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314)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314화(314/388)
314화. 바이스 레지던트 (10)
“교수님, 근데 지팡이는 왜…….”
“왜? 지팡이가 뭐.”
“지팡이는 이제 필요 없다고 하셨는데. 몸이 다시 안 좋아지신 건가 해서요.”
“걱정되냐?”
“걱정되죠.”
“왜?”
“네?”
“왜 걱정되냐고.”
뻔히 그 이유를 알면서도 물어보는 한동수.
진혁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뭐,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하기는 조금 그랬다.
결국,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늘어놓으며 화제를 돌렸다.
“뭐? 우리가 화산파라고?”
“네, 화산파. 화산에 있는 문파잖아요. 안 가 본 사람은 동네 뒷산처럼 생각하지만. 화산만큼 험준한 산도 없죠.”
“그거 칭찬이냐?”
“남아 있는 사람한텐 칭찬이죠.”
“남아 있는 사람한테?”
“뭐, 너무 험준해서요. 사람도 살기 힘들고. 봉우리도 많고. 올라가기도 힘들고. 그냥 기암절벽만 즐비하죠.”
“…….”
“외형만 보면 CS랑 비슷해요. 보기만 해도 숨 막히고. 깎아질 듯한 절벽. 올려다만 봐도 겁이 나죠.”
“그래서 화산파다? 소림사가 있는 숭산은 평평하고? 야, 인마! 이거 욕이잖아, 욕! 이 자식을 확!”
한동수가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애초에 장난삼아 가져온 지팡이.
그가 지팡이를 짚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진혁이 밝게 웃었다.
“환자만 보고 닥술(닥치고 수술)만 하다가 쫄딱 망했죠. 지금 계신 교수님들. 은퇴하면 답이 없잖아요.”
“우리도 알아.”
“그래서 가도를 놓고 계신 거죠. 절벽에 매달려서 망치를 들고. 힘겹게 싸우고 계신 거잖아요.”
“뭐?”
“밧줄로도 부족하니까. 아예 계단을 만들고 있다고요. 교수님도, 과장님도. 다른 선배들도. 전부……. 후배들이 올라올 수 있게요,”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뭐, 망해 버린 화산파든 뭐든. 전부 제가 바꿀 겁니다. 전부 다요.”
“…….”
“산이 높아서 쳐다만 보는 사람이 있으면, 산을 깎아 버릴 거고.”
“…….”
“가도를 놓는 것도 부족하면,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겁니다.”
망해 버린 흉부외과를 살리기 위해 뭐든 하겠다는 말.
공공수가 제도도 도입시켰고.
필수과의 수가도 올렸으며.
상대적 박탈감 또한 들지 않게 피부 미용 시장까지 개방시킨 진혁이었기에, 한동수는 반박하지 않았다.
왠지 정말로 해낼 거 같았으니까.
눈물을 훔친 한동수가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소리쳤다.
“그런 자식이 일반외과를 가! 어! 트리플 보드는 개뿔! 여기서 폐랑 식도. 심혈관만 다뤄도 충분했어!”
“일반외과에 지원한 거. 낭비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어, 그래. 낭비지 낭비. 아주. 영감탱이들. 애를 잡아먹으려고 눈이 벌게져서. 어효. 낭비다, 낭비.”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거론하며, 한동수가 외과를 욕했다.
당장 진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식도를 건드리다 보면 위에 대해 알아야 하고. 폐를 건드리다 보면 상복부에 대해 알아야죠. 각기 다른 기관이지만, 전부 연결돼 있잖아요.”
“그래서.”
“알게 모르게 배우는 것도 많고. 특히 병원장님도 그렇고. 덕분에 CS도 많이 좋아졌잖아요.”
“망해 가는 CS를 살리려고 GS에 갔다?”
“꼭 그런 건 아닌데요. 상황이 강요한 측면도 있고. 저도 배우고 싶었고요.”
심혈관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그랬다는 말은 할 수 없었기에, 진혁이 말을 돌렸다.
물론 오지호를 이용하기 위해 일반외과에 간 건 아니었다.
상황이 그렇게 됐고.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고생한다.
으이구, 장하다.
뭐, 이런 말이 돌아올 줄 알았다.
흉부외과를 살리기 위해 뭐든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니까.
하지만 한동수의 대답은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너, 그 뭐야. 북한에서 앵벌이를 그렇게 보낸다던데. 뭐, 그런 거냐.”
“네?”
“김씨 일가, 앵벌이. 해외 역군. 뭐, 그런 거냐고.”
“그래도 북한보다 화산파가 낫지 않을까요.”
“낫기는 개뿔. 고난의 행군. 우리도 하고 있다, 인마.”
한동수의 대답에 진혁이 쓰게 웃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현실이었다.
* * *
서걱.
서걱.
또다시 수술이다.
그것도 한동수와 함께.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엄연히 일렉티브 서저리(계획된 수술 일정)가 있는 상황.
일반외과로 돌아가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했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하지만 진짜 ‘머뭇거리는 현상’이 있는지 없는지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한동수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뭐, 어차피 스케줄 또한 전부 캔슬 나 있었다.
스승을 정할 때까지 끝장을 보려던 외과 교수들의 모략.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면서 달달 볶을 생각이었다는 말과도 같았기에 소름이 돋았지만.
빠르게 집도해 나갔다.
관상동맥 우회술.
내흉동맥을 이용해 우회로를 만들고.
멈춰 버린 혈류를 회복시키는 수술이다.
전생엔 수없이 해 본 수술이었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간 한동수를 보조하기만 했는데 이번엔 거꾸로 그가 자신을 보조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회귀 후 흉부외과에서 벌이는 첫 집도였다.
한참 손을 놀리던 진혁이 맞은편에 서 있던 한동수를 흘깃거렸다.
‘이렇게 추운데 땀을……. 여전히 몸이 안 좋으신 거구나.’
그의 몸 상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유전병.
한동수는 오늘도 한계에 도전하는 게 분명했다.
처음엔 경피적 시술을.
나중엔 이현아의 부친을 수술하면서 필드로 복귀했지만.
그는 유전병이 가져다준 천형을 오늘도 뛰어넘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 또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속도 올리겠습니다!”
“오냐!”
“갑니다!”
그를 위해 기어를 올렸다.
메스, 메젠바움, 시저, 포셉.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손만 내밀어도 척척 건네주는 스크럽 간호사.
저승 문턱에 한 발 걸쳐 있는 환자도 멱살을 잡고 끌어 올리는 마취과 의사.
매의 눈으로 수술실을 관장하는 서큘레이터 간호사.
베테랑 천지인 스텝들을 믿고 모든 역량을 뽐냈고 최선을 다했다.
아니, 폭주했다고 해야 맞았다.
1시간 30분이나 앞당겨 수술을 끝냈으니까.
그 덕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너, 이 새끼. 멀쩡하잖아. 그동안 뺑끼 부린 거 아냐. 어! 왜 CS에선 헷갈리는 게 없는데!”
* * *
흉부외과 병동.
독립된 과였지만, 애초에 외과 계열.
일반외과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물론 가까이 있다고 해서 자주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워낙 바쁘기도 했고 연차가 쌓이며 생기는 여유 또한 수술 준비로 전부 소진했으니까.
그러니 오랜만에 방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동수와 함께 로젯에서 병동으로 돌아온 진혁이 코를 벌름거렸다.
묘한 냄새가 났기 때문.
그래, 이건 매화향이다.
장미처럼 진하진 않았지만, 은은하게 풍기는 냄새.
한번 맡아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특유의 향기가 분명했다.
대도시의 팍팍한 삶에 지쳐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순박한 청년처럼 진혁이 계속해서 코를 벌름거렸다.
“하……. 좋다, 좋아.”
저도 모르게 나온 감탄사.
당장 한동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누가 좋은데? 방금 지나간 김 쌤? 아니면 이 쌤? 저기 저 박 쌤? 누가 좋은데?”
“그냥 전부 다요. 전부 다 좋습니다.”
“뭐? 너 인마, 여자 친구도 있다며?”
“그래도 다 좋은데요. 이 쌤도, 정 쌤도, 김 쌤도 전부 다 좋아서 죽을 거 같습니다.”
“와. 이 자식이 진짜, 벌써 한눈을 팔아!? 너 그러다 천벌 받는다, 천벌 받아! 우리 애들은 아무도 없다고!”
“그냥 여기만 오면 그렇게 되네요. 다들 아는 얼굴이라서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쳤다.
지위와 계급의 차이만 따지면 수직적인 인간관계.
그간 쌓아 온 정은 교수와 레지던트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었다.
27번째라지만, 나름 부자 관계이지 않던가.
진혁이 바삐 움직이는 이들을 가리켰다.
“이를 안 닦고 가글만 일주일 하잖아요? 그럼 묘한 냄새가 나요. 박하향으로 가릴 수 없는 쿱쿱함. 안 닦아 본 사람만 알 수 있죠.”
“뭐?”
“머리도 마찬가지죠. 샴푸도 안 쓰고. 대충 비누로 쓱삭, 그것도 안 되면 물만 묻히고 수술모로 가리죠. 시간이 없으니까요.”
“…….”
“그럼 냄새가 나요. 그것도 정수리에서. 근데 그거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데 비슷하거든요. 여기만 오면 너무 익숙해서 좋아요.”
“…….”
“한번 맡으면 잊혀지지 않는. 스쳐 지나갈 때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뭐, 은은한 매화 향기처럼요. 그래서 그게…….”
“…….”
“저, 교수님? 왜 그런 표정으로 저를…….”
온도를 낮췄던 수술실에서도 땀을 뻘뻘 흘렸던 한동수.
그가 낙담할까 봐 수다쟁이처럼 굴던 진혁이 입을 닫았다.
다 함께 고생하고 있어 동지 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말을 그가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또다시 예상이 빗나갔다.
“너 혹시 변태냐?”
싸구려 감상 따윈 허용하지 않는 한동수였다.
* * *
어느덧 박선정의 퇴원 날.
환복도 하고 굳이.
그러니까 굳이 지하상가에 있는 미용실에 가서 드라이까지 하고 온 그녀는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우와. 너무 달라졌는데요.”
“그거 칭찬이죠?”
“그럼요, 칭찬이죠.”
“오랜만에 화장했는데. 늙어서 그런지 잘 안 먹네요. 좀 붕 뜬 거 같은데. 어때요?”
“에이. 좋기만 한데요.”
“그래요?”
“네.”
“너무 달라졌다는 말. 조금 기분 나쁠 뻔했는데. 뭐, 아무튼. 고마워요.”
“근데 진짜 하실 거예요?”
“그럼요, 약속했는데요.”
박선정의 표정이 결연하게 바뀌었다.
신관과 본관 사이에 있는 작은 공원을 산책하다 만났다는 암 환자.
어린아이와 약속을 했다고 했다.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겠다고.
그 과정은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진혁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수술 후에도 똑같은 증상이 나타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훨씬 진일보한 태도였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경쟁적인 환경에 노출돼 있던 게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고 했지.’
“그럼 같이 가실까요?”
“이 선생님도 가시게요?”
“그럼요. 주치의는 아니지만. 일단 가시죠.”
진혁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잠시 후.
소아암 병동 한복판에 선 박선정은 심호흡을 한참 동안 계속했다.
머리를 빡빡 민 아이들이 지켜보는 상황.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성숙한 눈빛을 가진 아이들이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뭐, 어쩌면 당연했다.
흐느껴 우는 엄마와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아빠.
항암 치료의 고통을 겪으며 죽음의 공포를 너무 일찍 알아버렸으니까.
그리고 그런 아이들 앞에서 박선정이 입술을 굳게 깨물고 있었다.
떨리고 두려운 마음.
한동수가 한계에 도전한 것처럼 그녀 또한 어린아이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5분, 10분, 15분.
말없이 그녀를 기다려 주던 이들이 눈을 빛낸 건 박선정의 연주가 시작되고부터였다.
물론 첫 시작은 불안정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손.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주가 계속될수록 음색이 자리를 찾아갔다.
– Hope라는 곡을 연주할 거예요.
– 뭐, 좌절하고 절망했던 거. 저도 똑같잖아요. 그러니까 희망을 주고 싶어요.
– 그거 아세요? 사실 지금도 무섭고 떨려요. 죽을 거 같고. 잠도 잘 안 와요.
– 그래도 해 보려고요. 밝고 힘차고 아름답게. 실패해도 좋아요. 그냥 해 보려고요.
병동으로 오면서 속내를 고백했던 그녀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음색도 음률도 모든 게 완벽한 건 아니었지만, 따뜻한 마음이 녹아 있었다.
실의에 빠진 부모를 위해.
남들 다 뛰어놀 때 병원에 얽매여 있는 어린 천사를 위해.
시시포스는 행복했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을 위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손가락으로 연주를 하고 또 연주한다.
그렇게 얼마 뒤.
연주를 끝낸 박선정이 손을 번쩍 들자, 진혁이 아이들과 함께 손뼉을 쳤다.
희망.
그래.
우리는 폐허 속에서 항상 희망을 찾는지도 모른다.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돌을 밀어 올려야 했던 시시포스가 행복했을 거라며 믿으며.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처럼.
하지만 희망이 있기에 한동수도.
그 자신도.
박선정도
소아암을 겪는 아이도.
그리고 그들의 부모도.
오늘도 삶을 영위하는 게 아닐까.
세상은 매화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