러니까 바이올리니스트 박선정 씨 아닌가요?”
“……!”
“왜요? 틀렸나요? 추론이라 인정 못 하겠나요?”
박선정의 눈이 잘게 떨렸다.
간호사도, 이송팀 직원도, 의사도.
전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냄새나는 의사만이 자신을 알아보자 놀란 눈치였다.
“맞아요. 한때는 그렇게 불렸죠. 뭐, 눈썰미 하나는 인정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됐어요. 피곤하네요.”
명백한 축객령.
진혁이 무어라 대답하려던 순간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 자신을 찾는 전화.
진혁이 곧바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시시포스의 형벌! 연습은 형벌이지만, 시시포스처럼 즐겁게 해야 한다! 그 말 인상 깊었습니다!”
* * *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다 보니, 눈썰미가 좋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더니 휑하니 나가 버린다.
자신이 누군지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게 틀림없는 상황.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온다.
하지만 농락당했다는 불쾌감보다 오히려 호기심이 솟구친다.
박선정이 쭈뼛거리며 서 있는 1년 차, 배성만에게 물었다.
“저 사람 누구죠?”
“네?”
“방금 저 의사 선생님이요! 냄새도 나고! 며칠은 씻지도 않은 거 같은! 저, 선생님이요!”
“이진혁 선생님, 모르세요? 천재 의사로 유명한데요.”
“이진혁? 이진혁이 누군데요!? 저 사람이 날 어떻게 알죠?”
“그건 저도 잘……. 근데 진짜 모르세요?”
“네, 몰라요. 모르니까 물어봤죠!”
“…….”
서로 말문이 막히는 상황.
배성만은 이진혁을 모르는 박선정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고.
박선정은 마땅히 알아야 할 걸 모른다는 눈치로 자신을 바라보는 의사를 보며 황당해했다.
일개 의사를 그 자신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왜요, 누군데요.”
“저, 검색해 보시면 됩니다. 누군지 바로 나올 거라서요.”
“노트북이 없는데요.”
“아, 그러네요. 음, 이 선생님은…….”
배성만은 어쩔 수 없이 이진혁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천재다? 한번 보면 다 따라 할 수 있다?”
“네네. 천재 의사로 유명하죠. 그보다 저, 진짜 히스토리 테이킹을 해야 하는데. 제가 너무 곤란한 상황이라……. 이젠 진짜 병력 좀 알려 주세요.”
“…….”
“내기에서 지신 거 같은데. 안 될까요. 이 선생님도 저 때문에 오신 건데요.”
배성만이 사정을 설명하며 애원했다.
곧 있으면 오후 회진.
2년 차의 호통보다 무서운 게 교수님의 매서운 눈초리였다.
결국.
“담배는 하루 한 갑. 15년 전부터 폈어요.”
“당뇨나 다른 기저질환은요?”
“당뇨는 없어요.”
“가족 중에 위암이나 다른 위장 질환을 겪은 적은요?”
“가족력은…….”
그간 입을 닫아 왔던 박선정이 마지못해 대답하기 시작했다.
* * *
“36세 여환, 노작성 호흡 곤란(Exertional dyspnea, 의식하지 않으면 호흡이 어려운 상황), 하지부종을 주소로 내원했고. 내시경 검사 결과 소화 궤양(Peptic ulcer)이 확인됐습니다. 유문부 협착으로 위출구가 폐쇄돼 당장 수술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래? 흡연력은?”
“15년 동안 하루 한 갑. 줄담배를 피웠다고 합니다.”
“차트 띄워 봐.”
“옙.”
배성만이 차트를 띄우자 교수들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알부민-크레아티닌 비율(ACR)은 34mg/g.
혈액 내 단백질 대사 노폐물인 요소 질소는 정상 수치를 넘어선 25mg/dL.
사구체 여과율(GFR)도 튀어 있었고.
다른 수치 또한 좋지 않았다.
“콩팥도 안 좋고. 간도 별로고. 갑상선 수치도 튀고. 하지 부종이면 폐도 안 좋고, 심장도 안 좋은 거 같은데?”
“예, 호흡기내과랑 내분비내과에 협진 의뢰했습니다.”
“흠.”
“리시노프릴, 로사르탄 처방 오더 나갔고. 이뇨제로 스피로노락톤. H2 차단제로 라니티딘이랑 판토프라졸 처방 나간 상태입니다.”
“내시경 결과 좀 보지.”
“옙.”
컨퍼런스 회의답게 배성만이 곧바로 영상을 띄웠다.
위체 하부 소만부에 4cm의 궤양.
그 크기로 보나 변색된 색깔로 보나 만성 궤양에 가까웠다.
“소견은?”
“만성 궤양으로 나왔고. 1년 전에 삼선 병원에서도 똑같이 확진됐다고 합니다.”
“그래? 삼선 자료는 받았고?”
“회의 끝나면 바로 전화해 보겠습니다.”
“음.”
누군가 불편한 침음성을 토해 내자, 배성만을 혼냈던 2년 차가 나섰다.
“환자가 협조적이지 않아서 조금 늦었습니다. 바로 전화해 보겠습니다.”
“그래?”
“예. 아무래도 우울증인 거 같습니다.”
“뭐? 우울증?”
“네. 안티나탈리즘(Antinatalism, 반출생주의)적인 생각을 자꾸 표출한다고 합니다.”
“뭐?”
다들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반출생주의라니.
태어난 일 자체를 후회하고 염세적인.
그러니까 삶을 사는 이유 자체를 못 찾는 이들이 찾는 이론이 아니던가.
치료를 위해선 환자의 협조가 수반되어야 했기에 다들 헛웃음만 켰다.
그때, 배성만을 도왔던 진혁이 나섰다.
“박선정 환자는 바이올리니스트. 3년 전에 모종의 이유로 은퇴한 거 같습니다.”
“아는 사람인가?”
“아뇨, 우연히 대화해 봤습니다.”
“그래?”
“네, 근데 대화 자체를 거부했지. 저런 말을 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흐음.”
“궤양 크기도 그렇고. 삼선에서도 가만둔 게 이상한데요. 왠지 치료를 거부한 게 아닐까 싶은데. 좀 더 파악해 보겠습니다.”
“뭐, 급한 건 아니니까. 일단 다음 환자로 넘어가지.”
“옙.”
한참 계속된 컨퍼런스.
30분이 지나서야 회의가 끝나자.
진혁이 곧장 배성만을 호출했다.
“어떻게 된 거야? 반출생주의라니. 그런 소리는 없었잖아.”
“그게…….”
“왜, 뭔데.”
“히스토리 테이킹을 끝내고 나서. 뭐, 자긴 어차피 끝났다. 사는 게 고통이다. 태어났으면 안 됐다. 이런 소릴 했습니다.”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예. 시시포스 얘기도 하면서. 신이 인간을 태어나게 한 건, 그 자체가 형벌이라고 했습니다.”
“뭐? 하!”
진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직이 혀를 찼다.
분명 몇 년 전에는 시시포스가 행복했을 거라고 했던 박선정이었다.
한데 정반대되는 말을 했다니.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 * *
5층 수술실 식당.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놓친 의료진이 식사하는 작은 공간이다.
물론 메뉴 개수도 적었고, 간단하게 요기만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밥차를 운영해 배식하는 곳보다는 형편이 좋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대충 밥을 뜬 진혁이 앞에 앉아 있던 장혁준에게 물었다.
“오늘은 좀 어땠어요?”
“똑같죠, 뭐.”
“또 혼났어요?”
“괜히 말 걸지 말아요. 죽을 맛이니까.”
저기압인 장혁준.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오래가진 않으리라 여겼다.
그도 지금 자신처럼 달리는 중이니까.
“지난번에 들었던 그 연주회 실황이요. 박선정 씨. 왜 은퇴했는지 알아요?”
“아뇨, 모르죠.”
“여자 친구는 알지 않을까요? 검색해도 안 나오던데.”
“간접명령어 같은데. 물어보라는 거죠?”
“네.”
척하면 척.
역시나 눈치 빠른 장혁준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해에 있잖아요. 촬영 중일 수도 있고.”
“아…….”
“누구 때문에 남해에 갔는데. 흥. 밥이나 먹어요.”
“그래도 좀 물어봐 줘요. 전화는 자주 할 거 아니에요. 어차피 만날 시간도 없잖아요.”
“그래도 잠깐이라도 볼 수 있는 거랑. 아예 못 보는 거랑은 다르죠.”
협조적이지 않은 장혁준.
그 자신이 또다시 오지랖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오태상이 화려하게 자폭한 이후에도 굳이 촬영을 강행한 정아름이 못마땅한 게 틀림없었다.
“우리, 같이 공부할까요?”
“지금도 같이 하잖아요.”
“아뇨, 뭐. 지금은 공간만 같이 쓰지. 따로 하고 있잖아요. 스터디 하듯이 같이하자고요.”
“흠…….”
“그리고 그거 알아요? 정 PD가 이 PD한테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거?”
“엥? 갑자기 그건 왜요?”
“결혼하면 족보가 꼬일 거 같아서요.”
“아…….”
순간 장혁준이 눈이 커졌다.
정아름이 이진혁을 부르는 호칭은 형부로 변할 터.
그럼 그 자신은…….
“으으. 진짜 누가 모쏠 아닐까 봐. 벌써 결혼 생각을……. 어효, 갑시다, 가!”
결혼 얘기는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라면서도, 훗날을 위해 움직이는 장혁준이었다.
거, 참.
그러고 보니 뭐라고 불러야 하나.
매제? 매부?
결혼을 해 본 적이 없어 호칭부터 헷갈렸다.
* * *
어차피 정규 수술시간은 끝난 상황.
병동도 돌아야 했고.
밀린 수술 기록지와 차팅도 해야 했지만, 그대로 박선정의 병실을 찾았다.
병실 앞에 선 장혁준이 물었다.
“팬이라고 말한 다음에 떠보라는 거죠.”
“네네. 시시포스 얘기, 감명 깊게 들었다고 꼭 얘기하고요.”
“근데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한대요? 처음에는 내가 누군지 아냐고 계속 물어봤다면서요.”
“뭐, 단계가 넘어간 거죠.”
“단계요?”
“일종의 자격 의식(Sense of entitlement) 과잉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누군지 아냐고 물어본 거죠. 그 전까지는 대답도 안 했고요.”
“그 마음이 충족됐다?”
“네. 뭐, 열등감일 수도 있고. 과거에 대한 추억일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은퇴에 대한 결핍일 수도 있고.”
진혁이 한참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장혁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건 또 언제 배웠어요?”
“최예린 환자 보다가 배웠죠.”
“최예린? 최예린이 누군데요?”
“왜, 그때 고등학교 후배요.”
“아…….”
“아무튼, 그 안에 깔린 기저 심리는 잘 모르겠지만,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건 맞아요.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입원까지 해 놓고 진찰을 거부하고.”
“흠.”
“그렇다고 퇴원한 것도 아니고요.”
“뭐, PSY(정신의학과) 전공도 아니고.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일단 대화 좀 해 봐야죠.”
빨리 끝내자는 재촉.
장혁준이 여전히 볼멘소리를 했다.
“지금 엄청 바쁜데. 안 그래도 털리고 있다고요. 정신과 상담은 내가 받아야죠.”
“어허. 2호 동지가 아니라 이제 형님 될 사람한테…….”
진혁이 또다시 장난을 치자.
장혁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현아와 사귀는 걸 뒤늦게 알았을 때 너무 놀려 댔던 게 원인.
그 자신이 저지른 짓이 있었다.
* * *
잠시 후.
병실을 나선 진혁과 장혁준이 혀를 내둘렀다.
적절한 좌절감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지만, 큰 좌절.
그러니까 돌이킬 수 없는 실패는 사람을 무너지게 만든다더니.
박선정의 행태가 딱 그러했다.
그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나타나자, 중증 우울증 환자처럼 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
레지던트 휴게실에 도착한 진혁이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예, 교수님. 다름이 아니라…….”
그 상대는 박운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